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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시대는 바뀌어서 권력이 독주하면서 곡학아세하는 학기(學妓)들, 공정하지 못한 검기(劍妓)와 법비(法匪)들, 부화뇌동하는 관기(官妓)들, 이상기후 탓인지 방향감각을 잃은 기레기들이 마치 제 세상 만난 듯 설치는 세태에서, 험한 꼴 더 보기 싫어서였는지 지난 해 8월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신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선생의 발자취를 찾고자 한다. [편집자말]
중국땅에서 보낸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자동 회장
▲ 김자동1 중국땅에서 보낸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자동 회장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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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여러 유형의 인물을 만났다. 여기서 "만났다"는 표현은 고인의 경우는 자료·사료·기록·증언 등을 포함한다. 편의상 현대사의 경우 1945년 8.15해방을 기점으로 삼는다. 

한국 현대사는 격동기였다. 해방 자체가 민족이 주체적으로 쟁취한 것도, 식민지로 강점했던 일제가 개과천선하여 되돌려준 것도 아닌, 제3세력에 의해 주어진 피동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국민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토가 분단되고 동족상잔이 벌어졌다. 

이후 80여 년에 이르는 도정은 우리가 모두 아는 바와 같다. 비극도 많았고 자랑거리도 생겼다. 수많은 인물(인재)이 등장하고 사라졌으며 순환의 법칙에 따라 생성소멸은 진행형이다.

역사의 주체는 인물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재야의 뒷켠에서, 언론계의 일우에서, 인물들을 지켜보고 자료를 모으고 증언을 들었다. 성공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들도 있다. 성공자 중에는 지저분한, 도저히 존경받을 수 없는 인간들도 있고, 패배한 사람 중에는 위대한 인물도 없지 않다. 처음에는 괜찮아 보였는데 세월의 흐름, 정세의 변환에 따라 굴절된 인간군상이 있는가 하면, 세태가 가혹할수록 더 단단하고 아름찬 인물도 있다. 

방 이후 우리는 비록 외래의 산물이지만 민주주의를 중심가치로 삼아 살아왔다. 민주주의는 따지고 보면 '외래의 산물'만도 아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채택하고, 해방 후 제헌국회에서 이를 수용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특정한 관사를 붙이는 행위는 그 자체가 비민주적이다. 이승만의 일민민주주의, 박정희의 민족적민주주의,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아유브칸의 행정적민주주의 따위가 그렇다. 윤석열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헌법조문에 자유민주주의란 표현이 두 번 나온다. 그러나 민주주의란 표현은 아홉 번이 나온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1972년 박정희의 유신헌법에 처음 등장한다. 

'참기름'을 진짜 참기름, 순수한 참기름 어쩌구 하면 오히려 의심스럽듯이 민주주의는 그것 자체로서 국민주권주의, 권력분립주의, 직접선거제·다당제 등을 기본으로 한다. 우리 현대사는 민주주의 가치를 둘러싸고 진행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인물에 대한 평가 기준을 여기에 두고 '인물평전'을 쓰고 있다. 

중국의 고전 <도덕경> 58장에 '광이불요(光而不耀)'란 대목이 있다.
"빛나되 번쩍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 현대사에는 빛나는 인물이 더러 있었다. '빛나는' 인물은 '제4심'인 역사의 심판에서 최종 결정된다고 할 것이다. 

스스로 발광체가 되는 인물이 있고 피광체가 되는 인물도 있다. 세상의 인심 특히 언론의 경우 주로 발광체를 찾는다. 국민의 관심이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사실과 다른 경우도 적지 않다. 오히려 인물의 진수는 '광이불요'에 더 많이 존재한다.
 
동농 김가진과 아들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 손자 김자동. 손자 김자동(88)은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있다.
 동농 김가진과 아들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 손자 김자동. 손자 김자동(88)은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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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김자동(1928~2022) 선생은 가문이나 살아온 역정, 이룬 공적으로 치면 '빛나는' 분이지만 번쩍이지 않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여 묵묵히 살다 가심으로 일반인들은 그의 존재 가체를 잘 모르는 실정이다. 그가 남들처럼 입신에 좌고우면하며 번쩍이고자 했다면 가문·능력·경력 등으로 보아 화려한 감투가 몇 개는 주어졌을 것이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인근에서 태어나 김구·이동녕·이시영 선생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품에서 간난 고초를 겪으며 임시정부와 함께 자라났다. 해방 이듬해 귀국하여 유엔군 통역관을 거쳐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언론사 기자로 활동할 때 그 신문의 지향성과 논조가 생리에 맞지 않아 신생 <민족일보>에 들어갔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조용수 사장을 사형하고 신문사를 폐간시킴으로써 언론계를 떠났다.

쿠데타 실세가 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요직을 제안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금기시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등을 번역, 청년·지식인들의 지평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였다. 한동안 사업을 일궈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으나, 이제부터는 선대가 못다한 일을 계승하고자 황량한 재야의 벌판으로 나왔다. 야당에서 몇 차례 국회 비례대표의 제안이 있었으나 사절했다.   

민간 조직으로 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임시정부의 뜻을 기리고 연구하면서 해마다 독립운동가 후손과 일반 청년·학생들을 모아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를 찾는 행사를 벌였다. 보수정권이 역사를 왜곡하고 임시정부를 폄훼할 때 시위 농성과 학술대회를 열어 이를 분쇄하였다. 조용수 선생과 <민족일보>의 명예회복을 일궈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을 위해 십수 년 동안 노력한 결과 문재인 정부에 의해 2022년 마침내 개관을 보게 되었다.
 
귀국 이듬해인 1947년, 김자동씨가 5학년 때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귀국 이듬해인 1947년, 김자동씨가 5학년 때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 김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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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존재는 정치사회적으로 '빛나는' 인물은 아니었다. 평범한 삶이었다. 그러나 올곧은 지식인으로서 스스로 설정한 역사의 길을 굴절하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90 평생을 그렇게 살기란 쉽지 않은 시대와 풍토에서 선생은 이탈하지 않았다. 

성정이 강개하고 부귀영화 따위의 세속적 욕망을 극복했기에 가능했다. 그는 끝까지 참지식인의 품위와 사회원로의 품격을 지킨 흔치 않은 분이다.

다시 시대는 바뀌어서 권력이 독주하면서 곡학아세하는 학기(學妓)들, 공정하지 못한 검기(劍妓)와 법비(法匪)들, 부화뇌동하는 관기(官妓)들, 이상기후 탓인지 방향감각을 잃은 기레기들이 마치 제 세상 만난 듯 설치는 세태에서, 험한 꼴 더 보기 싫어서였는지 지난 해 8월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신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선생의 발자취를 찾고자 한다. 

"사상이나 힘에 의해 승리한 자들에게 나는 영웅이란 명칭을 거부한다. 오로지 심정(心情)에 의해 위대했던 사람들만을 나는 영웅이라 부른다." - 로망 로랑.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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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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