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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료원 영안실에 앉아 그들의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죄책감 속에 지난 11일을 보냈다. 결국 내 탓이려니... 여기 모여 있는 우리 모두의 탓이려니...

이제 한 줌 재로 변해버린 꽃다운 5명의 넋을 가슴에 묻어야 한다. 그러나 이대로 끝난 것은 아니다. 끝나서도 안 된다. 지금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차가운 쇠창살에 손톱 뭉개지도록 자유를 목말라하고 있을 우리의 누이들이 있기에...

당신의 몸값은 얼마입니까?

권OO(24) 2천9백만원, 최OO(22) 1천8백만원, 임OO(20) 1천8십만원, 김OO(20) 1천1백만원, 박OO(21) ?

이들 다섯 명은 각각 전OO씨와 김OO씨 등 4명으로부터 화재가 난 군산시 대명동 일명 '쇠파리 골목'의 윤락업소 포주에게 지난 1년 사이에 팔려왔다.

이 몸값은 고스란히 다섯 명의 빚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매일 최고 13명의 남성들을 상대하며 빚을 갚아 나갔다. 빚을 다 갚고 나면 또 다시 어디론가 팔려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몸이 아파 약을 사먹어 가며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가족이 보고 싶고, 친구가 그리워도 모두 차가운 쇠창살 밖의 일이다. 포주들은 이들이 빚을 갚지 않고 도망갈 것을 우려해 창문마다 단단한 쇠창살을 만들어 두었고, 하나 뿐인 출입구마저 열쇠로 잠가 놓았다.

"오후 2∼3시가 되면 아가씨들 10여명이 떼를 지어 목욕탕으로 들어가요. 그 때 보면 항상 뒤에 덩치 좋은 남자가 지키고 있지요."

화재가 발생한 건물 앞에서 철물점을 운영하고 있는 최OO(48) 씨는 "목욕가는 것 이외에 아가씨들은 좀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자유라고는 아침 7시 지친 몸을 눕히고 잠이 들면서 쓰는 일기가 전부였다.

"어제 아가씨 한 명이 갔다. 언제 나도 갈지 모른다는 두려움. 솔직히 겁이 난다" - 임양의 일기 중에서

입관하던 날

"추운 걸 싫어하는 애였어요. 빨리 따뜻한 세상에 가서 편히 쉬었으면 좋겠는데..."

사고가 난 지 열흘만인 29일 희생자들은 영안실 냉동 보관함에서 나와 입관을 했다. 희생자들의 부모들은 입관을 지켜보기 위해 영안실로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권양의 아버지 권OO(55) 씨가 영안실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권양이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있어서 몇 번이고 억지로 감겨봤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눈을 뜨는 것이었다. 권씨는 결국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뛰쳐나온 것이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두 눈을 감지 못했을까?"

임양의 아버지 임OO(46) 씨는 오랫동안 신경통 때문에 몸이 아팠었다. 그 동안 딸의 시신을 보지 않았던 임씨도 관에 들어가는 딸의 마지막 모습만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아픈 몸을 이끌고 딸의 입관하는 모습을 지켜봤던 임씨는 입관이 끝나고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영안실은 울음바다로 변해 버렸다.

임양, 권양, 김양의 아버지들은 자식의 입관이 끝나자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은 최양과 박양의 입관을 함께 지켜주기로 했다. 그러나 이들의 입관은 이미 병원 측에서 오후에 진행해 버린 것. 아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 못했다.

권씨는 "누구 맘대로 지켜보는 사람 하나 없이 입관을 한 것이냐?"며 강하게 항의했다. 권씨는 또 "고아라고 차별하는 것이냐?"며 "그 둘은 죽은 것도 억울한데 죽어서도 차별 받았다"고 항의했다.

결국 권씨의 항의로 군산시청 직원과 병원 측이 타협에 나섰고 이미 입관을 한 두 시신을 저녁 8시가 다 되어서 권씨 등이 다시 확인했고 또 그들의 넋을 위로했다.

이제 새가 되어 자유를 찾으소서

30일 오전 10시 영안실을 나온 장례차량은 희생자들의 영전을 앞세우고 화재현장 앞으로 향했다. 시민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노제가 시작되었다.

부축을 받은 희생자들의 어머니들, 영전을 안고 있는 희생자들의 동생, 그 주위로 시민단체회원들과 인근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열흘 전 화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건물 앞에 영전이 모셔지고 상위에 과일과 향이 놓여졌다. 노제가 시작되자 인근 주민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한 마디씩 했다.

"쯧쯧, 가엾어라. 저 어린 것들 불쌍해서 어쩐데..."

한상열 목사는 추도사에서 "이 지역에서 사회 운동하는 한 사람으로서 희생자들에게 죄송하다"며 "그들의 절규를 듣지 못하고 찾아보지 못한 것은 모두 내 탓이고, 우리들의 탓"이라고 말했다.

한 목사는 또 "님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성스러운 죽음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자"고 다짐하며 희생자들의 이름을 목청 높여 불렀다.

임양의 언니 임OO(23) 씨는 "같이 있고 싶고, 마주보고 싶고, 정말 보고 싶다"며 "한번만 단 한 번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해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권OO 양의 아버지 권씨는 "자식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아버지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진다"고 울먹였다.

시민단체의 회원인 홍진웅(36) 씨의 추도시로 장례식의 슬픔은 절정을 이루었다.


참 자유 찾아 떠나는 먼길


죽음과도 같은 밤일을
매일 그렇게 보내야만 했어
살아 있어도 살아 있었던 것이 아닌
온몸에 체온이라곤 단 1℃도 되지 않은
냉기 서린 살덩어리로
그렇게 매일 밤을 보내야만 했어

창살에 갇힌 새가
이미 접힌 지 오래인 날개의 근육보다
창살을 물었던 부리의 단단함으로
창살 안을 사는 것처럼
나는 날마다 깨물어 불어터진 아랫입술로
그렇게 매일 밤을 보내야만 했어

...

이제
누구도 날 가둘 수 없는 참 자유
이길 찾아 너무 멀리 왔는데...
세상을 다 용서하고 길 떠나고 싶은데...
너무나 서러워
너무나 서러워
좀더 걷다보면 다 잊혀지려나

...


다섯 명의 넋을 위로하는 해원굿을 끝으로 장례식이 끝나고 장례행렬은 화장터로 향했다.

장례식을 지켜보던 한 주민은 "비록 죽음에 이르기는 했지만 이젠 창살에 갇힌 새의 신세는 면하게 됐다"며 장례 행렬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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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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