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현재는 인종박물관으로 쓰이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옛 왕궁
현재는 인종박물관으로 쓰이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옛 왕궁 ⓒ 김성호
서방세계에도 잘 알려진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도 이 교회 지하무덤 납골소에 역대 황제 및 여황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파란만장했던 정치적 역정만큼이나 죽어서도 오랫동안 영혼마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셀라시에가 이곳 삼위일체 교회에 안장된 것은 죽은 지 25년이 흐른 지난 2000년 11월 5일. 1974년 마르크스주의 군장교들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 셀라시에는 다음해인 1975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그 시신은 왕궁 화장실과 베타 마리암 게다 교회를 전전했다.

지난 1892년 황제 메넬리크 2세의 사촌의 아들로 태어난 셀라시에의 애초 이름은 타파리 마콘넨(Tafari Makonnen). 19살 때 메넬리크 2세의 외증손녀와 결혼한 뒤 1916년 메넬리크 2세의 외손자인 이야수 5세 황제를 쿠데타로 내쫓았다.

쿠데타 뒤 '라스(Ras.왕자)'라는 타이틀과 함께 황위 계승자인 황세자 지위에 올랐다. 그는 이때부터 '타파리 왕자(Ras Tafari)로 불리게 된다. 쿠데타의 이유가 재미있다. 이야수 5세가 이슬람교 우대 정책을 펴자 기독교를 배신한 배교자로 규정한 것이다.

하일레 셀라시에와 라스타파리교

1930년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이름도 '거룩한 삼위일체의 힘'이라는 뜻의 하일레 셀라시에로 바꾸었다. 셀라시에는 우선 황제 대관식 자체를 성서예언을 수행하는 의식으로 치름으로써 자신을 세속적인 황제와 종교적 교황의 이미지를 중첩시키면서 신격화했다. 대관식 자체가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상징적 교회인 세인트 조지 교회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행해지는 화려하면서도 신비로운 기독교적 대관식은 카리브해의 자메이카 흑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의 후손이라는 그의 주장도 신격화에 한몫했다. 바로 하일레 셀라시에를 구세주로 여기는 라스타파리교(Rastafarianism)가 탄생하게 된다. 라스타파리(Rastafari)교는 바로 셀라시에가 황제에 등극하기 직전까지 불렸던 이름 '타파리 왕자(Ras Tafari)'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성경을 흑인의 편에서 해석해 예수 그리스도가 흑인이었다고 주장하며,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구원자, 즉 재림한 예수 그리스도로 숭배했다.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로 미국과 카리브해에 끌려가 차별과 고통을 받고 있는 역사적 아픔이 짙게 깔려 있다. 돼지고기와 우유, 커피 등은 먹지 않지만, 마리화나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신비한 체험으로 받아들인다.

하일레 셀라시에와 밥 말리는 무슨 관계?

마다가스카르 모론다바 여행객숙소 입구에 걸려 있는 밥 말리 얼굴 그림
마다가스카르 모론다바 여행객숙소 입구에 걸려 있는 밥 말리 얼굴 그림 ⓒ 김성호
라스타파리교에서 남자들이 머리를 길게 땋아서 내리는 레게머리(dreadlock)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레게음악(reggae music)이다. 지난 1968년부터 자메이카에서 발생한 새로운 레게음악의 내용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흑인들의 아픔, 아프리카의 단결과 독립 등을 고취하는 내용이었다. 세상에서 부당하게 차별받는 자라면 누구나 간절히 원하는 것. 바로 자유와 평등, 평화에 대한 외침이었다.

레게음악의 전설적 인물인 밥 말리(Bob Marley.1945~1981)의 사상적 밑거름은 바로 라스타파리교였다.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밥 말리는 'no, woman no cry(아니오, 여인이여. 눈물을 흘리지 마오)' 등의 노래를 통해 인간해방에 대한 희망을 아프리카 뿐 아니라 미국, 유럽, 남미 등 전세계로 전파했다. 그 역시 여느 천재들과 마찬가지로 3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암으로 숨졌다.

에티오피아에서는 허름한 술집 등에서 흘러나오는 밥 말리의 레게음악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레게머리를 한 밥 말리 초상화도 에티오피아 뿐 아니라 케냐, 남아공, 마다가스카르 등 아프리카 곳곳에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남미에서 베레모를 쓴 군복차림의 체 게바라 초상화를 볼 수 있듯이.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남쪽으로, 버스로 6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샤세메네라는 도시에는 라스타파리교 추종자들의 공동체 마을이 있다. 현지인들은 공동체마을을 그냥 '자메이카'라고 부른다. 이들은 오늘도 레게머리에 레게음악을 들으면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부활과 복위를 기다리고 있다.

대중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하일레 셀라시에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일부 라스타파리교 추종자들에 의해 신격화되기도 하지만,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별로인 것 같다. 우리가 조선 말기 고종 황제에 대해 별다른 향수가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지난 1974년 좌파군부에 의해 "민중의 삶을 외면한 반(半)봉건적이고 권위주의 지배체제"라는 이유로 폐위된 셀라시에에 대한 평가는 친서방 성향의 현 정부에서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셀라시에 유해를 삼위일체교회로 안장할 때 현 정부는 "45년간 통치하면서 탄압과 잔학행위를 자행했다"며 이장행사에 국장의 지위를 허용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장행사에 참여한 군중수도 예상했던 수십만 명이 아닌 수천 명에 그쳤다고 한다. 그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가 어떤지를 알 수 있다. 내가 탔던 택시의 운전사는 "하일레 셀라시에는 부자들만 좋아한다"고 잘라 말했다.

@BRI@지난 1974년 기아로 10만 명이 사망할 정도의 사회적 혼란 속에 셀라시에는 쫓겨났다. 광대한 토지를 가진 소수의 귀족과 고위관료가 상류층을 이루는 데 반해, 인구의 70%는 가난한 소작인으로 구성된 에티오피아 사회의 봉건적 모순이 깔려 있었다. 역시 대지주로 가난한 농민들에게 무거운 소작료를 징수함으로써 사회적 모순을 가중시켰던 것이 바로 에티오피아 정교회.

황제와 귀족, 정교회는 대다수의 노동자와 소작농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데 자신들의 배만 채움으로써 민심을 잃었던 것이다. 실제로 최근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공식적으로 국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을 뿐 아니라 그 독보적 지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고려시대 사원전의 횡포로 민중의 신뢰를 잃어버렸던 귀족화된 불교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까.

하일레 셀라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지나친 친기독교 편향의 정치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인구의 절반이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이지만, 이슬람교도 역시 40%를 넘어가는 상황에서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사실상 국교로 여겼던 셀라시에 황제가 국민통합의 구심이 될 수는 없는 것. 더구나 셀라시에는 이야수 5세를, 이슬람교도를 우대했다는 이유로 권력에서 내쫓은 당사자가 아닌가.

에티오피아는 다양한 인종간의 갈등과 함께 종교적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이슬람교도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다양한 배려들을 펼치고 있다. 황제 체제의 제정을 폐지한 뒤 공화정으로 바꾼 신헌법에서는 아예 신앙의 자유를 명기했고, 아디스아바바의 볼레 국제공항 청사 안에는 이슬람교도들을 위한 예배실이 따로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에 참전한 이유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우리나라 하고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아프리카 국가로는 유일하게 에티오피아군을 유엔군의 이름으로 파견했고, 1968년 5월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에티오피아가 한국전에 참전한 데는 기독교 국가인데다 1935년 이탈리아의 점령 당시 영국의 도움으로 독립을 되찾는 등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친서방국가들과의 전통적 우호적 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 참전 용사들은 현재 아디스아바바 외곽 구릉지대인 웨레다 및 케벨레 지역에 '한국촌(Korea Village)'을 형성해 어렵게 살고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내전과 기아로 고통 받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바로 우리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던 그들의 따뜻한 마음에 대한 빚 때문일 것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