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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아프리카>는 홀로 배낭 하나 달랑 둘러메고 '김삿갓'처럼 아프리카 대륙을 76일간 돌아다닌 기록입니다.

에티오피아에서부터 시작해 케냐-우간다-콩고-르완다-탄자니아-(잔지바르)-말라위-모잠비크-짐바브웨-잠비아-보츠와나-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나미비아를 거쳐 마다가스카르까지 14개국을 6월 12일부터 8월 26일까지 다녀왔습니다. 아프리카 동부에서부터 내려와 남부 끝까지 가는 긴 여행이었습니다.

나의 여행기는 아프리카 여행을 꿈꾸는 누리꾼들과의 공유도 있지만, 사실 먼 훗날 나와의 추억대화를 위한 이야기 거리로 남겨놓는 것입니다. 혼자 떠난 아프리카 배낭여행의 경험은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뒤에서 밀어주는 보이지 않은 힘이 되어 줄 것이고, 먼 먼 훗날 인생을 참 즐겁게 살았다는 삶의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기자 주>


부슬비가 내리는 아디스아바바의 밤

@BRI@내가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제일 먼저 에티오피아를 찾은 것은 인류의 어머니 '루시'와 신비로운 시바의 여왕 전설, 우리들 마음속에 여전히 스포츠 정신으로 살아 있는 마라톤 영웅 맨발의 '아베베'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비행기는 캄캄한 밤하늘을 뒤로한 채 밤 9시를 넘기면서 서서히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공항에 내렸다. 인류의 머나먼 고향이며 신비한 역사가 숨겨진 에티오피아는 자신의 얼굴을 쉽게 나타내지 않았다. 31시간이라는 긴 비행으로 달려온 이방인을 맞이하는 것은 아디스아바바 시내의 희미한 불빛뿐이다. 서울을 출발해 홍콩에서 비행기를 갈아탄 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공항에서 또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아디스아바바까지 오는 데 꼬박 하룻밤을 비행기 안에서 보내야 했다.

공항에 내리니 우기라 그런지 비가 내려 땅이 흠뻑 젖어 있다. 6월인데도 시원한 초가을 날씨의 선선함이 여행객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입국수속도 생각보다 빠르고 친절하다. 공항에서 발급하는 1개월 짜리 여행비자를 손에 쥐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첫 기착지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벌써 편안함이 느껴진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데, 밤거리가 우리의 60∼70년대처럼 어둡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전기가 부족한 탓에 가로등이 거의 없고, 간혹 한 두개의 희미한 전등만이 그림자처럼 사람들을 비춘다. 어두운 뒷골목에는 젊은 남녀들이 담벽에 기대어 이야기를 나누고, 아직 다 팔지 못한 야채를 가져갈 마지막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 행상들의 모습도 보인다. 아프리카의 밤은 공포보다는 인정이 넘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디스아바바에서 첫날밤은 세계 배낭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바로호텔에서 지냈다. 하루 숙박비가 에티오피아 돈으로 60비르이기 때문에 우리 돈으로 하면 7천원 정도의 싼 숙소이다. 방안의 전기불은 깜빡깜빡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고, 침대는 삐그덕 삐그덕 거리고, 화장실 천장에 달린 낡은 샤워기 꼭지에서는 담석 걸린 사람의 오줌같이 물이 찔끔찔끔 나오다 만다. 허름한 여인숙이나 민박집이라고 해야 할 듯 한데, 에티오피아에서는 아무리 싼 곳도 숙박시설은 모두 호텔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별도의 인종박물관이 필요한 나라

▲ 인종박물관이 있는 아디스아바바 국립대학교 모습
ⓒ 김성호
다음날 아침 7시가 되자 전 세계에서 몰려온 여행객들이 배낭을 다시 메고 각자의 행선지를 찾아 떠나느라 부산하다. 나는 하루종일 아디스아바바의 시내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에티오피아 공용어인 암하릭어로 ‘새로운 꽃’이라는 뜻의 아디스아바바는 역사가 1백여 년 밖에 되지 않았으나 에티오피아의 확고한 정치, 경제, 외교 중심지가 되었다.

아침을 먹자마자 찾아 나선 곳은 아디스아바바 국립대학 교정 안에 있는 인종박물관이다. 어느 나라 캠퍼스와 마찬가지로 아디스아바바대학 교정도 낭만이 넘치는 곳이었다. 젊은 남녀 학생들이 교정 잔디밭에 모여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함께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겨드랑이에 책을 끼거나 손에 책가방을 들고 분주히 교실로 들어가는 학생들도 보인다.

에티오피아 마지막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의 왕궁이었던 인종박물관은 3층으로 되어 있다. 말 그대로 다양한 인종과 지역의 전통 공예와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전체 인구 7천7백여 만 명에 모두 80여 개 부족으로 이뤄질 정도로 수많은 인종으로 구성되다보니 이처럼 별도의 인종박물관이 필요한 것이다.

인종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나오면 바로 아래에 국립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고대 유물과 화폐, 문화재, 그리고 현대작가들의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는 데, 단연 여행객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지하1층에 있는 화석이다. 지하 1층 전시실 가장 깊숙한 곳에 에티오피아어인 암하릭어와 함께 영어로 “Lucy Room”이라는 문구가 씌어 있는 동굴 같은 전시실이 있다. 에티오피아를 방문하는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찾는 곳이다.

최초의 인간이자 우리 인류 모두의 어머니인 ‘루시’가 있는 곳이다. 유리 보관함에 루시의 화석유골이 최초로 두발로 서서 걸은 직립보행의 원조답게 인간의 모습을 한 채 꼿꼿이 서있다. 키 110cm 정도에 몸무게는 채 30kg이 나가지 않는 작은 체구지만 인류의 어머니다운 당당함이 느껴진다.

320만년 전에 살았던 최초의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이고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 숨쉰다. 물론 이 곳에 전시된 화석은 진짜가 아니라, 진짜를 모델로 해서 만든 석고모형이다. 진짜 화석유골은 보존을 위해 박물관의 별도 보관소에 놓여 있다. 진짜가 아니면 어떠랴. 석고모형에서도 최초의 인간이자 인류의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데.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루시의 골반이다. 둥글고 단단한 골반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우리 인류가 저 단단한 골반, 아니 저 작은 자궁 속에서 나왔다니 경외롭기 까지 한다.

'인류의 자궁' 루시는 어떻게 살았을까

▲ 국립박물관 지하1층의 인류 화석 루시 전시관 입구
ⓒ 김성호
‘인류의 자궁’인 루시의 골반을 보면서 어머니 품 같은 따뜻함을 느꼈다. 나의 어머니도 키가 작지만 그 강인함으로 ‘작은 탱크’로 불렸다. 루시가 사자와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정글 속에서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듯이, 시골에 사는 우리네 어머니들도 어린 자식을 키우기 위해 그 뙤약볕에서 밭을 갈아야 했다.

자신의 굶주린 배를 움켜쥐면서도 자식에게 고구마 하나라도 건네주던, 어릴 적 어머니의 손에서 느껴지던 따뜻한 온기가 루시의 긴 팔에서도 전해진다. 세월은 바뀌었지만, 도시에 사는 오늘날의 어머니들도 방식만 다를 뿐 자식을 위하는 마음은 320만년 전 루시와 똑같을 것이다. 인류가 아무리 진화해도 10개월 동안의 고통을 참으면서 자식을 낳는 것은 변함없이 어머니이니까.

작은 화석유골을 보면서 루시의 삶이 궁금해졌다. 루시는 어떻게 살았을까, 가족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루시가 살았던 320만년 전으로 되돌아가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원숭이처럼 주로 네발로 걸어 다니던 초기 인간에서 루시는 어느 날 최초로 벌떡 일어나 두발로 일어섰다. 저 멀리 들판에는 무엇이 사는가 궁금했던 것이다. 두발로 서서 걸으니 초원의 저 멀리 수백 m까지 보이고, 먹잇감도 눈에 쏙 들어온다.

시야가 넓어지니 무엇보다도 살금살금 다가와 호시탐탐 나를 잡아먹으려는 맹수들을 피할 수 있어 좋다. 네발로 엎드려 걸을 때는 보이지 않던 맹수들이 두발로 서서 보니 저 멀리서부터 나를 노리고 어슬렁어슬렁 거리며 오는 모습이 보인다. 예전 같으면 걸음아 나 살려라 혼비백산 달아나기 바빴는데, 이제는 옆에 있는 나뭇가지 위로 미리 올라가 혀를 냉큼 내밀면서 “나 잡아봐라”라고 맹수들을 놀릴 수도 있다. 두발로 서서 걸으니 맹수도 그리 무섭지 않고, 오히려 맹수를 스릴 넘치는 노리갯감으로 조롱할 수 있었다. 그래서 루시는 계속 두발로 서서 걷기로 했다.

루시가 두발로 서서 걷기 시작하면서 뇌의 용량과 사고력이 커졌고, 두 손으로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불을 다스릴 줄 알게 되었고,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오늘날 현생 인류로 진화해왔던 것이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의 백인과 아프리카 흑인, 아시아 황인종 등 모든 인간은 먼 옛날 하나의 어머니 ‘루시’로부터 나온 것이다. 루시의 아들딸 중 일부는 고향 아프리카에 남기도 하고, 또 다른 일부는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유럽으로, 아시아로 이동해갔던 것이다.

'정말 멋진' 루시의 이름

▲ 최초의 인류화석인 루시의 석고모형(오른쪽)과 다른 유골 잔해(왼쪽)
ⓒ 김성호
320만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루시가 1974년 11월 30일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날 고고인류학자 뿐 아니라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를 찾았기 때문이다. 고고인류학자들은 그동안 원숭이와 오랑우탄, 고릴라, 침팬지 등 이른바 유인원(類人猿)중 마지막으로 6백 만년 전에 침팬지에서 인간이 갈라져 나와 현생인류로 진화해온 과정을 설명해줄 중간고리, 바로 ‘잃어버린 고리’를 갈망해왔다.

미국의 젊은 고고인류학자인 도널드 요한슨은 에티오피아 북동부 하다르 지역의 마른 호수에서 여러 조각의 뼛조각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현생인류의 조상이라고 생각했던 4만년 전의 네안데르탈인보다 훨씬 오래된 320만년 전의 인류화석을 찾았기 때문이다. 루시 이후에도 에티오피아에서는 42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나멘시스, 440만년 전의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 등의 인류화석이 발굴되면서 인류 진화의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고 있다.

루시는 원숭이의 긴 팔과 침팬지의 구부러진 손가락을 가진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과정(半人半猿)’이었지만, 인간과 같은 둥근 골반과 머리모양, 엉덩이와 무릎, 허벅지 등이 직립보행을 할 수 있는 해부학적 조건을 갖춘 최초의 원시 인류임이 입증되었다. 엉덩이와 골반 뼈의 형태를 보니 여자의 신체구조와 비슷해 최초의 인류화석은 여자라는 결론을 내렸고, 이빨을 보니 사랑니가 나온 것으로 보아 어른으로 판명 났다. 최초의 인류는 바로 여자어른이었고, 그래서 루시를 ‘인류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친숙하게 들리는 루시(Lucy)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요한슨이 놀라운 화석의 발견을 축하하며 발굴단과 함께 맥주파티를 하고 있을 때 그들의 텐트에서 당시 유행하던 영국의 4인조 그룹 <비틀즈>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루시는 다이아몬드를 들고 하늘에…) 라는 노래가 들리자 바로 화석 이름을 루시라고 지었다. 이 노래를 지은 존 레논도 “아들 줄리안이 어릴 때 그린 그의 여자친구 루시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래저래 여자인 최초의 인류에게 붙여진 이름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루시의 고고인류학적 학명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에티오피아 현지주민들은 암하릭어로 ‘덴케네시(Denkenesh) 또는 비르키네시(Birkinesh)(당신, 멋지네요)’라고 부른다. 박물관을 나오면서 나는 루시에게 말했다.

"당신 이름 정말 끝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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