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10 11:32최종 업데이트 24.10.1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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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헌법 제32조 제3항에서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라고 명시하며 노동자의 존엄성을 절대적 가치로 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간 일터에서 발생하는 인격 침해는 사회생활에서 개인이 감내해야 할 삶의 애환이나 고달픔 정도로 여겨져왔다. 직장 내 괴롭힘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하는 노동자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인격 침해를 규율하기 위한 법·제도적 요구가 높아졌다. 마침내 2019년 근로기준법(근기법)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 규정(이른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신설하게 됐다. 이로써 일터에서 노동자들의 존엄성이 보장받을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법 시행 5년이 지났음에도 직장 내 괴롭힘은 여전히 만연하다. 고용노동부 통계를 보면 직장 내 괴롭힘 신고는 2020년 5823건에서 2023년 1만 236건으로 거의 2배 가까이 증가했다. 괴롭힘 감수성이 높아짐에 따라 신고건수가 증가한 측면도 있고, 신고의 오남용 등 괴롭힘 금지법이 지닌 문제로 인해 발생한 통계적 과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법의 사각지대를 고려해 볼 때 오히려 과소 보고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동일한 통계수치를 놓고도 여러 주장이 제시되는 것은 괴롭힘 금지법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오남용으로 경시되는 피해자 신고

근기법은 직장 내 괴롭힘을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정의한다. 누구나 사용자에게 신고할 수 있다.

노동자를 괴롭힘으로부터 보호해야 마땅하지만 상사와의 갈등으로 인한 불편은 직장 내 괴롭힘과는 엄연히 다른 문제이고 분리해 다뤄야 한다. 그러나 현행법으로는 이를 구분할 수 없으며 단 한 번의 주관적 불편함으로도 신고할 수 있다.

실제로 고용노동부에 신고된 사건 중 개선지도나 과태료, 검찰송치 등 권리구제가 이뤄진 비율은 10.6%에 불과하다. '법 위반사항 없음'으로 처리한 비중도 초기보다 2배 증가했다. 다수의 전문가가 괴롭힘 금지법의 오남용 문제를 지적하는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직장 내 괴롭힘은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말한다.셔터스톡

신고의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괴롭힘 요건에 반복성·지속성을 포함하고, 기준을 구체화해야 하며, 엄격한 증거를 요구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럴 경우 문턱을 높여 피해자를 보호하기 어려워진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그러나 현행 규정은 무고한 가해자를 양산할 뿐만 아니라 법의 신뢰도를 낮춰 진짜 피해자의 신고를 경시하도록 만들어 오히려 피해자를 보호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현장에서는 법을 희화화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문제 삼는 사례가 어렵지 않게 관찰되고 있다. 결국 진짜 괴롭힘 피해자가 신고하지 못하거나 신고의 의도가 의심받는 상황까지 등장한다. 괴롭힘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신고의 오남용 방지가 시급하다.

소규모 사업장, 신고·처벌보다 중재 필요

2023년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이 남녀 노동자 1600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괴롭힘 실태를 조사한 결과, 노동자의 61.5%가 신체적 폭력, 언어 폭력, 따돌림, 직무 배제 등의 괴롭힘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법 시행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중 법·제도적 절차로 대응한 비중은 14.2%에 그쳤고, 특별한 대처 없이 휴직, 이직, 퇴사를 고려한 비중은 무려 70.7%에 달했다. 30인 미만 사업장은 이 비중이 90%에 육박한다.

법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 조치를 명시하지만, 소규모 사업장은 물리적 공간 분리가 어렵고 사건 종결 후에도 같은 공간에서 마주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용자는 피해자의 의견을 들어 행위자를 징계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피해자와 행위자의 관계 개선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현행 괴롭힘 금지법은 신고 – 사실 확인 – 조치라는 3단계 절차를 갖는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에게는 갈등, 이직, 퇴사 등 여러 불편함을 염두에 둔 '신고' 아니면 '인내'라는 선택지만 주어진다. 물론 어떤 선택을 하든지 결국 피해자의 퇴사로 귀결되는 것이 소규모 사업장의 현실이다.

6월 18일 공공연대 고용노동부본부 조합원 등이 고용노동부 울산고객상담센터 앞에서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이유로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신고 이전에 양측과 어떠한 이해관계도 없는 제3자가 개입하여 가해자-피해자 간의 갈등과 괴롭힘 문제를 중재할 필요가 있다. 제3자는 대표적으로 영국의 ACAS(Advisory, Conciliation and Arbitration Service)와 같은 독립기구를 들 수 있다.

노동위원회로 이관하자는 주장도 있다. 충분히 검토할 만한 대안으로 보인다. 그러나 직장 내 괴롭힘을 노동위원회로 이관하면 신청, 조사, 판정 등 절차가 복잡해진다. '조사'라는 행위 자체가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에게는 높은 심리적 장벽이 된다는 문제도 있다. 지금 소규모 사업장의 괴롭힘 피해자에게 필요한 건 신고 후 누가 퇴직하느냐의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조기 화해다.

조직문화 개선이 근본적이고 시급하다

괴롭힘 금지법 시행 5년 동안 언론 등에서 비중 있게 다루다 보니 괴롭힘에 대한 인식도 차츰 변해가는 게 체감된다. 다만 개인 차원의 대인관계는 변화가 있지만 위계적·수직적‧경직적 조직문화는 여전히 변화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결국 직장 내 괴롭힘을 고착시키는 본질적 원인으로 보인다.

앞의 괴롭힘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성별이나 연령, 혼인 상태, 교육 수준 등의 요인보다 하위직급에 대한 조직문화가 직장 내 괴롭힘에 가장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사업장의 괴롭힘 발생률은 대리급 이하에서 88.2%에 달하며, 빈도에 있어서도 월 1~2회가 62.7%를 차지한다.

개인의 인식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사고방식이나 행동패턴이 쉽게 바뀌지 않는 구조적 관성 문제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조직문화는 조직체 고유의 가치관, 규범과 관습, 행동 양식 등 조직 구성원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명시하는 비공식적 지침으로 기능한다. 이 조직문화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직장 내 괴롭힘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장진희 /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장진희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장진희는 한양대학교 대학원 경제금융학과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후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주로 여성노동자와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등 미조직 취약노동자 연구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일자리위원회 플랫폼노동과 일자리 TF 위원, 여성가족부 정책자문위원, 서울시 및 경기도 노동정책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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