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26 13:49최종 업데이트 22.10.2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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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글어가는 포도 어릴 적엔 포도 봉지를 씌우지 않아 영글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 최수경

 
어릴 적 시골 할머니 댁 대문을 나서면 이웃집 포도밭을 마주했다. 여름방학이면 할머니 댁에서 지냈는데 방학 내내 포도는 연두색인 채 알만 키워가고 있었다. 당시는 포도에 봉지를 씌우지 않던 때라 하루하루 포도송이 커가는 모습을 보며 침만 흘렸다.

영 놀거리가 없으면 한 알 따서 시큼한 맛을 즐기며 놀기도 했다. 방학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쯤에야 포도는 검은색으로 익어갔다. 내 유년의 경험 속에 포도의 인상은 완숙을 못 채운 무정함의 대명사로, 지금도 초록색 과일만 보면 혀 양 끝에서 신 침이 인다. 크면서 마주한 청포도가 아무리 맛나도 모든 초록 과일은 시큼할 것 같아 손이 가질 않았다.
  

한창 크고 있는 포도 여름방학 내내 초록색 포도만 쳐다보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 쯤에나 포도에 색깔이 들기 시작했다. ⓒ 최수경

 
그러다가 4년 전 지인이 운영하는 샤인머스캣 농장을 방문하고 맛본 포도는 가히 충격이었다. 껍질째 깨물어 먹는 식감이 특이했고 달달한 맛에 씨까지 없는 맛과 편리성을 갖춘 맞춤형 과일이었다. 그 후 마트에서 본 가격에 놀랐다. 포도 한 송이에 2만 원이나 하는 귀한 몸값일 때가 있었다.
  

씨가 없어 먹기에 편리한 과일들 샤인머스캣은 씨가 없어 씨 없는 다른 과일들과 어울릴 수 있다. ⓒ 최수경

 
맞춤형 과일이 인기를 얻자 농가는 오랫동안 자란 포도나무를 베어내고 샤인머스캣을 심었다. 올해도 상주, 김천, 옥천 할 것 없이 샤인머스캣을 출하하고 있지만 농민은 형편없어진 가격에 울고, 소비자는 기대에 못 미치는 맛에 울고 있다. 미완숙 출하 경쟁으로 샤인머스캣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졌다고 한다.      

먹을 때 씨앗이 많아 성가시더라도 여전히 나는 흑설탕 같은 풍미가 있는 검붉은 포도가 좋다. 포도 농가의 농부는 봄부터 포도나무 가지에 매달릴 송이 수까지 따져가며 가지 치고 순 따주고 봉지 씌우며 포도를 키워낸다. 그러나 땀의 양에 비해 경제성을 따졌을 때 그 품종과 맛을 줄기차게 이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래된 포도나무는 열매가 많지 않은 대신 농축된 맛을 낸다고 한다. ⓒ 최수경

   
늙은 나무 한 그루의 가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시간의 가치이다. 노인 한 명의 경험 지식은 도서관 하나와 같다고 했다. 나이를 먹은 포도나무는 열매의 양이 줄어드는 만큼 쥐어짠 당도가 한 알갱이에 농축되어 밀도감 있는 맛을 낸다. 늙은 수령의 포도나무에서 고품질의 포도주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매년 씨앗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
  

강물에 실려온 씨앗에서 발아해 영근 수박은 네맛도 내맛도 아닌, 수박이라 할 수가 없었다. ⓒ 최수경

 
강가에 떠내려온 수박 덩굴을 발견하고 수박을 따서 쪼개 먹었던 적이 있다. 어릴 때 서리해 먹던 수박을 기대했기 때문일까. 알이 작을 뿐 생긴 것은 영락없이 수박인데 그 맛은 차마 과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내가 어릴 때 서리해 먹던 수박과 참외는 큼지막하지는 않았지만 참말로 달고 맛있었다.

참외, 수박, 호박, 옥수수 등 할아버지는 씨앗을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또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먹는 과일과 채소는 씨앗을 받아 내년에 다시 똑같은 과일과 채소를 만들 수 없다.
  

할머니의 고추 종자 종자를 보관하고 지키려는 노력을 시골의 어떤 농가에서 보았다. ⓒ 최수경

  

처마 밑의 옥수수 시골집을 다니다 보면 자주 보는 풍경이다. 이왕이면 잘생긴 옥수수를 매달 일이지... ⓒ 최수경

 
토종 씨앗은 겨우내 보관했다가 이듬해 파종하면 똑같은 결실을 본다. 아버지의 토양에서 아버지를 닮은 자식이 태어날 수 있는 것은 그리 유전 형질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처마 밑에 마른 옥수수며 마른 고추가 대롱대롱 매달린 것은 토종 씨앗을 보존했기 때문이다.
        

토종 찰옥수수 옥천군 안남면 안내면은 매년 감자 옥수수 축제를 연다. 이때 출하되는 옥수수 가운데 토종 찰옥수수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 임해란

 
채소의 경우 자가 채종하는 농가가 거의 없다 보니 종자의 대부분을 다국적 기업에서 생산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은 다수확 품종 개발을 위한 F1(잡종 1세대) 품종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교배에 의해 나온 자손을 잡종 1세대 또는 F1(first filial generation)이라 한다. 이 F1의 자가 수정 또는 F1끼리 교배해 생긴 자손을 F2라 부른다. 순종이 AA, 잡종이 Aa의 유전자를 갖는다고 가정할 때 해를 거듭할수록 부모가 갖고 있는 유전자는 점점 고정하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구매하는 씨앗인 F1 종자는 종자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두 가지 품종을 교배해 수확한 잡종(Aa)에 해당한다. 이들은 자손에서 그 형질을 보기 힘들다. 따라서 매년 씨앗을 사야 한다.

유용한 유전자를 고정하는 기술을 육종이라 하는데 우수한 품종 개발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병충해에 대한 저항성과 품질의 향상 등을 꾀할 수 있다. 한편으로 새로운 품종을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생명공학기술의 유전자 조작기술이 발전되어 왔는데 유전자 변형식품의 의미를 포함한 넓은 범위의 용어로 유전자변형생물체(GMO)가 있다.

GMO는 적은 노동력과 생산 비용으로 생산량을 증대해 식량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저장성과 가공성 개량을 통해 품질 향상을 꾀할 수 있으니 가히 국민의 먹거리 삶을 풍요롭게 바꿀 종자 혁명이다.

그러나 GMO는 불확실하다. 새로운 산물인지 아니면 전통적인 육종과 인위 선택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지 논쟁이 여전하다. 
  

가을볕의 시골집 고추가 익어가는 여름부터 가을걷이까지 이어지는 시간은 농부들에게 짧다. 내년 농사를 위해 씨앗을 보존하고자 해도 F1 종자의 확대로 토종 종자를 구하기 어렵다. ⓒ 최수경

 
더욱이 GMO는 단일 종자로 생물다양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뿐더러 해충이나 잡초에 내성이 생기면서 더 강력한 살충제나 제초제가 필요해 환경 오염이 가중될 수 있다. 종묘 회사가 곧 살충제 회사라는 말은 곧 농약도 해당 종자에만 최적화 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농민에게 병 주고 약 주는 기업의 행태를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하는 현실이다.

토종 종자가 사라지면서 종자 체계가 농민 주도에서 기업 주도로 바뀐 지 오래다. 미래 식량 위기 시대를 대비한 식량 주권 운동이 필요한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토종 종자 보존 통해 식량 주권 지키기
  

쥐이빨옥수수 옥천군 안남면 덕실마을은 토종 쥐이빨옥수수를 수확해 팝콘을 만든다. ⓒ 임헤란

  

쥐이빨옥수수로 팝콘 만들기 체험 초등학교 체험 키트로 만들어 토종 종자의 의미를 알린다. ⓒ 임해란

   

쥐이빨옥수수 팝콘 토종 옥수수인 쥐이빨옥수수로 만든 팝콘 ⓒ 임해란

 
현재의 먹거리 체계는 생산 유통 과정에서 과도한 화석 연료가 투입돼 CO₂ 생산을 유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경제성보다 지속가능성을 우선으로 토종 종자 보호에 앞장서는 농민들이 있다. 유기농업 운동, 생협 운동, 학교급식 운동, 지역 먹거리 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식량주권 운동을 하고 있다.
  

파종해 싹이 튼 쥐이빨옥수수 옥천군 안남면 덕실마을은 토종 종자가 매년 전답을 가득 메워 F1 종자가 파고들어오지 못한다. ⓒ 최수경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덕실마을은 토종 옥수수 종자인 쥐이빨옥수수를 보존하는  일에 앞장선다. 매년 쥐이빨옥수수를 심고, 팝콘 등으로 가공하며, 토종종자 인식 증진을 위한 쥐이빨옥수수 팝콘 만들기 체험 교구도 보급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안남면 배바우마을은 토종 콩을 경작하고 배바우 두부를 만들어 지역과 학교급식 등에 공급하고 있다.

"농생태 없이는 식량주권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농민 중심의 농업과 이와 결합된 사회적 생태계를 만들어가야 할 책무가 농민에게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농민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려면 소비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농업과 먹거리 문제는 농민만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토종 콩으로 두부 만들기 옥천군 안남면 덕실마을은 우리콩 두부, 쥐이빨옥수수 팝콘 등 토종 종자를 보존하고 활용해 마을을 방문하는 생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 최수경

   

토종 콩으로 만든 두부 한 주 한 번 토종 콩으로 만든 두부가 옥천과 대전 일원으로 배달된다. 우리 콩 수요에 앞장서는 소비자가 땅과 종자를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힘이 된다. ⓒ 임해란

 
농민이 자신의 땅과 삶을 말하고, 지역공동체와 함께 전통농업 지식을 알리고 실천하며, 신뢰를 바탕으로 땀의 결실을 공정하게 거래하는 물리적·비물리적 장(場)이 일어나야 한다. 소비자가 적극적으로 나설 때 행동하는 양심들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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