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금융은 혁신이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금융이 이룩한 성과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산업혁명 이전에 금융혁명이 있었다는 사실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 금융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핵심동력이었다. 금융은 사회가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매개했고 궁극적으로 시민의 생활, 나아가 사회 전체의 복리를 증진해나갔다.

19세기 J. P. 모건이 신탁과 증권을 통해 유럽의 단기자금을 미국으로 끌어들여 철도 등 기간시설을 마련하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의 미국이 존재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현대 금융은 과거엔 불가능하다 여겨진 일들을 가능케 했다. 가히 기적적인 변화였다. 순식간에 저곳의 재화가 이곳으로 옮겨왔고 미래의 소득이 오늘의 구매력으로 뒤바뀌었다. 평소 같으면 창고에 쌓여있었을 잉여물이 산업의 전선으로 달려가 새로운 기술발달을 이끌었다. 자산은 스스로 증식했고 가만히 머물러 있는 재화는 낭비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세계의 화폐는 은에서 금으로, 금에서 달러로 빠르게 변화했다. 급기야는 세계 대부분 국가가 하나의 경제체제에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넓은 의미에서 전 세계가 하나의 금융권을 이뤘고 금융이란 제도에 의해 가장 효율적인 모습을 띠어갔다.

하지만 금융의 발달이 장밋빛 미래만 가져온 건 아니었다. 건전한 투자 사이엔 그와 좀처럼 구분되지 않는 투기사건도 이어졌다. 흔히 세계 3대 버블로 불리는 네덜란드 튤립 투기사건과 프랑스 미시시피회사사건, 영국의 남해회사사건은 금융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름들이다. 이들 사건은 탐욕에 휩싸인 투기꾼뿐 아니라 선량한 시민들, 나아가 금융시스템 자체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이와 같은 사건으로 인해 현대 금융은 자본의 제약과 함께 탐욕의 족쇄도 풀었다는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지난 2007년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는 앞선 3대 투기사건에 비할 만한 충격적 사건이었다. 도덕적 해이와 당대 금융시스템의 한계가 맞물려 빚어낸 버블사태란 점에서 이들 사건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으며 규모의 면에선 이들을 한참 능가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한 편의 영화에 담아내다

현대 금융의 위험 드라마를 담당한 마크 바움(스티브 카렐 분)과 극 안과 밖을 넘나들며 사회자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담당한 자레드 베넷(라이언 고슬링 분). 영화가 강조하는 자레드 베넷의 격렬한 캐릭터는 현대 금융이 과거와 같이 안정된 분야가 아닌 격렬하고 투쟁적인 부문임을 상징한다.

▲ 현대 금융의 위험 드라마를 담당한 마크 바움(스티브 카렐 분)과 극 안과 밖을 넘나들며 사회자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담당한 자레드 베넷(라이언 고슬링 분). 영화가 강조하는 자레드 베넷의 격렬한 캐릭터는 현대 금융이 과거와 같이 안정된 분야가 아닌 격렬하고 투쟁적인 부문임을 상징한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보다 건전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미국 주택담보부대출 파생상품들이 투자은행과 당국, 신용평가사 등 금융계 전체의 도덕적 해이와 맞물려 국제적 경제위기를 초래했다. 이 희대의 버블사건으로 전 세계 수위를 다투는 투자은행들이 줄지어 도산위기에 처하고 금융계의 종말, 나아가 세계 경제의 파국으로 치닫던 그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바로 이 영화의 소재다.

모두가 알지만, 충분히 알지는 못한 이 이야기를 2시간 내외의 극 영화 한 편에 담아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감독 아담 맥케이가 받아든 과제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영화제작자라면 탐낼 수밖에 없을 흥미진진한 이야기지만, 사태가 종결된 지 8년여가 흐르기까지 이렇다 할 작품이 나오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현대 금융은 대중들에게 너무도 멀리 있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매일 같이 뉴스에 오르내리던 당시에도 문제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더욱이 사태와 연관된 사회문제가 한둘이 아니기에 자칫 잘못하면 겉만 핥는 실수를 범할 위험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구구절절 다루자면 두 시간짜리 영화로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이클 루이스의 검증된 원작과 브래드 피트의 든든한 지원이 없었다면 접근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은 기대보다 더욱 훌륭했다. 현대 금융에 초보적인 이해만 한 관객일지라도 영화를 즐기는 데 큰 무리가 없을 만큼 친절했고, 물리적인 제약에 맞서는 치열함이 돋보였다. 2시간짜리 극 영화라는 테두리 안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전반을 담기 위해 감독 이하 제작진이 얼마나 고심했을지가 훤히 보이는 장면들로 영화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영화니까 들을 수 있는 모두의 진심

크리스찬 베일의 명연기 사실상의 주인공 마이클 버리(크리스찬 베일 분). 크리스찬 베일은 사무실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공간상의 제약을 극복하고 엄청난 존재감으로 영화 전체를 장악했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로 부족하지 않다.

▲ 크리스찬 베일의 명연기 사실상의 주인공 마이클 버리(크리스찬 베일 분). 크리스찬 베일은 사무실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공간상의 제약을 극복하고 엄청난 존재감으로 영화 전체를 장악했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로 부족하지 않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주지하다시피 <빅쇼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다룬 극영화다. 영화는 원작의 구성을 따라 크게 네 개 집단을 주인공 삼아 옴니버스식으로 돌아가며 비춘다. 이들 모두가 투자가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 공매도(실제로 갖고 있지 않은 물건을 빌려 판 후 나중에 물건으로 갚는 방식으로 투자대상의 가격이 내려가면 이익을 보는 투자방식) 투자를 한 실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시장 전체의 비합리성을 일깨우는 것이 영화의 선택이다.

처음엔 정부 당국이나 언론 등 다른 행위자를 주요인물로 내세우지 않고, 투자자들로만 핵심 캐릭터를 꾸린 점이 다소 위험한 선택으로 보였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니 덕분에 투자은행 등과 관련해 이야기를 깊이 있게 가져갈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택과 집중이 주효했다는 뜻이다.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연출에 더해 극의 전개와 상관없이 유명인이 등장해 관객이 어려워할 수 있는 개념을 설명하는 장면을 삽입하는 등 적극적인 연출적 시도도 빛났다.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실제로는 들을 수 없는 진심을 모든 인물에게서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분량의 제약이 심한 영화이기에 장면이나 캐릭터, 하다못해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도 허투루 들어가지 않았다. 관객이 이로부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둘러싼 총체적인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접하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그 장면에 등장하는 이유가 있고 이들이 내뱉는 대사 역시 매우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배치됐다.

한국으로 따지면 금융감독원에 해당하는 기관에서 근무하는 인물은 등장하자마자 은행권 인사들과 친분을 드러낸다. 또한, 그녀가 은행에 이력서를 돌리고 있다는 사실이 또 다른 인물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신용평가기관 S&P에서 근무하는 인사는 "우리가 좋은 등급을 주지 않으면 고객이 경쟁사인 무디스로 간다"는 발언을 대놓고 하며 합성 CDO를 설계했다는 은행가는 마크 바움과의 몇 분 되지 않는 대면에서 자신의 저열한 의도를 낱낱이 까발린다. 여느 영화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같은 장면들은 이 영화가 극의 완성보다는 문제의 설명에 더욱 매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와중에도 영화가 드라마를 놓치지 않는 데는 교묘히 설정된 캐릭터와 이를 훌륭히 소화해낸 배우들의 공이 크다고 하겠다.

영화의 캐릭터는 처음부터 그 역할이 철저히 설계되어 있다. 크리스천 베일에게 더없이 훌륭한 도전이 된 마이클 버리는 직접 영화의 주제를 구현하는 인물이다. 가치판단 없이 오로지 이익을 위해 시장 전체에 대한 공매도에 나서는 그의 캐릭터는 문제의 본질과 시장의 왜곡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크리스천 베일은 놀라운 연기력으로 적어도 올 한 해 최고의 장면 가운데 하나로 꼽힐 법한 면접 신을 탄생시켰는데, 이 장면을 본 사람이라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로 그가 노미네이트된 사실에 이견을 낼 수 없을 것이다.

스티브 카렐이 멋지게 연기해낸 마크 바움은 구조상 곳곳에서 끊어질 수밖에 없는 영화에 일관된 드라마를 부여할 수 있는 강한 캐릭터다. 색깔이 강한 그의 캐릭터가 미국 금융의 총체적인 부실을 목격하고 혼란을 겪는 모습은 갈 길 바쁜 영화가 짜낼 수 있는 최대한의 드라마라 할 수 있었다. 스티브 카렐이 있어 이토록 복잡한 영화가 자연스러운 드라마까지 갖출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 사회자적 역할을 넘나들며 영화를 이끌어간 라이언 고슬링과 특유의 존재감으로 한 기둥을 담당한 브래드 피트가 모여 한 편의 멋진 작품이 빚어졌다. 능란한 배우들이 펼친 훌륭한 연기가 아니었다면 영화가 지금과 같은 수준을 확보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손을 들어 폭주하는 불합리에 틀렸다고 외쳐라

보이는 손 마크 바움을 연기한 스티브 카렐. 폭주하는 금융시장에 과감한 질문을 던진 그의 패기가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 보이는 손 마크 바움을 연기한 스티브 카렐. 폭주하는 금융시장에 과감한 질문을 던진 그의 패기가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엔 등장하지 않지만 <빅쇼트>는 글래스-스티걸법에 대한 이야기다. 이 법률은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엄격히 구분해 일반 상업은행이 고객의 자산으로 리스크가 큰 투자행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제한다. 이 법률은 1999년 상업은행의 주식투자를 허용하는 그램 리치 블라일리법의 제정으로 무력화된 전설적 법안이다.

영화는 글래스-스티걸법의 장벽이 무너진 지 7년 만에 굴지의 상업은행들이 무분별하게 투기에 나서 자신의 존망을 위협한 사건을 그려낸다. 정부의 개입이 없어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이 합리적으로 기능한다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오랜 믿음이 신화에 불과함을 일깨운다.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득세하고 있는 자유지상주의자의 주장은 각지에서 공동체주의자들의 이익과 팽팽히 맞서고 있다. 금융과 경제의 영역 역시 두 이념이 맞서는 전선이다. 규제 완화로 대변되는 자유지상주의자의 요구가 금융계에 받아들여질 때 어떤 폐해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 영화를 감상하는 건 그래서 더욱 의미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끝났으나 금융계에서 벌어지는 두 이념의 대립은, 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현실 정치는 현재진행형이므로.

<빅쇼트>의 포스터 영화 <빅쇼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완벽한 영화이다.

▲ <빅쇼트>의 포스터 영화 <빅쇼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완벽한 영화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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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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