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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마지막 날 달력을 넘기기가 무섭게 몇몇 숫자들이 빨간 글씨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근로자의 날인 1일을 시작으로 5일 어린이 날, 24일 석가탄신일, 또 휴일은 아니지만 성년의 날 겸 부부의 날인 21일에, 옮기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없느니만 못해진 15일 스승의 날까지.

그 많은 빨간 날들을 제치고 정작 내 눈이 머문 곳은 평범한 날로 전락을 해버린 어버이 날이었다. 나 역시 이제 어버이 된 처지로서 거둬 먹이고, 챙겨 먹인 그 노고를 치하받고자 하는 기대 때문이 아니었다.

그 거둬 먹이고, 챙겨 먹이는 일이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치하 받아 충분한 노고임을 이제야 알았건만 알면서도 내 부모님에게 공치사 한마디 건네지 못한 나의 무정함이 비수처럼 꽂혀왔기 때문이다.

어릴 적 어버이 날은 어린이 날에 이어 휴일의 바통을 이어 받은 또 하나의 빨간 날, 홀리데이였다. 어설프게 접어 만든 카네이션을 부모님 가슴에 꽂아드리고 나면 나는 으레 할 일을 다했다는 거만함으로 아랫목을 차지했고, 꽃값이라도 지불하려는 듯 동분서주하며 엄마는 노는 자식들의 입을 채울 먹거리를 준비하셨다.

어버이 날은 어버이를 위한 날이 아니라, 당신이 어버이임을, 그리하여 자식들을 거둬먹이는 그 의무를 또 한번 음으로 양으로 각인시키는 잔인한 날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지나가버린 어린이 날은 오월이 끝나고, 다음 어린이 날이 돌아올 때까지 부모님의 살을 빨고, 피를 빠는 거머리들의 명분이 되어 엄마의 낡은 주머니를 야금야금 탐을 내게 했다.

나는 어린이였고, 어린이는 이 나라의 기둥이고, 기둥이 튼튼해야 나라가 바로 서니 힘 닿는 데까지 먹여 살려야 한다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나의 밑 트인 배꼴은 허리 한번 펼 새 없는 엄마에게 먹을 걸 요구했다. 갖고 싶은 걸 요구했고, 하고 싶은 걸 요구했다.

그걸 다 들어줘야 하는 날. 그 모든 요건을 오롯이 들어주고, 채워줘야 하는 날이 바로 어버이 날이었던 것이다. 내게 어버이는 고작 그 정도의 가치였던 것이다.

어버이 날이 되었다. 살아 실제 한번이라도 더 얼굴을 보여드리고, 마른 손을 잡아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이고, 그 분들이 진정 바라는 선물인 걸 알면서도 나는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올해도 몇 만 원의 돈으로 그 모든 도리를 대신해 버리려 했다.

엄마는 또 고맙다고 할 것이다. "니들 형편 뻔히 아는데, 뭣하러 보냈느냐"며 미안해 하실 것이다. 아버지는 염치 없다고 하실 것이다. 이제껏 먹여 주고, 키워주신 것에 대해 고맙다는 공치사도 듣지 못한 걸 억울해 하시기는커녕, 돈 몇 푼으로 도리를 다하려는 자식에게 역정을 내시거나 배은망덕을 논하기는커녕, 외려 미안해 하시며 몸둘 바를 몰라 하실 것이다.

그 부모님 앞에서 나는 잘난 척도 했었다.
세상에 나만한 효자도 없다는 듯 거드름을 피우기도 했었다.

돈봉투를 과자 몇 봉과 더불어 박스포장을 하는데 여섯살 딸아이가 종이 하나를 접어서 뛰어왔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마니 보고시퍼요. 추석에 가깨요. 사랑해요. 알라뷰."

나는 한번도 써서 드리지 못한 편지를 써서 온 것이다.

엄마는 글을 몰랐다. 아니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날 전화를 해온 엄마는 손녀의 고백에 감동을 한 듯 고맙다고 했다.

▲ 아들이 만들어 온 카네이션
ⓒ 주경심
카네이션은 다셨느냐고 물었다. 하나에 삼천원씩이나 하는데, 삼천원이 둘이면 고기가 한 근이고, 그 만큼이면 두 양주 세 끼니는 해결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삼천원짜리보다 니들이 달아주던 종이꽃이 더 예쁘더라고 했다. 그 꽃이 어딘가 있을텐디 암만 찾아도 없더라고 했다. 버린 줄 알았다.

달아주기가 무섭게 떼어버리시고는 선창으로 향하는 모습에 꽃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꽃보다는 호미가 더 어울리는 시골촌부에게 꽃은 국도 못 끓여먹는 애물단지일 뿐이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든 꽃이 무척 마음에 안 드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꽃은 틀림없이 불쏘시개가 됐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 꽃이 장롱 어딘가, 옷장 어딘가, 집안 어딘가에 훌쩍 커버려 곁을 떠난 자식들 대신 있다고 했다.

돈은 뭣하러 보냈느냐고 하시고는 손녀를 바꾸라고 하셨다. 애교 많은 딸아이는 할머니 사랑한다고, 건강하시라고, 마치 잘 교육받은 훈련병처럼 읊조려댔다.

청출어람이 아닐 수없다. 어버이날, 어버이임을 더 실감나게 해주던 나에게서 어버이의 의미를 깨우쳐주는 딸이 나왔으니 말이다.

오후에는 초등학교 1학년 아들에게서 편지도 받았다.
"엄마 아빠, 어버이날 축하드려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건강하세요.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저를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효도할게요. 그리고 엄마, 엄마는 꼭 복 받을 거예요. 사랑해요."

편지와 더불어 무료안마권도 쥐어졌다.

아들의 아귀는 제법 힘이 들어 있었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감회가 새로웠다. 아니 후회가 밀려왔다. 부모님의 자식이었던 나, 나는 한번도 내 부모님에게 편지를 쓰지 못했다. 행복을 언급하지도 않았고, 닭살 돋는 사랑도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저 사는 모양새가 답답했고, 짜증났다. 부모님처럼 살지는 않겠다고 앙다짐만 했었다. 한번은 행복하시라고, 사랑한다고, 효도한다고 해도 되는 것을...

내 생애 처음으로 카네이션을 받아본 서른 셋 해의 어버이날, 나는 이제야 부모를 이해하는 자식,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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