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수리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김덕래
내연기관 자동차 한 대에 들어가는 부품의 개수가 대략 2~3만여 개 정도라 합니다. 상대적으로 현저히 적은 부품이 쓰이는 전기 자동차더라도 이 절반가량에 해당하는 부속이 필요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어마어마하게 정밀하고 복잡한 도구인데, 대부분의 성인은 어렵지 않게 몰고 다닙니다.
이에 비하면 만년필 한 자루에 쓰이는 부속의 수는 말하기 민망할 만큼 적습니다. 펜수리에 자신감을 가져도 좋은 이유입니다.
운전을 조심히 하고 정기적으로 점검을 받는데도 자동차의 성능이 널을 뛰는 경우는 드뭅니다. 사람도 건강검진을 빼먹지 않고 제때 하면 병이 커지기 전에 미리 잡아낼 수 있지요. 만년필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기어를 어떻게 넣어야 차가 앞으로 혹은 뒤로 가는지, 어떤 페달을 밟아야 차가 움직이거나 서는지 여부는 나와 자동차 사이의 최소한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지키면 차는 내 뜻대로 움직입니다. 자동차는 정기적으로 소모품을 교환하는 정도의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하지만, 만년필은 나름의 관리법만 알면 어떤 부속도 교체할 일이 없습니다. 연료를 넣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자동차는 없고, 음식을 먹지 않고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저 잉크만 채워주면 평생토록 내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필기구가 만년필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손에 쥐고 펜촉을 종이에 댄 상태로 쓰는 필기구다 보니, 사용자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컨디션이 크게 달라집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지만 않으면 펜에 심각한 탈이 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자잘한 문제는 언제든 생길 수 있습니다.
운전자들 중에도 비가 오는 날 앞유리에 낀 습기를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을 모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년필이 망가져 사용할 수 없는 정도의 상태에 한참 못 미치는, 이를테면 펜이 경미한 수준의 투정을 부리는 경우더라도 어딜 어떻게 손대야 할지 전혀 감이 안 오면 인상만 찡그리게 됩니다.
"나는 만년필을 좋아해 벌써 수십 년째 사용하고 있어요. 하지만 만년필 수리에 대해선 아예 몰라요. 그러니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하겠어요? 또 당신의 글은 내 정서와 잘 맞아 편하게 읽혀 좋아요. 글 쓰는 만년필 수리공에게 의미 있는 선물이 될 것 같아 호號를 지어 보내요. 인필仁筆, 만년필 고치는 손으로 쓰는 그 글의 온기가, 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가닿기를 바라요."
벌써 몇해 전 받은 편지와 거기 딸려있던 선물(족자)인데, 한 평 작업실엔 도저히 걸 곳이 없어 간직만 해왔습니다. 이번에 작업실을 내며 볕 잘 드는 베란다 한쪽 벽면에 걸었습니다. 작업실이 동향이라 아침 일찍부터 오전 내내 베란다가 눈부십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구칩니다.
▲베란다 한쪽엔 호號 인필仁筆이 담긴 족자가 있습니다.
김덕래
만년필을 쓰다 실수로 떨어뜨리면 높은 확률로 펜촉에 문제가 생깁니니다만, 실제 펜보다 떨군 사람의 마음에 더 깊은 상처가 나기도 합니다. 소중한 이가 건네준 펜일수록 더더욱 그렇습니다.
만년필 수리는 망가져 쓸모가 없어진 펜의 쓰임새를 다시 끌어올리는 여정입니다만, 쓰는 이의 다친 마음이 흉지지 않게 보듬는 일이기도 합니다. 만년필을 쥐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사람이니까요. 그런 견지에서 보면 펜수리 강좌는 마음수련과도 맥이 닿아있습니다.
자녀나 지인과 함께 오는 분들을 고려해, 복층인 2층은 휴식공간으로 꾸몄습니다. 미니 서재를 겸해 다용도로 씁니다. 일하다 잠시 쉴 때 제가 머무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2층은 방문객이 사용할 미니 서재 겸 휴식공간입니다.
김덕래
배우에게 연기할 무대가 주어진 것처럼, 마음껏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 기쁩니다.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될수록 아날로그 역시 더 주목받게 될 겁니다. 일단 사람의 몸 자체부터가 디지털이 아니니까요. 아날로그 필기구의 정점에 만년필이 있습니다. 글 쓰는 만년필 수리공의 작업실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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