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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아프리카>는 홀로 배낭 하나 달랑 둘러메고 '김삿갓'처럼 아프리카 대륙을 76일간 돌아다닌 기록입니다.

에티오피아에서부터 시작해 케냐-우간다-콩고-르완다-탄자니아-(잔지바르)-말라위-모잠비크-짐바브웨-잠비아-보츠와나-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나미비아를 거쳐 마다가스카르까지 14개국을 6월 12일부터 8월 26일까지 다녀왔습니다. 아프리카 동부에서부터 내려와 남부 끝까지 가는 긴 여행이었습니다.

나의 여행기는 아프리카 여행을 꿈꾸는 누리꾼들과의 공유도 있지만, 사실 먼 훗날 나와의 추억대화를 위한 이야기 거리로 남겨놓는 것입니다. 혼자 떠난 아프리카 배낭여행의 경험은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뒤에서 밀어주는 보이지 않은 힘이 되어 줄 것이고, 먼 먼 훗날 인생을 참 즐겁게 살았다는 삶의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기자 주>


어린 시절 꿈꾼 '동물의 왕국'

▲ 나미비아 소수스블레이 사막의 붉은 모래언덕을 오르면서 나와의 대화시간
ⓒ 김성호
충청도와 경상도 사이의 추풍령을 넘어가는 시골마을에는 온통 산뿐이다. 10여 가구가 조금 넘는 작은 시골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을 앞에는 산봉우리가 용의 머리를 닮았다는 용두산이 있고, 마을 뒤와 옆에는 이름없는 작은 산들이 가로막고 있다.

가끔씩 하늘을 나는 비행기만이 온 동네 꼬마 아이들을 마을 밖으로 뛰어나오게 한다. 코 묻은 얼굴로 뛰어나온 아이들은 목을 쭉 빼들고 하늘을 쳐다본다. 비행기는 빨랫줄같은 하얀 두 줄기의 긴 똥을 하늘에 남긴 채 언제 다시 온다는 기약도 없이 하얀 구름 속으로 야속하게 달아난다.

이제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언저리의 옛 마을이다. 외갓집 할머니를 찾아가는 소년의 동심을 그린 영화 <집으로>의 시골마을 어귀이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유일한 볼거리인 시골마을의 흙먼지 날리는 도로 갓길에는 코스모스가 아이들 키보다 높게 자랐다. 여름 밤이면 후덥지근한 무더위를 피해 코스모스 숲으로 들어가 벌렁 드러눕는다.

밤하늘을 바라보고 누워있으면 북두칠성과 북극성 등 수많은 별들이 눈 안으로 쏟아져 내려온다. 계수나무 밑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를 하얀 달속에서 찾다가 그만 잠이 든다. 새벽의 으스스한 추위로 코스모스 숲에서 깨어나면 이슬이 옷을 흠뻑 적시고 있다.

아폴로 11호가 깨어버린 꿈

@BRI@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것은 인류역사상 놀라운 진보였지만, 언젠가는 달나라의 토끼를 만나러 가겠다던 모험심 많은 시골소년에게는 '꿈의 상실'이었다. 아폴로 11호가 '달에는 산소와 물이 없어 생물이 살고 있지 않다'는 탐사정보를 지구로 전송한 이후, 계수나무와 토끼가 달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렇듯 과학은 때로 우리의 꿈을 산산이 깨부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시골마을에도 밤이면 깜빡깜빡 흔들리던 초롱불이 사라지고, 대낮같이 밝게 비추는 전기가 들어왔다. 어둠을 밝게 비추는 '하얀 도깨비'가 들어오던 날밤 시골소년들은 모두 마을 앞 공동우물가로 뛰어 나와 우리 어른들이 맛보았던 일제시대로부터의 '제1의 정치적 광복'에 이어, 어둠으로부터의 '제2의 문화적 광복'을 맛보았다.

그러나 빛에는 반드시 어둠이 있기 마련이다. 전깃불에 가려 하늘의 달들도 별들도 희미해져갔다.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던 소년들의 초롱초롱한 눈은 마을 앞 가로등을 쳐다보게 되었다.

전기에 이어 흑백 텔레비전이 뒤따라 들어오면서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물의 왕국>을 통해 사자와 코끼리·하이에나 등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끝없이 펼쳐진 아프리카의 푸른 초원에서 뛰노는 동물들을 보면서 원숭이와 함께 풀밭에서 뒹굴고, 얼룩말과 누가 빠른지 달리기 시합을 하는 초원의 꿈을 꾼다.

아폴로 11호가 앗아간 달나라의 꿈은 아프리카 초원의 꿈으로 옮겨갔다. 과학조차도 소년의 꿈을 완전히 깰 수는 없다. 꿈은 깨어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꿈으로 이어진다. 꿈은 끊임없이 진화한다.

<동물의 왕국>은 시골소년의 단골 채널이었고, 자라면서 <내셔널지오그래픽>과 <디스커버리> <히스토리채널>로 이어졌다. 시골에서 입시지옥에 시달리던 중학교와 고등학교시절은 꿈의 암흑시대였다. 13세기 종교시대가 문명의 암흑시대였듯이, 입시가 짓누르는 우리 사회의 중·고교시절은 어둠의 터널이다. 꿈이 자랄 수 없었고, 아프리카의 초원도 잊혀졌다.

대학에서 만난 체 게바라와 아프리카

대학에 들어가면서 아프리카의 꿈이 되살아났다. 엉뚱하게도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를 통해 아프리카가 다시 돌아왔다.

인간에 대한 해방과 진보, 혁명에 대한 열정이 휩쓸던 80년대에 <아리랑>의 일제시대 혁명가 김산과 남미혁명의 우상인 체 게바라의 삶은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을 뒤흔들어놓았다. 두 사람은 고국을 떠나 인간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우다 이국 땅에서 쓸쓸히 사라져갔다는 점에서 닮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낯설고 물선 이국 땅으로의 여정에서 이들이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집 나가면 고생'이라며 울타리에서 맴도는 우리를 마냥 부끄럽게 했다.

젊은 시절 친구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떠난 4개월의 남미여행이 의대생이었던 게바라를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개인의 질병 치료보다는 세계의 모순을 치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여행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바라에게 있어 여행은 의대생에서 혁명가로 올라가는 사닥다리였다.

1959년 쿠바혁명에 성공한 뒤 산업부장관에 있던 게바라는 1965년 3월 쿠바의 장관직을 훌훌 던져버리고 100여명의 혁명군과 함께 당시 벨기에령 콩고,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달려갔다. 게바라는 남미에 이어 아프리카를 제2의 혁명전선으로 꼽았다. "내가 쿠바에서 할 일은 모두 끝났다"고 선언한 그는 "나는 정치가가 아니라 혁명가이다"는 편지를 남기고 어느날 갑자기 쿠바에서 사라졌다.

게바라, 어느 날 콩고에 나타나다

▲ 마운틴 고릴라가 있는 비룽가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콩고의 천진난만한 어린이들
ⓒ 김성호
그리고 저 멀리 아프리카 콩고에서 카키색 군복을 입고 나타났다. 오래 전 아프리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1965년 1월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여행을 통해 정의가 불의에 짓밟히는 현실을 목격했다. 불의에 분노했던 그가 인간해방을 열망하는 아프리카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콩고 혁명전선으로 떠나면서 게바라는 자식들에게 "너희들의 아빠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으며,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며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세계 어디에서든 불의가 저질러지면 그것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어떤 불의이든, 어떤 사람에게 저질러진 불의이든 상관없이. 이것이야말로 혁명가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다."

아프리카 국가와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게바라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에 대해서도 신랄히 비판했다. 아프리카 방문에 앞선 1964년 12월 11일 쿠바 대표로서 뉴욕 유엔본부 연설을 통해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과 유엔의 무능을 꾸짖었다.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야만적인 정책이 전 세계인들 앞에서 뻔히 행해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민중들은 여전히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강요받고 있으며, 이 우월함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살상행위를 감내하고 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유엔은 어찌 수수방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체 게바라로 인해 아프리카는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할 인간해방의 장으로, 인종차별의 부끄러운 전시관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길이 없다고 해도 앞으로 계속 나아가면 스스로 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는 인간해방에 대한 신념이 게바라를 머나 먼 아프리카로 유혹했을 수도 있다. 그는 평소 "혁명으로 가는 길은 죽음 외에는 어떤 것도 중단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사랑이 없으면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없다"는 게바라가 '자유를 위한 혁명'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모험을 떠났던 곳이 바로 아프리카이다.

황당한 아프리카 육군상사 출신 도우 대통령

대학 시절 서울 봉천동 하숙집에서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의 사당을 모신 낙성대를 따라 올라가는 서울대 후문으로 늘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봄이 오면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고, 관악산 끝자락의 계곡에는 농사도 짓는다. 서울 한복판에서 드물게 어릴적 시골길의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어느 봄날 개나리 향을 맡으며 학교를 가는 데 경찰들이 대학 후문쪽에 10m마다 배치되어 일일이 학생들의 책가방을 검문했다. 그 때가 대학 2학년 시절인 1982년 5월이다.

아프리카에 있는 라이베리아의 사뮤엘 도우 대통령이 서울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 박사를 받으러 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도우는 1980년 당시 육군상사로서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는데, 같은 해 육군소장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역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이 초청한 것이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도우에게 서울대가 명예정치학 박사까지 주어야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정치학은 자유와 민주주의·인간해방을 추구하는 학문이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장악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마키아벨리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는 육군상사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는 군사독재정권의 온상으로 다가왔다. 권력을 둘러싼 끊임없는 내전과 난민, 부족간의 갈등, 부패와 기아 등의 부정적 이미지로 나의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기자는 전 열린우리당 의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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