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고등학교 도서관에서 학생들과 함께 했습니다
이승재
학생들이 행여 집중하지 못하면 어쩌나, 염려했던 건 저만의 우려였습니다. 학생들의 표정은 강연 내내 밝았고, 단단한 눈빛은 그저 생기로웠습니다. 질문하는 데도 스스럼이 없습니다.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듭니다.
"이 일이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행복하세요?"
"만년필을 정말 좋아한다면 꽤 행복한 일이 분명해요. 세계 곳곳에서 온 다양한 만년필을 늘 손에 쥐어볼 수 있으니까요. 또 그 과정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어요. 게다가 펜에 담긴 감동적인 사연들은 덤이에요. 사실 저는 만년필 자체보다 그 안에 배어 있는 이야기를 더 좋아해요. 만년필의 끝을 쥐고 있는 건 결국 사람이니까요."
"선생님 강연을 듣고 나니 저도 만년필이 새롭게 보여요. 직업으로서의 '만년필 수리공'은 어떤가요? 추천할 만한가요?"
"직업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해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산다는 뿌듯함을 느낄 때가 많아요. 그 감정이 고스란히 보람으로 이어져요. 하지만 누구에게 권하긴 조심스러워요. 효율이 썩 좋은 일은 아니거든요. 내가 들인 시간만큼 그에 합당한 성과가 바로바로 눈에 보이길 원한다면, 나와 맞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럼에도 마음이 끌린다면 연락주세요. 기꺼이 힘이 돼 줄게요. 그리고 또 누가 아나요? 여태까지보다 앞으로 더 주목받는 일이 될지도요?"
애초에 시작부터가 거짓말 같았습니다. 금속 펜촉이 꽂힌 딥펜을 연필이나 샤프 다루듯 일상으로 쓰고, 촉이 유리로 된 글라스펜에 여러 색상 잉크를 찍어 낙서를 하며, 만년필로 수학 문제를 푸는 학생들이 그득한 고등학교가 있다는 말은 여태 들어보지 못했으니까요.
만년필이 재미있는 점 중 하나는, 내 마음이 담기는 필기구라는 겁니다. 동급생 중 더러 얌체 짓을 해도 어쩐지 밉지 않은 친구가 있고, 뭘 잘못하는 게 없는데도 왠지 정이 덜 가는 친구가 있는 것처럼, 만년필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한번 마음에 들면 가끔 잉크가 잘 안 나와도 뭐 그럴 수 있지, 관대한 마음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첫 인연이 잘못 맺어진 펜은, 멀쩡히 잘 써져도 손이 안 가곤 합니다. 또 분명 어제까지 잉크가 잘 나왔는데, 갑자기 선이 뚝뚝 끊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변덕스러운 친구처럼 말이에요.
학교는 작은 규모의 사회입니다. 큰 사회로 나와 아무리 전문성을 띤 독자적 직업을 갖더라도, 사람들과의 소통은 필수입니다. 독립화된 공간에서 일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디 항상 순탄하기만 한가요? 부모 형제간에도 머쓱한 일이 생길 때가 적지 않습니다.
하물며 서로 모르고 살아온 타인과의 관계는 더욱 그렇습니다. 영 의견 조율이 요원한 경우라면 각자의 길을 가야겠지만, 시간을 써 일치를 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후자를 택하는 게 지혜롭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르고 끊어내다 보면, 종국에는 마음 둘 곳이 없어집니다.
세상이 변해도 살아남는 것
▲오디로 천연 잉크 만드는 재미를 아는 만년필 동아리 학생들
이승재
만년필은 분명 꽤 성가신 도구가 맞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반전이 있는 '쓸 것'이기도 합니다. 만년필 쓰는 행위는, 사회로 나가기 전 미리 관계 맺기를 선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물을 통해 나 자신과 대화하는 법을 먼저 익힌 사람은,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 비해 타인과의 소통이 한결 매끄러울 수밖에요.
인품과 인격을 가르치려 들면 반발심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선생(先生)은 글자 그대로 먼저 태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앞서 걷는 이의 걸음이 곧으면, 뒤따르는 이도 닮아가는 게 이치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한들, 교사와 학교의 역할이 가볍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만년필을 지급하고 동아리 활동을 장려하는 학교가 있다는 소식이 무척이나 반가웠던 까닭입니다.
▲3만 5천 권 이상의 장서가 꽂혀있는 지평선고등학교 도서관
이승재
챗GPT(ChatGPT)로 유명한 미국의 인공지능연구소 오픈AI사의 최고경영자 샘 알트만(Sam Altman)이 지난 9일 방한해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불과 3개월 전 최신 버전 'GPT-4'를 출시했는데, 올 연말엔 5.0 버전을 내놓을 예정이라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들은 2030년까지 현존하는 직업의 50%가 사라지고,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는 속도는 더욱더 빨라질 거라고 예측합니다. 셀 수없이 많은 직업이 사라지겠지만, 분명 새로운 직업도 생겨날 겁니다. 또 이미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업종 중, 살아남은 직업도 있다는 걸 알게 되겠지요. 제가 하는 이 일, '만년필 수리공'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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