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0.05 10:55최종 업데이트 24.10.07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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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부활절을 며칠 앞둔 어느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신의 SNS에 영상을 올렸다.

"모든 미국인은 집에 성경이 필요하며, 저는 여러 권의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 입니다. 저는 이 성경을 추천하고 여러분도 꼭 갖기를 권장합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추천한 유일한 성경'으로 홍보된 이 성경에는 다른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미국 헌법, 권리장전(Bill of Rights), 독립선언서, 국기에 대한 맹세, 그리고 가수 리 그린우드 손글씨체의 '하나님, 미국을 축복하소서(God Bless the USA)' 가사가 그것이다. 이 성경의 공식 이름은 곡 제목을 본따 '하나님, 미국을 축복하소서 성경' 이다. 가격은 59.99달러.

트럼프는 세 번의 결혼을 했고 성인 영화 배우와의 혼외 관계를 은폐하려고 서류를 위조해 최근 중범죄 유죄 판결이 나기도 했다. 이처럼 논란이 되는 사생활에도 불구하고 선거 자금을 모으기 위해 성경을 판매한 트럼프의 행위는 다수의 언론과 코미디쇼에서 한동안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노골적인 정치적, 상업적 행위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 집단이 있었으니 바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기독교 민족주의'란 기독교 신앙과 민족 정체성이 결합된 이념이다. 미국을 신이 선택한 국가로 여기며 정치, 사회, 교육 정책 등에 기독교적 교리와 원칙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믿는 운동이다. 자연스럽게 정교분리 원칙에 반대하며, '문화 전쟁'이나 '영적 전쟁'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난민, 이민자, 성소수자, 낙태, 페미니즘 등을 도덕적 타락으로 간주하고 강력한 배제와 규제를 주장한다.

기독교 민족주의 문서, 50만 공무원 대체 계획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가 7월 26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에서 열린 '신자 정상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이 행사는 기독교 민족주의 단체 터닝포인트 액션이 주최했다. EPA/연합뉴스

이들은 또한 진보적, 세속적 삶에 반대하는 것을 신의 소명으로 여기고, 기후 변화나 진화론과 같은 과학을 부정하며, 공교육에서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미국이 본질적으로 백인들의 국가라고 믿기 때문에 이민 정책에 반대하고, 서류 미비 이민자의 즉각 추방과 속지주의(미국 태생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현 제도) 폐지와 같은 인종주의 정책을 옹호한다.

혹자는 이렇게 지적할 수도 있다. 소수의 극렬 신도들의 주장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아니냐고. 그러나 실제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정리한 문서가 있다. 바로 올해 미국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프로젝트 2025'이다.

미국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이 발간한 '프로젝트 2025'는 트럼프 재선에 대비한 세부 정책 제언서다. 트럼프 행정부 1기 인사들 100여 명과 다수의 보수 전문가들이 작성에 참여했다. 900페이지가 넘는 이 제언서는 보수적·기독교적 가치관에 맞춘 미국 정치·사회 질서 재구성을 목표로 한다.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약 50만여 명의 비당파적 공무원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트럼프 이념에 충성하는 인사들로 대체하려는 문제적 계획도 포함하고 있다.

프로젝트 2025가 얼마나 급진적인지는 트럼프가 9월 10일 카멀라 해리스와의 대선 토론에서 이 문서와 자신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트럼프의 이름이 프로젝트 2025에 300번 이상 언급되며, 제언서를 발간한 헤리티지재단의 대표 케빈 로버츠는 이 제언서가 "트럼피즘(Trumpism)을 제도화한 청사진"이라고 공개 발언하기도 했다.

참고로 로버츠 대표는 헝가리의 극우 독재화 현상을 찬양하고, 2020년 미국 대선 결과를 부정하며, 과거 반공주의의 상징인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을 옹호하는 등 논란의 인물이다. 이처럼 트럼프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 사이에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긴밀한 정치적 연대가 형성되었다.

그럼에도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미국에서 여전히 소수에 해당한다. 미국 공공 종교 연구소(PRRI) 조사에 따르면, 미국 전체 인구 중 자신을 기독교 민족주의자 혹은 동조자라고 표현한 이들은 29%였으며 그 중 10%는 열성 지지자, 19%는 동조자였다. 이러한 극단 세력과의 연대가 거센 역풍을 초래할 수 있음에도 트럼프는 그들과 거리를 두기보다는 오히려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그 이유는 미국 선거제도의 맹점에 있다.

미국 대선은 더 많은 선거인단을 획득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데, 더 많은 표를 얻은 후보가 그 주에 배정된 선거인단을 모두 가져간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이미 보수적이거나 진보적 성향이 뚜렷한 주를 공략하기보다는 경합주(swing state)에 집중하는 것이 유리하다.

공교롭게도 조지아, 노스캐롤라이나, 플로리다,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오하이오 등 몇몇 중요한 경합주는 바이블 벨트를 관통하는 남부와 중부에 몰려있다. 이 지역에는 백인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이 다수 거주한다.

퓨리서치(Pew Research)에 따르면, 미국에서 트럼프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집단은 백인 복음주의 개신교인이다. 2016년 대선에서 이 집단의 77%가 트럼프를 지지했으며, 2020년에는 84%로 증가했다. 그리고 이들 중 약 66%는 기독교 민족주의를 적극 지지하거나 동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경합주에 위치한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공략하고 있으며, 이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고 있다. CNN 조사에 의하면 오하이오주의 경우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비율이 2016년 21%에서 2024년 초 53%까지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해리스 캠페인이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이유다.

"그들이 좇는 것은 기독교 아닌 세속 권력"

지난 1월 27일 미국 워싱턴에서 시민들이 리티지재단의 ‘프로젝트 2025’를 폐기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AP/연합뉴스

여기서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기독교와 기독교 민족주의는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기독교 신앙을 갖고 정치와 사회에 참여하는 것과 기독교 민족주의는 다른 개념이다.

그 둘을 구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기독교 신앙이 정치적 이념, 특히 권위주의적이고 극단적 보수주의 이념과 결합하는지 여부이다. 극우적 이념은 민주주의의 원칙이나 사회의 다원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2021년 1월 6일 미국 의회 점거 폭동은 좋은 사례다. 실제로 이 사건에 기독교 민족주의를 자처하는 이들이 많이 참여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런 과열된 일부 기독교의 과격화에 여러 전통 기독교인들이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잡지인 <크리스채니티 투데이> 편집장 러셀 무어 목사, 한국에서도 유명한 존 파이퍼 목사, 21세기의 C. S. 루이스라 평가받은 팀 켈러 목사 등 수많은 개신교 리더들은 지적한다. 기독교 민족주의가 진정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백인) '민족주의'이고 결국 그들이 좇는 것은 '세속적 권력'임을 말이다.

'기독교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 단체를 이끄는 아만다 타일러 대표 역시 의회 발표 중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해 "종교적 권위를 정치적 권위와 혼동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이는 종종 소수자 및 기타 소외된 집단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영적 빈곤을 초래한다"고 경고했다. 이런 비판은 기독교 내부에서도 기독교 민족주의가 큰 논란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보는 관점은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미 합중국을 건국한 선구자들 대다수는 종교적 압박을 피해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 의도가 없었다. 그래서 권리장전 제1조에 "의회는 종교의 수립에 관하여 법을 제정할 수 없으며..."라고 명시해 정교 분리의 원칙을 명확히 했다.

그럼에도 기독교와 정치 이념의 결합, 그리고 미국 예외주의는 미국사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히 20세기 들어 진화론과 성경 비평 등 과학과 실용주의가 부상하고, 여성 참정권 운동, 흑인 민권운동, 반전 운동, 페미니즘, 이민 개방, 성적 자유주의, 성소수자 운동, 프로 초이스 등 다양한 사회적 변화를 거치며 일부 기독교 교단은 더 '근본주의화'하기도 한다.

대외적으로 일부 기독교 신앙은 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냉전, 걸프전, 이라크전쟁 등을 통해 더 전투적인 '군사주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 중에서도 공산주의 확산은 특히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냉전 시기, 소련을 중심으로한 공산주의와 무신론이 미국에서 존재론적 위협으로 간주되면서, 반공주의가 특히 근본주의 개신교와 일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더욱 강하게 대두되었다. 그들은 매카시즘과 같은 반공 운동에 큰 지지를 보내며 정치적 보수주의와도 더욱 가까워졌다.

우리나라도 유사 담론 자주 등장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가 지난 9월 12일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에서 열린 선거 유세에서 지지자들과 인사하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이처럼 일부 기독교 세력과 보수정치의 결합, 반공주의, 미국사에서 백인을 미화하는 역사 수정주의, 그리고 성소수자와 타인종 이민자에 대한 억압은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도 사회 정치적으로 유사한 담론이 자주 등장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개신교 비율(약 20%)을 기록하는 대한민국에서 보수적 신앙과 반공주의가 정치 세력과 결합하면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가령, 최근 대한민국 국가인권위원장 후보는 국회 청문회에서 진화론을 부정하고 공교육에서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성소수자 권리 보호를 "공산주의 혁명에 이용될 우려가 있다"고 한 바 있다. 이러한 발언은 단순히 개인의 독립적 견해라기보다는 극단적 보수 신앙의 발전사에서 파생된 세계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더불어 기독교를 비롯한 특정 종교는 어느 한 정당이나 정치세력이 독점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라는 명칭을 내건다고 해서 실제 그 본질과 가치가 자동으로 구현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 속에서 부당한 권위에 맞서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미국 역사에서 기독교는 노예제 폐지 운동, 민권 운동, 반전 평화운동, 사회복지와 빈곤 구제 운동, 이민자와 난민 보호 운동 등 다양한 사회 정의 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기도 했다.

건강한 민주사회란 다양한 종교와 가치관이 자유롭게 토론되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열린 장을 장려하는 곳이다. 특정 종교가 권력이나 정치이념과 결합하고, 그로 인해 타인들의 존재와 권리가 위협받는다면 우리는 그 위험성을 분명하게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트럼프와 기독교 민족주의자의 연대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며, 그 결합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있게 검토해야 한다.

전후석 / 재미 영화감독전후석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전후석은 뉴욕에 거주하는 재미 한인 영화감독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와 <초선>을 연출했고 <당신의 수식어>라는 저서가 있습니다. 세 창작물 모두 재외동포들의 이야기와 디아스포라적 사유라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스토리텔러가 되기 전에는 뉴욕 변호사로도 활동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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