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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제는 어버이날이었습니다. 애당초 부재했던 어머니는 차치하더라도 아버님마저 20여 년 전 작고하신 때문으로 매년 어버이날을 맞는 저의 감회는 축축한 비애입니다. 하여간 어제도 아침 일찍 출근을 서둘렀습니다. 그러나 마음엔 묵직한 돌이 얹혀져 무겁기 그지없었지요.

아내가 다시금 조반도 들지 못하고 새벽부터 꿍꿍 앓은 때문이었습니다. 원체 몸이 약한데다가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 백화점에 나가는 아내입니다. 그런 직업의 특성 때문으로 아내가 쉬엄쉬엄하지 않고 욕심을 부려 강행군을 하자면 늘 그렇게 하루는 그야말로 '반은 죽어서 지내야 하는 날'이 주기적으로 도래합니다.

근데 어제가 바로 그런 날이었지요. 아무튼 어제도 새벽부터 일어나 그렇게 반은 죽어있는 아내의 발 마사지를 해주고 출근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금 '내가 못 살고 능력이 없는 때문으로 가련한 아내가 저처럼 고생이 막심하다!'는 자책의 감회가 밀물로 몰려왔습니다. 하여 출근길이 가볍지 않았음은 물론이었지요.

출근하여 일을 하다가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점심을 얻어먹으러 나갔습니다. 대낮부터 삼계탕에 소주까지 얼큰하게 마시고 나니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하여 오후엔 흥뚱항뚱하다가 평소보다 일찍 퇴근을 하였지요. 퇴근길엔 곧바로 처갓집으로 갔습니다.

그동안 병원서 장기요양 중이시던 장인 어르신께서 마침 그제 퇴원을 하시어 집에 오셨다는 연락을 받은 때문이었습니다.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하나 사서 처갓집에 들어서니 마침 어버이날이라고 처형과 처제도 와 있었습니다.

"이런 건 뭣 하러 사 왔어?"라며 장모님께서 타박을 하셨지만 그건 분명 진정한 속내가 아니셨기에 모른 척 했습니다. 근데 장기투병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몸무게가 얼추 반으로 줄어든 장인 어르신을 뵙자니 울컥 슬픔이 다가오더군요.

"쑥떡 만들었는데 먹어 봐."
"저야 뭐 술이나 좋아하지 떡은 별로…."

장모님께서 내오신 쑥떡을 보자니 쑥떡을 좋아하는 아내와 함께 못 온 것이 다시금 명치끝에 뭉툭하게 걸리는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나저나 왜 자네만 혼자 왔나?"
"또 아파서 아침에 사경을 헤매는 걸 보고 출근했는데 잠시 전에도 전화를 했지만 안 받는 걸 보니 여전히 꼼짝을 못 하는 것 같네요."

그러자 처갓집 특유의 끈끈한 '가족의 힘'이 불끈 활화산으로 용솟음쳤습니다.
"마침 그 쪽(우리 집 부근)으로 약을 가지러 갈 일이 있는데 함께 가세나."
그러자 처형과 처제도 벌떡 일어났습니다. 장인어르신께 다시 찾아뵐 것을 약속하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아내는 집에 없었습니다. 안방과 아들 방, 심지어는 옥상까지 올라가 봤지만 아내는 찾을 길이 없었지요. 아내의 핸드폰을 또 두들겼지만 여전히 함흥차사인 때문으로 우리 모두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아프다는 애가 어딜 간 겨?"
"그러게 말예요."

음료수를 드리고 나서 잠시 잡담을 나누다가 세 분은 저희 집을 나가셨습니다.
"돌아오는 대로 전화 좀 하라고 해."
"네."

몸이 아프다는 이놈의 여편네가 대체 어딜 간 걸까? 병원에 간 거야, 아님 겨우 기운을 차리곤 목욕을 하러 간 걸까? 몹시도 궁금하고 불안했기에 다시금 아내의 핸드폰을 연방 두들겼지만 그러나 메아리는 없었습니다.

공연히 울컥 또 속이 상하기에 술을 한 병 더 마셨습니다. 그러자 진짜로 졸음이 허겁지겁 몰려오더군요. 그렇게 침대에 쓰러져 약 두 어 시간을 잤던 가 봅니다. 전화벨이 울리기에 일어나 비몽사몽으로 받으니 오매불망했던 아내였습니다.

"대체 어딜 갔기에 전활 안 받냐?"
"지금 00동(처갓집)에 와서 엄마가 주신 쑥떡 먹고 있어, 당신은 아까 왔다 갔다며?"

진동으로 해 놓은 핸드폰 때문으로 전화를 못 받았다는 아내는 금방 오겠다고 했습니다. 술이 덜 깼기에 세수를 하고 기다리자니 잠시 후 아내가 들어섰습니다. 근데 예상과는 달리 아내의 얼굴엔 제법 화색까지 돌더군요.

"나는 당신이 다 죽어 가는 줄 알고 처갓집 식구들까지 죄 끌고 왔더니만 그러나 당신은 어디로 갔는지 당최 없더라."

약을 먹고 오전 내내 잠을 잤더니 그제 서야 겨우 기운을 회복한 아내는 제가 집에 오기 전에 지인의 병문안을 하느라 어떤 병원을 갔답니다. 이어 친정을 들렀고 다음으론 전부터 작심(!)했던 식탁과 의자를 구경하고 계약까지 하였답니다. 근데 식탁세트를 가구점 주인이 곧 가지고 올 거라며 걸레를 빨아준 아내는 술이 덜 깬 저를 또 부려먹는 것이었습니다.

"안 받을 전화라면 차라리 나같이 아예 가지고 다니질 말든가."

궁시렁 거리면서도 이제 우리 집에도 드디어 식탁이 들어서는구나 싶어 기대는 커다랬습니다. 그동안은 구닥다리 앉은뱅이 식탁에 쭈그려 앉아서 밥을 먹곤 했기 때문입니다.

잠시 뒤 빵빵거리는 소리에 대문을 여니 식탁이 도착했습니다. 조립을 마치고 우리 집 주방의 일원으로 새로이 편입된 식탁을 보자니, 그것도 마누라가 번 돈으로 장만했다고 생각하니 새삼스레 아내가 더욱 고맙고 미더웠습니다.

"근사하네! 잘 샀어!"
그 식탁의 유리 밑에는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찍었던 사진을 두 장 집어넣었더니 더욱 보기 좋았지요.

식탁에 앉아 아내에게 아까 처갓집 식구들이 '쳐들어왔던' 곡절을 얘기하자 아내는 다시금 가족의 정겨움과 살가움에 취했던지 행복감에 취한 기색이 더 또렷했습니다. 그렇게 환담을 나누고 있는데 전화가 와 받으니 아들이었습니다.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글쎄다, 돈도 없을 텐데 그냥 오지 않고?"
"오늘이 어버이날인데 빈손으로 가기가 뭣해서요."
"그럼 맥주나 한 병 사 오렴."

이윽고 아들이 사 온 맥주 두 병과 아들이 더불어 셀프서비스로 만든 야채와 햄이 버무려진 안주는 우리 가족의 근사한 심야 파티로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 즈음 또 동가홍상으로 서울의 딸에게서도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이놈아, 지금이 몇 신데 이제 서야 전화를 하는 겨?"
하지만 어제는 딸도 나름대로 바빴다고 했습니다.

"알아. 그렇게 바쁘고 열심히 사니까 우리 딸이 늘 그렇게 장학금을 받는 거라는 걸."
"어버이날임에도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냐, 네 오빠가 네 몫까지 모두 했는걸 뭐, 그나저나 어디 아픈 덴 없고?"

저에게서 전화를 빼앗아 든 아내는 또 다시 딸과 '여자들만의 수다'로 얼추 십 분 이상이나
미주알 고주알을 따졌지요.

하지만 그처럼 모녀간의 살가운 모습을 보자니 저는 다시금 어떤 또렷한 실체를 천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건 바로 아무리 이 세상이 각박하고 에고이즘이 창궐하고 만연한 풍진 세상이라곤 해도 가족처럼 든든하고 믿음직스런 원군(援軍)은 역시나 다시없음을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가족은 영원한 행복의 화수분이자 동반자라고 했던 가 봅니다.

덧붙이는 글 | 5월 가정의 달 특집 기사 응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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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초경서반]&[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 대전자원봉사센터 기자단 단장 ▣ 月刊 [청풍] 편집위원 ▣ 대전시청 명예기자 ▣ [중도일보] 칼럼니스트 ▣ 한국해외문화협회 감사 / ▣ 한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CEO) 수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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