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K M촉이 장작된 마를렌 아델
김덕래
스트레스가 쌓일 때, 속이 뒤집힐 정도로 매운 음식을 먹거나, 화면 가득 격투신과 폭발 장면이 넘쳐나는 액션 영화를 봅니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인파가 넘치는 도심보다는, 인적이 드문 한적한 교외가 제격입니다.
만년필을 고를 때도 내가 원하는 바에 맞춰 선택해야 후회가 덜합니다. 수첩에 작은 글씨를 빼곡히 적기 위해선 EF촉이 합당한 것처럼, 종이와 직접적으로 닿는 펜촉 끝부분이 상대적으로 뭉툭한 M촉은 시원스럽게 술술 써져야 제대롭니다.
이 펜은 뭔가 일이 잘 안 풀려 답답할 때, 그저 입안에 맴도는 문장 몇 줄 슥슥 써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속이 개운해질 정도로 잉크 흐름이 좋아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과한 필압으로 인해 펜촉이 틀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잉크가 나오지 않으니 쓸 수가 없었던 거지요.
차체가 두 동강 나는 대형사고가 난 자동차는 폐차 말곤 방법이 없지만, 어지간히 외형이 손상되더라도 바탕이 되는 뼈대와 엔진만 멀쩡하면 다시 주행 가능한 상태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년필도 같습니다. 분해해 세척 후, 만년필의 엔진에 해당하는 펜촉을 손보면 살려낼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친구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식들 얼굴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위중한 상태로 수십 년 긴 세월 생명의 끈 한 오라기를 부여잡고 버텨온 어머니. 그 속이 속이었을 리가 없습니다. 상주인 큰아들이 손주를 볼 만큼 나이가 들었으니 누군가는 호상이라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가당치도 않습니다.
한 생명이 나는 일이 경이로운 사건이라면, 스러지는 일은 그 자체로 견줄 바 없이 온전한 슬픔입니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문득문득 우울해지고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그 친구의 말이, 남의 일처럼 들리지가 않았습니다. 마땅히 다가올 내 앞의 일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과정입니다.
고장난 만년필을 고쳐내는 것처럼, 생채기가 났을 친구의 마음도 흉지지 않게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재주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손안의 이 만년필이 내달릴 준비를 마친 것처럼, 큰일을 치른 친구의 낯에도 하루빨리 전과 같은 생기가 돌길, 너무 오래지 않게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랍니다.
▲마를렌 아델 M촉 수리 후 시필 테스트
김덕래
* 마를렌(Marlen)
- 단색의 심플한 디자인부터, 장식문양이 양각으로 돌출된 형태에 이르기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워지는 다양한 한정판 라인업을 갖춘 이탈리아의 필기구 제조사. 규모와 역사면에선 몬테그라파에서 시작해 오로라를 거쳐 비스콘티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메이저 3사에 견주기 힘드나, 어떤 브랜드보다 아름다운 펜을 만드는데 진심인 업체.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