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만년필 브랜드 플래티그넘(Platignum) 스튜디오를 둘러싼 다양한 색상의 만년필 군집
김덕래
난(蘭) 백여 촉(난을 세는 단위) 이상을 키우는 재미에 푹 빠진 지인의 말에 의하면, 난은 키우기 어렵다기보단 손이 많이 가는 편에 가깝다 합니다. 볕을 쬐기는 하되 강한 직사광선에 오래 노출되면 안 되고, 물이 영 없어서도 곤란하지만 넘치게 공급되어도 상하기 쉽다는 거지요. 적당량의 볕과 바람,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수분이 난을 키웁니다.
이렇게만 보면 세상 까다롭게만 보여도, 새 촉 돋아나는 소리 듣는 맛과 보는 재미가 몇 곱절 더하답니다. 키우는 수고 이상의 즐거움을 선사해 밀쳐낼 수가 없다는 그 말을 알 것도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금촉 만년필 한 자루를 들이는 건, 난 한 촉 키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셈입니다.
사람이 특별히 손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라는 야생화의 우리말이 들꽃입니다. 애기똥풀, 제비꽃, 민들레, 할미꽃을 포함해 무수한 봄꽃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어 가벼이 여기기 쉽지만, 흔하다는 것이 결코 아름다움이 덜하단 뜻은 아닙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스틸촉이 장착된 만년필 한 자루는, 들에 핀 꽃 한 송이에 비견될 만합니다. 잘 길이 든 스틸촉 만년필은 어지간한 금촉 만년필의 필기감을 넘어섭니다.
이 펜은 플래티그넘의 스튜디오 중에서, 캡과 배럴 전체가 활짝 핀 개나리를 떠올리게 하는 노란색입니다. 금촉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휘어지지만, 스틸촉은 상대적으로 잘 버텨줍니다.
완만하게 휘어진 것이 아니라 두께감 있는 펜촉이 이처럼 급하게 꺾였다는 건, 둘 중 하나를 의미합니다. 꽤 높은 곳에서 딱딱한 바닥에 수직낙하했거나, 아니면 누군가 펜촉을 종이에 댄 상태로 꾹 눌러 강제로 손상되게 했다는 뜻이지요. 어느 쪽이든 비극입니다.

▲펜촉이 심하게 뒤로 꺾인 플래티그넘 스튜디오 옐로우 F촉
김덕래
스틸촉은 쉽게 휘어지진 않지만, 한번 손상되면 펴는 과정에서 부러질 확률이 금촉에 비해 높습니다. 물성이 강한만큼 유연하지 못한 셈입니다. 또 지금 상태에선 수리 자체가 곤란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닙파츠를 분해해야 합니다. 내부 구석구석 끈적하게 엉겨붙은 잉크를 제거하는 것부터가 우선입니다.
말끔히 세척한 후 펜촉을 조금씩 펴나갑니다. 휘어진 반대 방향으로 한번에 센 힘을 주면 손상될 위험만 커집니다. 약한 힘으로 지긋이 반복해 눌러가며 펴는 게 핵심입니다. 남은 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과정을 버틸 인내심 뿐입니다.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펜촉이 조금씩 원형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김덕래
가끔 물어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말 맨손으로만 펜촉을 수리하는 게 가능한가요?"
펜촉 상태에 따라 때때로 연한 나뭇조각, 얇은 플라스틱 따위를 쓰기도 하지만, 대부분 맨손만 사용합니다. 도구를 사용하면 내가 원하는 것보다 순간적으로 과한 힘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휘어진 펜촉을 펴는 과정에서 적정치 이상의 힘이 전달되면, 되레 반대 방향으로 굽어버리는 거지요.
아차 싶어 다시 반대로 지나친 힘을 싣다, 그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되면 펜촉의 내구성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크랙이 생기거나 심한 경우 부러질 수도 있어요. 내 감각기관과 직결된 손만 쓰면 위험도가 낮아집니다. 민감한 펜촉을 만지는 일이니, 그보다 더 섬세한 사람의 손을 사용하는 거라 보면 맞습니다. 사람의 손은 생각보다 꽤 요긴한 도구입니다.
국도를 달리면 고속도로를 타는 것보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속도는 느려도, 길 좌우의 풍경을 감상하는 맛이 있습니다. 또 걸어 다니면 자동차를 타고 내달릴 때보다 더 세세한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꽃향기가 더 진하게 풍기고, 새소리가 한층 선명하게 들립니다. 느리게 가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는 것처럼, 천천히 접근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또 때때로 그게 가장 빠른 길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의 손은 거짓말 같은 마법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펜으로 봄을 써보세요

▲가장 좋은 수리도구, 바로 사람의 손입니다
김덕래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말이 있습니다. 펜촉을 살리고 나니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옵니다. 스튜디오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져 가벼우면서도 내구성이 좋은 편이지만, 고무로 감싸진 그립 섹션이 영 아쉽습니다. 손에 쥐었을 때 미끄러지지 않게끔 디자인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끈적해져 개운하지가 않아요.
이럴 때 간단한 자가 조치 요령은, 종이 재질 마스킹 테이프를 감아주는 것입니다. 컨버터로 잉크를 빨아올리는 과정에서 오염되면 떼어내고 새것으로 교체하면 그만이니, 펜을 좀 더 깔끔하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상단 좌측에서 시계방향으로 그립 섹션에 마스킹 테이프를 감는 과정입니다
김덕래
잘 손봐진 펜으로 은사님의 시 한 편을 필사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아직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참 무심한 제자입니다. 이 시는 1981년 출간된 또 '다른 별에서'라는 시집에 실린 '고백'입니다.
저보다도 젊은 40대 초반 쓴 글이어서인지 문장이 달달합니다. 마치 어릴 때 자주 따먹던 등굣길 양쪽에 핀 샐비어 꽃잎 속 꿀같습니다. 따뜻한 봄날, 잘 손봐진 펜을 손에 쥐고 꽃보다 더 단내가 나는 시 한 편 쓰는 호사를 누려봅니다.
아직 봄꽃향기 제대로 맡지 못했다면, 더 늦기 전에 집 근처라도 한 바퀴 둘러보길 권합니다. 그마저도 쉽지 않다면, 아무 펜이나 손에 쥐고 아무 종이에라도 좋아하는 시 한 편 따라 써보세요.
내 집 앞 무심히 지나쳐가는 행인 같은 봄을, 손님으로 맞아 집으로 초대하는 방법입니다. 봄날은 너무 짧아 그리워할 시간도 없다고 합니다. 둘도 없는 오늘을 살뜰히 즐기세요. 개나리의 꽃말은 희망, 그리고 기대입니다.
▲1981년 출간된 김혜순 시집 '또 다른 별에서' 중 '고백'을 필사했습니다
김덕래
* 플래티그넘(Platignum)
- 지금으로부터 104년전 영국에서 탄생한 필기구 브랜드. 비교적 금액대가 낮은 펜을 생산해 만년필 사용자 저변 확대에 힘을 보태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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