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5일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 등 수십 명의 여성을 협박, 촬영을 강요해 만든 음란물을 유포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씨가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기 위해 호송차로 향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상황이 이런데도 대한민국 정부는 위기의식이 없다. 영국, 호주, 유럽연합(EU)은 여성을 향한 폭력을 "테러"와 동등한 수준의 심각한 국가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국내 성범죄의 심각성을 고려한다면, 성폭력 문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국가는 대한민국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정부는 선제적 대응은커녕 국제 표준도 따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올해 EU 의회는 역사상 최초로 '여성 대상 폭력 및 가정 폭력 퇴치에 관한 지침'을 통과시켰다. 이 지침은 EU의 모든 국가에 적용되는 "최소한의 것"으로, 각 국가는 이보다 더 강력한 법안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지침에 맞춰 3년 내에 국내법을 개정해야 한다. 그야말로 최소한, 즉 국가가 기본적으로 따라야 할 책무라는 것이다.
이와 비교해 보면 우리 정부는 그 '기본'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음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 정부는 디지털 성폭력이라는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적절한 대응 방안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음란물'로 접근하는 대한민국. 딥페이크를 비롯한 성착취물을 '심의'하고 정보통신 서비스 사업자에게 삭제·차단 요청을 하는 주체는 여전히 방송통신심의위원회다. 그런데 방심위가 성착취물의 삭제·차단을 도맡아야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한 곳이 방심위인가?
이미 3년 전 법무부 산하 디지털성범죄전문위원회는 '디지털 성범죄 응급조치' 신설을 권고하면서, 피해자의 신고를 가장 먼저 접하는 경찰에 삭제·차단 권한을 부여해야 성범죄물의 확산을 최대한 일찍 막을 수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특히 방심위가 성범죄물을 심의하는 것은 그동안 음란물 심의와 성범죄물 심의를 동일시했던 관행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같은 인식은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들이 오랫동안 겪은 문제다. 자신의 신체를 불법촬영한 가해자를 신고해도, 법원이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부위"가 아니라며 무죄 판결을 내리지 않았던가. 바꿔말하면 "성적 흥분을 유발하는 부위"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즉, '음란'하지 않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문제의 핵심인가?
디지털 성범죄물을 '음란물' 또는 '포르노'로 접근하면 새롭게 진화하는 성범죄를 결코 막을 수 없다. 이미 국제 표준으로 '비동의 은밀한 이미지'(Non-Consensual Intimate Image, NCII)라는 용어가 정착된 지 오래다. NCII는 동의 없이 제작된 성적·사적 이미지와 영상을 뜻하며, 당연히 딥페이크와 실제 이미지가 모두 포함된다.
여기서 핵심은 해당 영상이 '얼마나 성적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피해자의 인지 또는 동의 없이 이미지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특히 회유, 그루밍(grooming), 협박을 통해 생산된 이미지도 포함된다. 이것은 동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같은 용어를 채택한 중대한 계기가 있다. 바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상당수가 아동이라는 점, 그리고 피해 연령이 빠른 속도로 내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결정적인 계기는 아동·청소년들이 '스스로' 자신의 신체 부위를 담은 이미지를 만들도록 유혹하는 신종 범죄의 등장이었다.
디지털 성폭력, 새롭게 규정하고 이해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