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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삶을 마다하지 않고 한 시대의 언론정신과 역사정신을 일으켜세우기 위해 한평생 정진한 송건호 선생.
▲ 고단한 삶을 마다하지 않고 한 시대의 언론정신과 역사정신을 일으켜세우기 위해 한평생 정진한 송건호 선생. 고단한 삶을 마다하지 않고 한 시대의 언론정신과 역사정신을 일으켜세우기 위해 한평생 정진한 송건호 선생.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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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직후의 혼미한 시기에도 언론사는 비교적 안전지대였다. 또 그가 속한 외신부는 정치바람이 덜한 부서였다. 고정 월급이 나와서 어머니 모시고 생계도 안정되었다. 납북된 아버지의 소식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당시 외신부에는 부장이 없었다. 나보다 넉 달 먼저 입사한 송건호 (<동아일보> 편집국장, <한겨레> 사장 역임)와 단 둘이 근무했다. 외신부에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신문 지면이 타블로이드판 4면이어서 외신부 기자가 기사를 쓸 기회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저녁 아홉 시 이전에는 통신사에서 기사가 공급되었다. 아홉 시 이후 간혹 들어오는 기사를 외신부에서 번역했다. 내가 입사할 당시에는 없었는데 얼마 뒤에 T·T(Tele-Type, 인쇄전송기)가 들어왔다.

가끔씩 유럽에서 중요한 국제회의가 있을 경우 밤에도 T·T로 뉴스가 들어왔다. 그러면 밤늦게까지 남아서 중요한 내용을 번역해서 싣기도 했다. 그 외 평소에는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외신부 시절에는 별다른 제약없이 자유롭게 지냈다. (주석 9)

신문기자 초년생으로 지켜 본 당시 내부사정이다.

△ 한찬욱 : 당시 언론계 현황이랄까, 대표적인 언론사부터 시작해서 성향, 자연스럽게. 왜냐면 선생님 54년도에 공채로 들어오신 거 아닙니까? 54년 같으면 9월달에 사사오입 개헌안이 터지면서 사실 야당인사(가정의)'불온문서 투입사건'등으로 인해 가지고 언론통제가 이승만 시절 때도 들어갔거든요. 그 관련돼 가지고.

△ 김자동 : 근데 뭐, 신문사 내부에서는 그 당시 나중에 박정희 때하고 비교할 적에는 상당히 자유스러웠어요. 정치부 출입기자들에 대해서만 좀 더 신경을 쓰고 나머지는 각 출입처에서 오히려 기자들이 돈 먹고 안 쓰고 그랬지, 부패된 것 폭로해 가지고 그것 때문에 박해받고 한 일은 거의 없었다고, 특히 경제부처에서는(상생부를), 기자하고 관(官)하고 상생을 잘했으니까 자꾸 잘 덮어주고 그랬지. 

△ 한지헌 : 기자활동 하시면서 제약 같은 거를 받은 거.

△ 김자동 : 난 더군다나 외신부에 들어가 있으니까 외신부는 번역만 해내면 되니까. 그리고 해설기사를 내가 거의 견습기자 떨어지기 바쁘게 해설기사 내가 썼거든. 그때는 처음에는 내 이름으로 기명없이 해설기사 썼지만 나중에 내 이름 들어가는 해설기사 쓰고, 외신부가 단 둘이니까 우리가 쓰면 누가 잘했다 못했다고 말할 사람도 없고. (주석 10)

김자동은 노후에까지 막역한 관계를 유지했던 청암 송건호와 우의가 두터웠다. 둘 다 성품이 강직한 데다 시국관이 비슷하여 죽이 맞았다.

어울려 다니기는 주로 동기생들이지만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은 청암 송건호였다. 청암은 나보다 넉 달 먼저 입사해 혼자 외신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내가 미국 연수 다녀온 6개월을 빼면 근 4년간 청암과 한방에서 같이 지냈다. 학교 다닐 때는 몰랐는데 알고 보니 청암은 서울법대 1년 선배였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위였던 청암은 <조선일보>에 입사하기 전에 대한통신이라는 곳에 근무한 적이 있다고 했다. 내가 입사하기 직전 <조선일보> 사장은 백상 장기영이었다. 장기영은 <한국일보>를 창간하면서 <조선일보> 기자들을 여럿 데리고 나갔는데 청암은 그때 따라가지 않았다. (주석 11)

외신부에서 2년여 근무할 즈음 미국 연수 기회가 왔다. 미국은 언론인은 물론 교수·정치인·관료를 초청하여 소정의 연수 과정을 마치도록 하였다. 풀브라이트 장학재단을 비롯 국무성이 초청케이스가 많았다. 각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친미파로 만들려는 정책(공작)이었다. 

1950~1980년대 미국 연수는 특혜처럼 인식되었다. 갔다오면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1사 1인의 원칙이어서 신문사마다 지원자가 많았다. <조선일보>도 경쟁자가 많아서 시험을 치렀다. 두 사람이 최종 합격을 했는데, 조정 끝에 김자동이 선발되었다. 

연수를 간 곳은 저널리즘으로 유명한 콜롬비아시 미주리대학이었다. 거기서 한인유학생 장용(한양대 교수 역임)을 만났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언론학 박사 1호'였다. 그때 나와 같이 연수를 간 기자는 합동통신 박경목, 로이타통신 이시호, <코리아타임스> 곽호석(코리아 헤럴드 편집국장 역임), <한국일보> 김종규(한국일보 사장·이란 대사 역임), 부산지역 신문사의 김 아무개 등 모두 일곱 명이었다. 대개 논설위원이나 부장급이었고 평기자는 나 혼자였다. (주석 12)

연수기간은 6개월이고 마지막 한 달은 각자 자유여행이었다. 박경목과 한 조가 되어 유타주로 가서 사촌동생 세동(世東)을 만나고 콜로라도주와 와이오밍주 등 미국 중서부지역을 돌아봤다.


주석
9> <회고록>, 280쪽.
10> <면담집>, 96쪽.
11> <회고록>, 294쪽.
12> 앞의 책, 307~30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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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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