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니즈 래커칠 기법으로 마감한 듀퐁 아틀리에 브라운 M촉
김덕래
듀퐁은 필기구만 생산해온 전문 업체가 아니니 외양만 그럴싸할 뿐, 만년필의 핵심인 필기감이 기대치에 미칠 리 없으며, 마감 역시 허술할 거라는 선입견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그건 마치 사람을 대할 때, 생김새나 옷차림만 보고 됨됨이를 서둘러 예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홉 번 구운 죽염을 최고로 치지만, 그보다 횟수가 적어도 대나무 통 속에 천일염을 넣어 구웠으면 그 자체로 죽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시간을 들여 아홉 번 반복하는 이유는, 그 과정을 거쳐야만 제대로 된 죽염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워진 소금을 잘게 부숴 다시 구워낼 때마다 내부의 불순물이 타버리며 점점 질이 좋아지는 죽염처럼, 만년필에 한 겹 한 겹 옻칠을 올릴수록 보다 단단해지고 색이 뚜렷해집니다.
수순을 따른다는 건, 최소한의 사회적 약속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도자기를 구울 땐, 정해진 과정을 순차적으로 밟아야만 합니다. 기물의 형상을 만들어 초벌구이를 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유약을 칠한 후 재벌구이 과정을 거쳐야만 매끈하게 광택이 나는 도자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만년필의 옻칠 작업 역시 예정된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다 지나 빈틈없이 만들어졌더라도, 사용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이 또 만년필입니다. 이렇게 펜촉 슬릿 사이 잉크 잔여물이 잔뜩 끼어있는 펜이라면 그 안쪽이 멀쩡할 리 없습니다.

▲슬릿 틈새에 엉겨 붙은 채 굳어진 잉크 잔여물
김덕래
펜촉 후면부와 피드가 오염되고, 내부 곳곳이 막혀있더라도 낙심하기엔 이릅니다. 말썽의 원인만 정확히 알아내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설령 영문을 몰라 여기저기 손대었더라도, 금속 도구만 사용하지 않았다면 일단은 안심입니다.
내가 애정하는 필기구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내 손으로 살려낼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이 있으려고요. 다른 사람의 필기구까진 돌보지 못하더라도, 나와 내 주변의 펜을 손볼 수 있으면 한결 마음이 편해집니다. 만년필 관리의 기본은 세척입니다. 가끔 내부를 씻어내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난관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가끔 세척하는 것만으로도, 훨씬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김덕래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나
세상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내가 어느 편에 서있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집니다. 펜촉을 종이에 대고 글씨를 쓸 때, 종이 입장에서 보면 잉크를 빨아들이는 것이고, 반대로 펜 입장에서 보면 글씨를 새기는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기준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년필을 사용할 때 필압을 빼고 쓴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호하다면, 머릿속에 이런 그림을 그려보세요. 멀리서 불어온 바람이 나뭇가지 끝에 살짝 머물렀다 이내 날아가는 것처럼, 펜촉이 종이 위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는 정도로도 충분한 것이 만년필입니다. 그렇게 써도 술술 끊김 없이 잘 나오는 상태라야 맞습니다. 티핑 끝이 다소 뭉툭한 M촉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바람이 나뭇가지 끝에 살짝 걸쳤다 날아가는 것처럼, 딱 그 정도로도 좋습니다
김덕래
평소 아무리 태세를 야무지게 하고 살아도, 갑자기 불쑥 날카로운 말송곳 들이미는 사람을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합니다. 한 사람의 뾰족한 말이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기도 합니다. 아무리 태연한 척해도, 세상에 피 흘리고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만 낯빛을 가린 것뿐입니다.
살다가 무례한 사람들과 마주했을 때, 호승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온몸에 상처만 입고 물러서기 십상이니 이것은 하책입니다. 남의 일인 양 못 본 체 지나치면 언제고 다시 달려들기야 하겠지만, 당장의 위기는 넘길 수 있으니 중책에 속합니다. 목소리를 낮게 내더라도 형형한 눈빛으로 소신 있게 행동해야 누구도 나를 함부로 흔들어대지 못합니다. 이런 대응이 상책에 해당합니다.
해가 뜨면 어제와 다름없이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게 우리의 오늘이지만, 낙담하지 마세요. 종이 위를 닿을 듯 말 듯 가볍게 훑고 지나가는 펜촉처럼, 그저 내 인생을 스쳐가는 무수한 타인 중 한 명일 뿐입니다.
그러니 휘둘린 것에 자책할 필요도, 상처 입은 것에 부끄러워할 까닭도 없습니다. 둘러보면 뾰족한 꼬챙이가 아닌, 빛나는 응원봉 치켜든 내 편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니 내 마음의 고삐 야무지게 바투 쥐고 조금만 더 나아가세요.
▲잘 조정된 만년필은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써집니다
김덕래
* 에스티듀퐁(S. T. Dupont)
- 프랑스 태생 토탈 패션 브랜드. 80여년 전, 특유의 개폐음으로 더 유명한 세계 최초의석유 연료 라이터를 발명해 큰 성공을 거둠. 생산하는 다른 아이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1970년대 초반부터 필기구를 만들었으나, 필기감에 대한 만년필 사용자들의 평판은 안정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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