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바다의 잔물결을 연상케하는 시필과정
김덕래
벌써 이십 년이 지났지만, 해마다 팔월이 가까워지면 대학을 갓 졸업했던 그 시절 여름이 떠오릅니다. 달랑 선풍기 한 대로 버티기엔 한낮의 옥탑방 열기가 너무 뜨거워, 예정에 없던 부산 자전거 여행을 떠났습니다. 대전에서 하루, 또 대구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 부산에 도착하는 일정은 무모했습니다.
다만 옥탑방을 벗어났을 뿐, 도로 위는 더 불볕이었습니다. 그늘 한 조각 없는 아스팔트 위에선 끊임없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습니다. 어찌어찌 천안을 지나 조치원에 다다르니, 길 양쪽으로 복숭아 노점이 즐비합니다. 문이랄 것도 없는 천막을 들추고 아무 가게나 들어갔습니다. 이모뻘 되는 아주머니가 복숭아를 다듬고 있었습니다.
한두 개도 파시냐 물었더니, 대뜸 큼지막한 복숭아 하나를 뽀드득 소리가 나게 물에 씻어 건넵니다. 잘 익어 달디단 복숭아를 허겁지겁 먹고, 하나만 더 파시라 했지요. 아무 말 없이 검정 비닐봉지에 대여섯 개가 넘는 복숭아를 담아, 자전거 핸들에 걸어줍니다.
"딱 보니 아직 학생티도 못 벗었구먼. 팔긴 뭘 팔아. 그냥 가져가요. 이 날씨에 부산까지 간다고? 쉬엄쉬엄 가요. 급히 가다간 이 더위에 쓰러져."
봉지에 담긴 복숭아가 너무 많아 한쪽으로 핸들이 기우니, 같은 봉지에 비슷한 양을 또 담아 반대편 핸들에도 걸어줍니다. 경비가 부족하던 참이라 염치없이 그 호의를 날름 받았더랬습니다. 체력이 바닥나 결국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온 후,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이었습니다.
그새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또 아이도 생겼습니다. 예전 끝맺지 못했던 부산행을 마무리 짓고 싶어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혹시나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만류합니다. 나라도 그럴 것 같아 며칠 창밖만 바라봤더니, 그렇게 소원이면 더 나이 들기 전에 다녀오랍니다.
아내 마음이 바뀔세라 서둘러 길채비를 하고 출발했습니다. 그렇게 천안을 지나 조치원이 가까워지기 시작하니, 그 가게 생각에 머릿속이 분주합니다. 벌써 오륙년 세월이 지났는데, 아직 그 자리에 있으려나? 혹시 주인이 바뀐 건 아닐까? 내가 못 알아보면 어쩌지?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바빴습니다.
단숨에 내달려 예전 그 길가에 다다르니,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나 싶었습니다. 어쩌면 시간이 이렇게 조금도 흐르지 않았을까요? 멀리서 봐도 예전 그 자리, 그날의 노점 모습 그대롭니다. 천막 사이로 보이는 아주머니의 얼굴도 그때와 똑같습니다. 근처 마트에 가 제일 큼지막한 선물세트를 샀습니다. 그때보다 좀 더 나아진 형편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몇 년 전 단 한 번, 잠시 만났던 인연일 뿐인데 어찌나 각별하게 느껴지던지요.
허리 굽혀 인사하고 몇 마디 건네자 나를 기억해냈는지, 그날과 똑같은 표정으로 푸근하게 웃습니다. 나는 마치 오랜 인연 대하듯 그간의 근황을 전했고, 그는 나보다 더 환한 미소로 답했습니다. 또 봉지에 복숭아를 담아주길래 이번엔 꼭 돈을 받으시라 건넸더니, 아이 과잣값 하라며 다시 쥐여줍니다.
그렇게 복숭아를 먹어가며 예정대로 부산행을 마치고 올라온 지 벌써 십수 년이 지났습니다. 이젠 그 장소에 다시 가도 알아보기 힘들겠다 싶으니, 왜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을까 후회가 됩니다. 그날 내가 받은 배려와 호의를 오래 기억하는 방법은, 나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친절을 나눔 하는 것이겠지요. 내 주변엔 좋은 사람이 없다, 낙담하지 마세요.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됩니다.
어찌나 잘 익었던지, 이 만년필보다 더 금빛이던 그날의 복숭아는 내 인생 최고의 열매였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여름휴가를 못 가지만, 그래도 아쉽지 않습니다. 내년이 또 있으니까요. 올 휴가는 집에서 에어컨 바람 쐬고 복숭아 먹으며 그렇게 보내렵니다. 꼭 멀리 떠나야만 피서는 아닐 테니까요.
▲잘 손봐진 던힐 빈티지 금장 만년필 F촉
김덕래
* 던힐(Dunhill)
- 1893년 '알프레드 던힐(Alfred Dunhill)'에 의해 탄생한 영국의 토탈 패션 브랜드. 선굵은 남성용품을 생산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으며, 의류뿐 아니라 가죽, 패션 액세서리, 필기구 등 다양한 라인업을 갖고 있음. 국내엔 듀퐁, 지포와 함께 명품 라이터 생산업체로 잘 알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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