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한 만년필로 시필하는 과정입니다
김덕래
사람은 모두 각자의 가치 기준을 갖고 삽니다. 누구보다 많은 돈을 벌길 원하는 사람도 있고, 비길 데 없이 영화로운 명예를 소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저는 보람과 소신을 귀히 여기며 삽니다. 그저 다름이 있을 뿐, 틀림은 없습니다.
내가 좀 더 잘 할 수 있는 일, 살아가는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을 찾아볼까? 싶다가도 이내 생각을 접게 됩니다. 바로 '직장이 전쟁터라면, 회사 밖은 지옥'이라는 말 때문입니다. 이 말이 틀렸다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한 가지에서 난 잎들도 생김새가 조금씩이나마 다 다릅니다. 외양이 비슷할지언정 각자가 서로 다른 건 너무나 당연합니다.
컵 안에 굵은 자갈만 있으면 빈틈이 많고, 고운 모래만 채워져 있으면 쉽게 허물어집니다. 큰 돌과 자잘한 흙 알갱이가 촘촘히 조화를 이뤄야 컵을 뒤집어도 형태가 유지됩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는 게 아닐까요? 잘 되는 상점이 있다고 그 옆에 무작정 비슷한 가게를 내면 오래가기 힘들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다양성이 보다 존중되고 일반화 되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작년 김제 지평선고등학교에서 만년필 강연을 했던 날의 기억이 종종 떠오릅니다. 그날 필기구 수리업에 대한 소견을 묻는 학생에게 답한 것처럼, 만년필 수리는 그다지 효율이 좋은 일은 아닙니다. 누구에게 권하기도 어렵고, 실제 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현재의 가치가 빼어난 주식을 '우량주'라 하고, 지금보다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높은 주식을 '유망주'라 합니다. '유망하다'는 말은, 당신의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만년필 수리는 일정 부분 유망한 면이 분명 있으며, 가치주에도 살짝 한 발을 담그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 있을 리 없습니다. 경제적 빈곤이 사람을 겉부터 병들게 한다면, 정서적 결핍은 몸 안쪽 깊은 곳부터 허물어뜨립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가 OECD 38개 회원국 중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비율이 가장 높다는 게 그 방증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통해 경제적 자유도 누리는 것이 '최선'이라면, 마지못한 일을 하며 곤궁하게 사는 것은 '최악'입니다. 수입이 다소 줄더라도 높은 자존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은 '차선'에 속합니다.
차선의 가치는 최선을 바라볼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수입엔 큰 문제가 없지만, 내가 하는 일에서 조금치의 보람도 느끼기 힘든 '차악'의 순간에 사람은 서글퍼집니다. 10년 20년 뒤의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짧던 길던 늘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은 이렇습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나 지향하는 목표는 뭔가요?"
모나미와 소규모 수제 만년필 제조사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만년필은 다 수입품입니다. 통상 만년필의 황금기를 1920년부터 1940년까지로 봅니다. 1888년 존 로우드(John Loud)에 의해 발명된 볼펜이 1938년 라슬로 조제프 비로(László József Bíró)의 손을 거쳐, 1950년대 상용화되어 세계 곳곳에서 인기를 얻은 이후에도 한동안 만년필은 번성했습니다.
만년필 시장은 활황이었지만, 당시 세계정세는 불안정했습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을 시작으로 1929년 세계 대공황을 거쳐, 1939년 2차 세계대전이라는 긴 혼돈의 터널을 지나야만 했으니까요. 이 시절 국내 사정은 더 암울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직후 곧바로 임시정부를 수립했지만 여전히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기 전까지 35년간의 일제 강점기를 겪어야 했고, 정국이 안정되는가 싶었지만 5년 뒤 한국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1953년 휴전 협정을 맺은 후에도 한참 동안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큰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세계 만년필계엔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가진 제조사가 무수할지언정, 우리나라에는 그에 견줄 만한 업체가 없는 게 어쩌면 당연합니다. 격동의 시대를 견디고 올해로 창립 64주년이 된 국민 브랜드 모나미의 뚝심을 칭찬합니다.
최근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코리아나'에 제 기사가 실렸습니다. 종이책은 영문본으로 만들어지지만, 홈페이지에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말이 참 반가웠습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코리아나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김덕래
"우리나라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년필 제조사는 없지만, 펜 수리에는 누구보다 진심인 만년필 수리공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요. 돌고 돌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마침내 찾았으니, 이 일을 통해 누군가에게 작은 감동이라도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만년필 수리가 대단한 일이라 생각하진 않아요. 그저 이런 일을 하는 사람도 나름의 지키고 싶은 바를 굽히지 않고 나아가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가능한 볼과 배의 살이 지금보다 빠지지 않도록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