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본영화 한 편을 떠올린다. 터널을 뚫는 공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진척이 되지 않고 있다. 인부들이 갑자기 병에 걸리고 사고를 당하는 일이 거듭되며 공사장에 귀신이 떠돈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급기야 어느 날엔 야간 당직자가 산중에서 내려온 곰에게 몸을 찢긴 채 죽은 시체로 발견돼 난리가 난다.
 
아무리 대비해도 사건이 거듭되자 업체는 지역 사찰의 도력 높은 스님과 영험한 무녀에게 문제를 해결해 달라 의뢰한다. 그로부터 진실이 차츰 모습을 드러내니 백여 년 전 터널을 공사하던 자리에 조선인 촌락이 자리했고 누군가가 몰래 관 하나를 묻어놓았다는 것이다. 스님과 무녀가 그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관을 열고 정령 하나가 튀어나와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한다.
 
붉은 옷차림에 걸을 때마다 방울 소리를 내는 정령은 스님과 무녀 앞에서 도가의 술법이며 유가의 학문에 정통한 듯한 모습까지 보인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자신은 임진년 전쟁에서 활약하고 평생 문무를 깊이 수양한 인물이며, 죽은 뒤 수백 년이 흐른 뒤에 누군가 관을 파서 일본의 이 땅에 주술을 걸어 묻어두었다고 전한다.
 
자, 그렇다면 한국인 가운데 이를 이름 없는 가상의 귀신쯤으로 여기고 넘어갈 이가 몇이나 될까. 또 이를 영화가 얼마든지 허용하는 표현의 자유로 별다른 문제가 없는 설정이라 여길 이가 과연 있을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파묘 포스터

▲ 파묘 포스터 ⓒ 쇼박스

 
<파묘> 속 정령, 떠오르는 일본사 속 인물
 
오컬트로는 전무후무한 천만영화 <파묘>를 보고서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단순하고 애국심을 자극하는 설정에 기대고 있기는 하지만 꽤나 잘 쌓아올린 이야기 구조를 가진 이 영화 가운데서 무례하고 무책임한 모습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일본의 귀신은 그저 창작된 가상의 인물만이 아니다. 역사를, 또 일본에 대한 지식을 폭넓게 가진 이라면 반드시 하나의 이름을 떠올릴 밖에 없을 특정된 귀신이다.
 
시마 사콘(또는 시마 기요오키)은 일본 전국시대의 이름난 무장이다. 몇몇 주인을 섬겼으나 유력한 이는 없었고 마흔이 넘도록 낭인으로 떠돌았다. 그럼에도 특출난 무예와 병법으로 그 명성이 전국에 자자했다. 그런 그가 마침내 주인을 만나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이자 그 사후 패권을 놓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명운을 건 한 판 싸움을 벌인 이시다 미츠나리가 되겠다.
 
한국에선 행주대첩 패장으로 알려져 있는 미츠나리의 수하에서 주인보다도 걸출한 부하라는 명성을 얻을 만큼 시마 사콘은 대단한 장수였다. 미츠나리가 삼고초려를 했다는 이야기부터 제 영지의 절반을 잘라 주었다는 이야기, 히데요시가 미츠나리를 불러다 어떻게 그토록 대단한 이를 영입했는지 따로 물었다는 일화까지 있을 정도다. 오죽하면 세간에서 미츠나리에게 과분한 것이 두 가지 있으니 그중 하나가 시마 사콘이라고 하였겠는가.
 
그런 그가 역사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게 세키가하라 전투다. 이시다 미츠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서로를 지지하는 다이묘를 끌어모아 치른 일대 전투로, 서군의 전선이 무너지는 가운데서도 시마 사콘은 '전진, 전진'을 외치며 엄청난 용맹을 과시했다 알려져 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수 가운데 가히 독보적인 인물이며, 또 그 사체가 끝끝내 발견되지 않아 수많은 설화의 주인공으로 남기도 했다.
 
파묘 스틸컷

▲ 파묘 스틸컷 ⓒ 쇼박스

 
존중 없음이 부끄러워졌다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파묘> 속 주인공들을 가로막는 귀신, 즉 정령을 시마 사콘으로 볼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해석이 맞다고 본다면 이는 결코 타국의 역사며 문화, 영웅적 인물에 대한 존중이 없는 무참한 설정이며 묘사라고 이해할 수 있는 탓이다. 무엇보다 민족적 정서를 자극하여 성공을 거머쥔 <파묘>가 도리어 민족적 자존감의 부재를 노출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되기도 하는 때문이다.
 
이야기는 미국으로 이민을 간 큰 부자 집안에서 영험하다 소문난 무당 화림(김고은 분)과 그 조수 봉길(이도현 분)을 불러다 일을 맡기며 시작된다. 이 집안의 장자들은 하나같이 기이한 병을 앓고 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헛것까지 보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으로 괴로워하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까지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 되자 마침내 한국에서 무당을 부른 것인데, 화림은 증세를 보자마자 이것이 조상의 묫자리가 화근인 '묫바람'이란 사실을 알아챈다.
 
묘를 옮겨야 일이 해결된다는 화림의 진단에 아이의 아버지(김재철 분)는 지관 상덕(최민식 분)과 장의사 영근(유해진 분)까지 고용해서 개장을 서두른다. 다만 묘는 파되 절대로 관을 열지 않고 곧장 화장을 하자는 조건을 내건다. 큰 대가를 약속받았으니 반대할 이유는 없다. 화림과 상덕, 영근은 의뢰자들과 함께 묫자리를 찾는다. 그로부터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연달아 펼쳐진다.
 
이후는 다음과 같다. 묫자리는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흉지다. 결코 묘를 두어선 안 되는 상극의 땅이다. 이상한 점은 이뿐이 아니다. 차츰 드러난 사실은 묻힌 이가 당대의 이름난 친일파로 총독부의 고관대작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의 묫자리를 풍수에 정통하다는 스님이 소개했다고 한다.

악귀가 되어 관에서 빠져나온 원혼과 피 말리는 싸움을 치른 뒤 상덕은 저들이 파낸 관 아래에 또 다른 관이 묻혀 있음을 알게 된다. 첩장이다. 한 눈에도 인간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관이, 그것도 세로로 묻혀 있다. 그날 밤, 관을 뚫고 나온 정령은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한다.
 
파묘 스틸컷

▲ 파묘 스틸컷 ⓒ 쇼박스

 
단서들이 지목하는 인물... 왜 그였을까?
 
여기까지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전국시대 무장의 갑주차림을 한 정령은 화림을 공격한다. 이를 막으려던 봉길은 큰 부상을 입고 쓰러진다. 화림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는데, 겨우 피한 곳이 절 마당에 있는 승탑들 사이였던 덕이다. 정령이 승탑을 알아보고는 걸음을 멈추고 불교 경전을 외워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다시 정령은 화림과 마주한다. 화림은 정령이 좋아한다고 밝힌 은어를 땅바닥에 늘어놓는 방식으로 제가 원하는 장소까지 유인한다. 은어는 그저 물고기가 아니다. 전국시대 기후성의 특산물로 유력 다이묘에게 바쳐지던 귀한 생선이었다. 현재도 기후시에서 많이 잡히는 이 은어를 특별히 좋아하던 이들이 있었다. 기후에서 전국을 도모한 영주 오다 노부나가, 또 그 뒤를 이었다 해도 좋을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시 그의 심복인 이시다 미츠나리가 그들이다. 미츠나리 휘하 제일가는 장수였던 시마 사콘과 단 하나의 먹거리를 엮는다면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은어일 테다.
 
영화는 정령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죽은 이로, 사라진 목에 칼을 박아 넣어 육신 자체를 하나의 혈침으로 만들어 문제가 된 묫자리에 묻었다고 소개한다. 만 명을 베었을 만큼 걸출했단 무장이며, 다이묘로 불린다는 단서를 더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후보는 추려질 밖에 없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사망한 장수, 심지어 그 사체가 발견되지 않은 인물, 그런 이는 정말이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없었다면 좋으련만 이러한 단서는 한 인물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시마 사콘이다.
 
그 죽음이 명확하지 않아서인지 그에겐 많은 설화가 있다. 불교에도 깊은 관심이 있어 절의 승려로 은둔해 생을 마쳤다는 등의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금강경을 줄줄 외고 승탑을 보고 멈추는 등의 모습 또한 그와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여러모로 영화 속 정령은 실제 역사 속 인물과 상당부분 맞아떨어진다. 조선의 정기를 끊는 쇠말뚝, 그 말뚝의 역할을 대신하는 죽은 육신을 보며 실재했던 한 인물을 떠올리게 된다는 건 얼마나 불쾌하고 부적절한 일인가.

백보 양보하여 전국시대 무장 가운데 왜란에 책임이 있는 여러 인물을 놓아두고 왜 하필 시마 사콘인가. 어째서 그를 지목하게 하는 설정들이 그토록 중첩돼 있는 것인가. 전국시대 가운데서도 걸출한 무력을 지닌 캐릭터가 필요했다는 것 말고는 필연적인 등장의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데 말이다.
 
파묘 스틸컷

▲ 파묘 스틸컷 ⓒ 쇼박스

 
일본에 대한 묘사, 지나치지 않았을까?
 
거슬리는 점은 이뿐이 아니다. 수차례 등장하는 '한국 귀신과 달리 일본 정령은 원한 없이도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해한다'는 류의 대사가 대표적이다. 일본귀신이 한국귀신에 비해 더 악독하다는 인식은 대체 얼마만큼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러운가.
 
글 초장에 적은 것처럼 일본이 같은 방식으로 이 땅의 인물을 원귀처럼 묘사하는 영화를 찍는다면 적잖이 불쾌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불행히도 이제 나는 실재했던 인물을 거듭 떠올리게 되는 귀신이 나오는, 그것도 그와 '쇠말뚝 박기' 같은 비열하고 조잡한 일을 엮어놓은 영화가 한국에서 큰 호응을 일으켰음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부끄러운가.
 
우리가 싫은 것은 남 또한 싫은 것이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같은 비극으로부터 저들의 가해와 우리의 저항을 나누는 건 그래서 의미 있는 일이다. 침탈은 비판받아야 하며 저항은 존중돼 마땅하다.

그러나 영화는 저항을 넘어 불필요한 모독과 모욕으로까지 흘러간다. 삶의 무대를 넘어 죽음 뒤, 민속신앙의 영역에서까지 국적을 나누고 호오를 가른다. 판타지 오컬트이므로 어떠한 근거 또한 제시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래도 좋은 것일까.

나는 모두가 축하를 전하는 잔치 뒤에 그저 한 마디를 남기고 싶을 뿐이다. 진정으로 자긍심 있는 이는 남을 모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국영화는, 한국문화는, 한국의 창작자와 시민들은 마땅히 그럴 때가 되었으므로.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파묘 장재현 최민식 김고은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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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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