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05 06:15최종 업데이트 22.04.05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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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상품의 질이 기대치 이상으로 높거나, 두루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을 마주하게 되면 완벽(完璧)하다 말합니다. 완벽이란, 말 그대로 조금의 거슬림도 없이 완전한 형태의 구슬을 뜻하지요. 티끌만큼의 흠도 있어선 안 되니 그야말로 무결점 상태란 의미인데, 현실 세계에서 이 정도 수준에 오른 무언가를 접하기가 쉬울 리 없습니다.

똑같은 상황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됩니다. 약속시간보다 서둘러 나온 사람을 요즘 세상 보기 드문 의욕을 가졌다 좋게 보는 이도 있지만, 귀한 시간을 허투루 쓴다 폄하하는 이도 있습니다.


가치 기준을 어디에 두고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모양새가 달라지니, 모든 사람을 100% 만족시키기란 기본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봐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누군가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어차피 모두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없을 뿐더러,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상대방의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처칠에 대한 오마주

1905년 '프랭크 자비스(Frank Javis)'와 '하워드 가너(Howard Garner)'에 의해 첫 발을 뗀 '콘웨이 스튜어트(Conway Stewart)'는 오노토와 함께 20세기 영국 만년필의 전성기를 이끌던 양두마차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만년필 제조사들과 마찬가지로, 상승세를 탄 볼펜의 기세에 눌려 1970년대 중반 문을 닫게 됩니다.
 

영국의 만년필 브랜드 콘웨이 스튜어트(Conway Stewart) ⓒ 김덕래

 
어떤 업종도 경쟁 자체가 없는 분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년필계도 예외일 수가 없어 힘 겨루는 과정에서 오마스, 델타처럼 명맥이 끊긴 제조사도 무수합니다. 그래도 콘웨이 스튜어트는 뒷심을 발휘해 1998년, 카웨코나 에스터브룩처럼 기어이 부활에 성공하고야 맙니다. 하지만 마냥 순조로울리가요. 가까스로 일어서긴 했으나, 오랜 휴지기를 거치며 하체 근육이 빠진 상태였습니다. 주저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차분히 몸 만드는 과정에 있습니다.

일일이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영국의 위상을 드높인 인물은 차고 넘칩니다. 아르키메데스, 가우스와 함께 세계 3대 수학자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경쟁상대를 찾기 힘들만큼 인류 역사상 최고의 극작가로 남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세출의 영웅들을 제치고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로 회자된 인물이 바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정치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입니다. 

그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영국의 국가수장이었고,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탁월한 문장가였으며, 또 전시회를 여는 수준의 그림 실력을 가진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조차 모든 이들로부터 좋은 평을 듣진 못했으니, 무시로 나를 경원시하는 주변의 시선이 느껴지더라도 상처받을 이유가 있을까요.

콘웨이 스튜어트는 처칠에 대한 오마주로 다양한 컬러와 문양을 적용한 시리즈를 출시했습니다. 이 펜은 'WES(Writing Equipment Society)' 20주년을 기념해, 2000년 한정 생산한 200자루 중 하나입니다. 레진이나 금속 소재가 보편화된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에보나이트로 제작해, 만년필이 부흥하던 1900년대의 정취를 맛볼 수 있습니다.

플랫한 형태의 캡탑 디자인을 적용해 클래식한 느낌을 살리고, 캡과 배럴 전체에 빗살 형태의 기로쉐 패턴을 음각으로 새겨 넣는 것으로 무게감을 더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충전 메커니즘입니다. 실용성을 강조한 카트리지나 컨버터에 밀려, 더는 보기도 드문 레버 필러를 적용해 절로 예스럽습니다. 무엇보다 애연가로 잘 알려진 처칠의 입에 늘 물려 있던 시가를 쏙 빼닮은 만년필입니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만년필
 

처칠의 입에 늘 물려있던 시가를 연상케하는 만년필 한 자루 ⓒ 김덕래

 
요즘 같은 세상에 만년필을 쓴다는 건, 어쩌면 스스로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만년필은 우리 주변의 어떤 필기구보다 더 성가신 면이 분명 있습니다. 샤프는 더러 심이 부러지긴 하지만, 내장된 지우개에 박혀 있는 클리너핀을 사용해 조각난 심을 제거해주면 그뿐입니다. 샤프심만 넣으면 어린아이도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볼펜이나 수성펜은 말할 것도 없지요. 부러질 리도 없는 내장심이 다 소모되었을 때 새것으로 교체하면 그만입니다. 사용량에 따라 몇 개월, 아니 몇 년간 교체 없이 사용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필기구 중 유독 만년필만이 지속적인 관심을 주지 않으면 까탈을 부립니다. 마치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 것과 같은 수고로움을 필요로 합니다. 
 

4. 관리가 까다로운 만큼, 길이 들면 어떤 필기구보다 더 큰 만족감을 주는 게 만년필입니다 ⓒ 김덕래

 
먹이를 주듯 잉크를 채워줘야 하고, 산책시키듯 자주 써줘야 하며, 씻기듯 가끔 세척도 해줘야 하지요. 그런데 이런 점들이 되려 만년필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만년필은 태생적인 단점을 숨기는 게 아니라, 대놓고 드러내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한 발 더 다가선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어차피 완벽한 것이 없는 세상, 부족한 2%는 당신의 돌봄 욕구로 채우라는 것만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 일정 기간 타인으로부터 돌봄을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성장하며 자녀나 부모를 돌보고, 종국에는 누군가로부터 다시 돌봄을 받다 세상을 떠나는 게 이치니, 인간의 일생은 돌봄을 주고받는 과정의 연속이지 싶습니다.

받는 것이 기쁨이라면, 주는 것은 보람입니다. 마음을 건네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고, 전해지지 않으면 닿을 수 없으며, 닿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만년필 한 자루를 돌보는 일은 결국 나를 아끼는, 내 앞에 마주앉은 나를 토닥이는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6호 사이즈 펜촉은 전체적인 펜의 크기에 비하면 다소 작게 느껴지지만, 펠리칸 M800의 크기와 비슷한 정도니 빈약하진 않습니다. 만년필의 필기감을 결정짓는 요소는 여럿입니다. 통상 펜촉의 크기가 클수록 필기 시 낭창거려 탄력감이 크게 느껴집니다. 처칠의 펜촉은 비교적 절제된 크기라, 금촉임에도 적당히 버텨주는 맛이 있습니다. 외양은 마냥 부드러운 듯해도, 내재된 심지는 굳건한 셈입니다.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던 처칠처럼
 

전체적인 밸런스가 좋은 처칠의 6호 사이즈 펜촉 ⓒ 김덕래

 
처칠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무수한 명언을 남겼으나, 적지 않은 말실수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애주가 이상으로 술을 가까이해 핀잔을 들어야 했고, 우울증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만 했으며, 냉소적인 독설로 인해 정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추억되는 이유는, 화려한 수사로 포장된 공언만 남발한 게 아니라, 그 자신이 행동하는 실천가였기 때문입니다.

만년필에 아무리 값비싼 잉크를 채운들, 내부 기관을 타고 흘러 펜촉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실제 종이에 쓸 수 없는 잉크라면 허상일 뿐입니다. 사람이 입 밖으로 내뱉는 말도 이와 같습니다. 제아무리 근사해 보여도 진심이 담겨있지 않다면 누구에게도 전달될 리 없고, 종국에 실행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허공에서 흩어지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간혹 질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가 구매한 펜과 같은 브랜드의 잉크만 써야 한다는 말이 있던데, 그게 참말이냐는 거지요. 정답이라기엔 모호한 구석이 있습니다만, 영 없는 말도 아닙니다. 아무 잉크나 써도 되는 줄 알고, 프린터용 잉크를 만년필에 넣어 사용하다 문제가 생겼다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까요.

세일러의 극흑 같은 문서보존용 잉크나, 제이허빈 블루오션처럼 펄이 들어간 잉크는, 일반적인 만년필용 잉크에 비해 세척에 좀더 신경 써야 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내 만년필과 다른 브랜드의 잉크를 넣어 쓴다고 바로 펜촉이 부식되거나, 피드가 녹아 생명이 다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너무 자주 사용해 이상이 생기는 경우보다, 지나치게 아끼느라 늘 보관만 하는 바람에 문제가 발생하는 케이스가 오히려 더 많습니다. 
 

콘웨이 스튜어트 처칠 WES 20주년 F촉 시필테스트 ⓒ 김덕래

 
처칠이 세상을 떠난 지 반백 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들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기억 속 그는 여전히 잊힌 사람이 아닙니다. 뮌헨 협정이 폐기된 이후 혼란한 상황에서 수상 자리에 오른 처칠은, 기어코 덩케르크 철수작전을 성공시켜 34만 명에 가까운 병사를 사지에서 건져냈고, 마침내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연결해 전쟁의 화마를 잠재웠습니다.

개나리 꽃망울이 툭툭 터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봄을 부르는 마중비도 살포시 내려앉았습니다. 바야흐로 4월입니다. 하지만 이 봄이 조금 더디 와도 좋으니, 유라시아 정국이 안정되었단 낭보가 하루빨리 들려오면 좋겠습니다. 

* 콘웨이 스튜어트(Conway Stewart)
- 1905년 문을 연 이래, 한동안 오노토와 함께 영국 만년필계를 이끌었던 만년필 제조사. 그 후 문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으나,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살아남은 근성 있는 필기구 브랜드. 다양한 라인업 중에서도 처칠시리즈는 콘웨이 스튜어트의 대표작이며, 국내엔 영국출신 영화감독 매튜 본(Matthew Vaughn)의 작품 <킹스맨>(Kingsman)을 통해 잘 알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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