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상인·금융소비자단체 회원들이 지난 10월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가계부채 문제 해결 촉구' 기자회견을 마친 뒤 채무자들의 빚 탕감을 위해 정치권, 정부, 은행이 나서야 한다는 내용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럼 '조용한 금융위기'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가 관리할 수는 없을까?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지 않도록 정부가 주도면밀하게 관리해서 은행 부실화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지 않을까?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역대 정부는 금융 부문을 동원하여 부동산 가격을 올리거나 떠받치는 정책을 거듭해 왔다. 부동산PF나 가계부채 발 위기를 원천 봉쇄하려면 부동산 가격 하락을 막아야 한다. 이는 다시 재정이나 금융으로 뒷받침돼야 하는데 현 재정 상황을 감안할 때 결국 가계부채가 늘어나거나 최소한 유지되어야 한다.
디레버리징 없이 고부채 상황이 지속되면 부동산 가격의 급락은 막을 수 있겠지만 이러한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높은 수준의 부채와 부동산 가격이 장기간 지속되면 소비 위축, 생산성 및 출산율 저하의 고착화로 연결될 수 있다. 단기적으로 금융위기를 피할 수는 있으나 이런 대응책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경제에 구조적인 병폐가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고부채로 인해 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지면 가계의 실질 가처분소득이 줄어들어 결국 민간소비 위축으로 이어지며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GDP 대비 80% 이상의 가계부채는 경제성장의 둔화요인으로 작용한다. 정화영 연구위원은 국내 가계를 소득분위 및 레버리지 수준에 따라 그룹화한 후, 각 그룹별 가구 평균 소비성향의 중간값을 계산했다. 그 결과 동일한 소득분위 내에서 고레버리지 그룹의 평균 소비성향이 다른 그룹에 비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과도한 레버리지가 가계소비를 제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고부채는 소득 불평등과 맞물려 한국경제를 부채 함정(debt trap)에 빠뜨릴 우려도 있다. 부자들의 저축이 늘어 이자율이 낮아지면 저소득층 등 다른 경제 주체들이 더 많이 빌리게 된다. 이에 따라 부자들의 소득이 더 늘어나고 저축도 증가하게 되어 사이클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원래 부채 함정에 대한 이론은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채의 디레버리징이 이뤄졌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또한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면서 미 연준은 가장 가파른 속도로 금리 인상을 주도했다. 이에 반해 한국의 경우 디레버리징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으며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도 일찍 멈춘 바 있다. 한국의 소득분배가 나빠진 것까지 감안하면 오히려 한국이 부채 함정의 좋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주택·부동산 부문으로 자원이 집중됨에 따라 경제 전반의 생산성 저하 가능성도 제기된다. IMF의 유 쉬 박사에 따르면 중국의 부동산 붐에 따른 자원배분 왜곡이 없었다면 제조업 부문의 총요소생산성이 매년 0.5% 개선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높은 주택가격 상승률, 전월세 등 주거비용의 증가는 혼인율과 출산율을 낮추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혼인 이후 출산 시기 및 자녀 수 등의 가족계획에 있어서도 주거비용은 중요한 제약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매우 많은 실증연구들이 한국의 주택가격이 출산율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질서 있는 디레버리징이 핵심 정책
물론 금융위기나 장기침체는 모두 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가계부채의 디레버리징을 확고히 추진하는 가운데 재정정책, 통화정책, 금융정책의 바람직한 조합을 찾아야 한다. 한국은행 통화신용정책보고서(2023년 9월)에서처럼 "중장기 안정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금융불균형이 일정 수준 이하에서 관리되어야" 한다. 특히 가계부채의 질서 있는 디레버리징은 가장 핵심적인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중국도 이미 디레버리징 정책을 시작했다. 중국은 2017년 이래 부동산 시장에 대해 '방주불초(房住不炒, 주택은 거주용이지 투기 대상이 아님)' 기조를 유지하면서 부동산 버블과 과잉 부채 억제를 위한 디레버리징 정책을 펴는 '경제구조의 리밸런싱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23년 중 기준금리 인상을 조기 종료하고 대출금리 하락을 유도함에 따라 가계부채가 다시 빠르게 늘어나기도 했으나 최근 가계대출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재선회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춘섭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은 지난 1일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이 80%까지는 떨어져야 하지 않나 싶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다만 디레버리징은 상당 기간 후유증을 낳을 수 있으며 경제 주체들이 빚을 갚느라 소비와 투자를 줄이면 거시경제 위축이 우려되므로 정부의 재정 활용이 필요하다. 특히 경제의 공급능력과 산업정책, 연구개발과 기술경쟁력, 경제주체들의 역량 강화에 초점을 맞춰 재정을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반면 감세정책은 디레버리징에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디레버리징 후유증에 대비하는 재정정책 여력을 축소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소득 불평등이 부채 함정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므로 이를 완화하는 정책들도 긴요하다. 조세정책을 통한 부의 재분배 및 세금에 기반한 재정정책은 경제활동 회복에 큰 효과를 줄 수 있다. 거시건전성 정책은 부채를 억제함으로써 장기적으로 긍정적 정책효과를 가져오지만 단기적으로는 침체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채무 탕감(debt jubilee) 등 부채구조조정은 단기적으로 생산을 촉진할 수 있으나 불평등 축소, 재분배 등에 변화가 없다면 장기적인 효과는 크지 않기 때문에 소득재분배 정책과 병행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