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언플랜드 포스터

▲ 언플랜드 포스터 ⓒ (주)영화사 오원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이 여성단체가 운영하는 클리닉센터를 몇 바퀴 째 돌고 있다. 낙태 수술을 받기 위해서다. 클리닉 센터 앞엔 그녀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자리를 잡고 그녀를 기다린다. 그녀가 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가 클리닉 센터에 전화를 건다. 센터장 애비 존슨(애슐리 브래처 분)이 수화기를 든다. 그녀가 묻는다.

"혹시 뒷문이 있나요?"
"아니요, 무슨 일이죠?"
"우리 가족들이 센터 앞에 와 있어요."
"그럼 가능한 건물 정문 앞에 차를 대요, 우리가 나갈게요."


차에서 내린 그녀를 향해 철망 밖 가족들이 외친다.

"다시 생각해, 그 아이는 릴리(손녀)처럼 정말 예쁠 거야."

그녀는 어머니의 만류를 뒤로 하고 클리닉으로 들어선다.

클리닉은 비영리단체 가족계획연맹이 운영한다. 원치 않은 여성들의 임신중절을 돕는 단체로, 중절수술을 하는 토요일이면 반대론자들이 찾아와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인다.

낙태찬성에서 반대로... 어느 활동가의 전향
 
언플랜드 영화 한 장면.

▲ 언플랜드 영화 한 장면. ⓒ (주)영화사 오원

 
센터장 애비도 두 차례 낙태 경험이 있다. 철없던 시절 실수였고, 원치 않는 임신이었다. 그녀의 설명대로라면 남자는 '루저'였고 낙태할 돈도 주지 않았다. 애비는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고 처음으로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처음은 수술이었고, 두 번째는 화학적 요법이었다. 마취약에 취해 기억도 잘 나지 않았던 처음에 비해 화학요법은 끔찍했다. 고통스러웠고 아래로 거듭 피를 쏟았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누가 나를 발견할까 걱정됐다. 엄마가 이 꼴을 보지 않길 기도했다.

"그저 부드럽게 자궁을 비워낸다는 약"은 무려 8주 동안이나 출혈과 어지럼증, 고통을 가져왔다. 고통이 떠난 자리는 죄책감이 채웠다.

이후 애비는 가족계획연맹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한다. 몇 년이 흘러 신뢰받는 활동가가 되고, 센터장까지 된다.

<언플랜드>는 누구보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위해 노력했던 애비가 낙태반대 활동가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부터 여성 스스로를 지키는 운동가에서 태아의 생명을 우선하는 활동가로 변하는 전향기다.

각본과 연출을 함께 한 척 콘젤만과 캐리 솔로몬은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의 영화인이다. <신은 죽지 않았다> <신을 믿습니까?> 시리즈의 각본과 제작을 함께 했던 두 사람은 낙태반대 관점을 대변한 <언플랜드>로 직접 연출에 나섰다.

영화는 시작부터 주인공 애비가 임신중절수술을 직접 목격하고 괴로워하는 장면을 담는다. 카메라엔 중절될 태아가 자궁에 삽입된 관을 피해 움직이는 모습이 그대로 찍힌다. 이 장면을 본 이상 낙태는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언플랜드 영화 한 장면.

▲ 언플랜드 영화 한 장면. ⓒ (주)영화사 오원

 
치우진 시선이 공감을 막는다

가치 갈등이 첨예한 문제에서 어느 한 편에 선 이들이 만들어낸 영화인 데다 연출에서도 초짜의 서투름이 그대로 묻어난다는 점은 치명적인 문제다. 원치 않는 임신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 임신부터 육아까지의 어려움와 경력 단절,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충분히 다뤄지지 않는다. 낙태는 곧 생명을 해치는 일이고 그건 곧 '악'이라는 입장에서 물러설 줄 모른다.

대립하는 두 가치를 폭넓게 다루는 건 처음부터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영화 속 낙태에 반대하는 단체인 생명운동연합 대표 숀(자레드 랏츠 분)과 애비가 나누는 짤막한 대화는 영화가 반대론을 어떻게 다루려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막 센터장이 된 애비가 활동가들에게 "촬영을 말아달라"고 요구하자 숀은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한다. 애비가 말한다.

"역사상 인권을 위해 싸워온 활동가들이 있어요. 처음엔 노예제와 싸웠고, 그 다음엔 홀로코스트에 대항해서, 다시 시민권(미국 내 흑백차별철폐운동을 뜻함)을 위해 싸웠죠. 가족계획연맹은 여성의 생식권을 위해 싸웁니다."

숀이 답한다.

"노예제, 인종차별, 유태인 학살을 예로 들었는데 그건 모두 인간성의 말살로부터 일어난 일이에요. 바로 그게 가족계획연맹이 태아에게 하고 있는 일이죠."

애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선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환호한다.

낙태에 찬성하는 이들조차 이토록 일방적인 토론을 보는 건 원치 않을 것이다. 여성단체 주도로 낙태죄 폐지 논의가 활발하게 일고 있는 한국에서 곧 개봉할 영화라면 더더욱 그렇고 말이다.
 
'낙태 합법화 논란' 한국에서도 현재진행형

한국 국회에선 임신기간에 따라 낙태를 일부 허용하는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안으로, 문재인 대통령 재가를 받아 국회로 넘겨진 상태다.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4월 낙태죄가 위헌이라며 올해 말까지 법안을 개정하라고 결정한 데 따른 것이다.

정부가 마련한 안은 임신 14주까지 낙태를 전면 허용하고 그 뒤부터 24주까지는 강간이나 근친 간 성행위로 인한 임신, 임부의 건강상 문제 등이 있을 경우에 허용하는 것이다. 사회적·경제적 이유도 고려하도록 해 사실상 24주까진 낙태를 전면 허용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민사회단체는 법안을 두고 첨예하게 갈라섰다. 임신이 임신기간은 물론 출산 후에도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점에서 여성단체는 낙태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은 몰라도 적어도 형법으로 다스려선 안 된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반대론자들은 태아의 생명권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디까지를 존엄한 인간으로 볼지 쉽게 결정할 수 없다는 논리가 근거가 된다. 이 같은 주장 뒤엔 낙태죄를 폐지할 경우 낙태가 더욱 늘어나고 인간생명에 대한 경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자리한다.

심지어 세계보건기구와 산부인과 학계 등에선 22주부터는 현행 기술로 태아의 독자생존이 가능하다고 공표했다. 상용화된 기술로 임신부와 독립해 생존이 가능한 22주 이후 태아는 이전까지와 달리 산모의 자기결정권을 이유로 죽여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기 어렵게 됐다. 정부가 여성계의 극렬한 반대에도 24주 이후 낙태를 전면 금지하는 안을 고수하는 이유다.

기술발전에 따라 태아가 독자생존할 수 있는 시기가 더 짧아질 것이란 점은 논란이 되는 대목이다. 마찬가지로 여러 이유로, 특히 재정적 이유로, 이 기술의 수혜를 받을 수 없는 여성들에게 이 같은 주장이 큰 의미가 없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더불어민주당의 강력한 입법의지에도 법안은 해소되지 않은 논란을 품고 있다.
 
언플랜드 영화 한 장면.

▲ 언플랜드 영화 한 장면. ⓒ (주)영화사 오원

 
입과 머리로는 깨우칠 수 없는 게 있다

이 같은 시점에서 개봉한 <언플랜드>가 보다 성숙하고 폭넓은 논의를 이끌 수 있는 영화였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확고한 믿음에만 입각해 실제 삶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를 도외시하는 게 종교가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니란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영화의 가치를 찾는다면, 관련 법안을 둘러싼 논의가 한창인 한국에서 실제 행위를 정면으로 다룬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반대자들뿐 아니라 찬성하는 이들조차 상대가 지키려는 가치가 진실로 어떤 것인지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입으로만 떠들고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과 실제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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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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