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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이듬해인 1947년, 김자동씨가 5학년 때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귀국 이듬해인 1947년, 김자동씨가 5학년 때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 김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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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3년 여 만인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 단독북진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엇박자를 놓았지만, 한국정부가 불참한 가운데 미국과 북한·중국이 휴전협정을 맺은 것이다. 

3년여 동안의 전쟁은 양측에 엄청난 전화를 남긴 채 휴전선을 경계선으로 총부리를 멈추게 되었다. 김자동은 전쟁으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으니 복학을 생각하지 않는 바 아니었으나, 법학공부에 취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접었다. 재학 시절에는 한때 문리대 철학과를 생각해보기도 했었다. 이것도 전쟁을 겪으면서 포기하였다. 

취직을 하기로 했다. 근무지에서 신문을 보니 <조선일보>에서 기자를 뽑는다는 공고가 나왔다. 

내가 처음부터 신문기자가 되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나에게 신문기자가 제격이라고 권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시사나 국제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신문기자가 되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하우스보이' 생활도 끝내고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일을 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신문사에 입사하면 이리저리 옮겨다니지 않고 집에서 출퇴근하며 어머니를 모실 수도 있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조선일보사에 원서를 냈다. 그때가 1954년 봄이었다. (주석 1)

외국어가 우수하여 무난히 필기와 면접에 합격했다. 필기시험 성적은 전체 2등이었고 외국어 면접도 잘 봐서 필기와 면접접수를 합하면 1등이었다. 공채 제1기였다. 1954년 6월 9일 견습1기로 채용되었다. 외신부로 발령을 받았다. 외신부에는 부장이 없고, 김자동보다 4개월 먼저 입사한 송건호(전 한겨레신문 사장)가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국내에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등 4대 일간지가 주류였다. 상업지를 표방한 <한국일보>는 창간 초기여서 별 존재감이 없었다. 4대 일간지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달랐다. <동아일보>는 편파적이라고 해서 인식이 좋지 않았으며, <서울신문>은 여당지여서 역시 평가가 별로였다. 반면 야당 성향의 조선과 경향이 비교적 인기가 많았다. <한국일보>는 중도 성향이었다. 

발행부수는 <조선일보>가 단연 1위였다. 당시 육칠만 부 정도가 나간 것으로 기억한다. 동아와 경향은 사오만 부 정도였다. <서울신문>도 부수는 적지 않았지만 정부 홍보지라고 해서 별로 쳐주지 않았다. <조선일보>와 <서울신문>은 조간이었고 경향과 동아는 석간이었다. (주석 2)

김자동은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리고 해방 후 귀국하고 곧 벌어진 6.25전쟁으로 일제강점기 국내 언론사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말한다. 

"조선일보도 마침 모집 한다길래 그냥 간 거지. 조선일보 꼭 가야 된다는 생각 가졌던 거는 아니고, 그 당시에 신문으로선 조선·동아가 제일 큰 신문이니까. 서울신문은 부수도 많고 많이 나갔지만 그건 완전히 정부 홍보용이고 조선·동아가 그 당시에 제일 난 신문이었으니까." (주석 3)

<조선일보>는 친일 경제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를 배경으로 민영기·조진태·예종석·송병준·최강·유문환·권병화·서만순 등 36명이 발기인이 되어 1920년 창간하였다. 창간과 복간 전후를 살펴본다. 

조선·동아 이 두 신문은 3·1혁명을 계기로 창간하여 한 때 민족의 '표현기관'을 자부하며 활동하다가 친일지로 전락하고, 1940년 폐간되었다. 이 두 신문의 경우는 언제 복간되었을까. 

한편 1940년 8월 10일 일제 당국에 의해 강제 폐간된 한글 신문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8·15 해방 덕분으로 그 해에 복간되었다. 폐간 당시 총독부에 인쇄시설까지 매도한 탓도 있었지만, 이 신문들의 복간은 <조선일보>가 해방 3개월이 지난 11월 23일에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속간호를 내놓았고, <동아일보>는 이보다 더 늦은 12월 1일에 속간호를 발행하였다. 조선과 동아는 당시 언론계의 일반적인 풍조인 진보적 민주주의와는 달리 반탁의 선봉역을 담당하여 정치적으로 최우익에 섰으며, 이미 창간된 <대동신문>과 더불어 반공 언론의 구실을 했다. 그러나 후일 조선은 김구 노선의 대변지로, 동아는 한민당의 사실상의 기관지로 되었다. 속간 당시 이 두 신문은 별로 영향력이 크지 못하였다. (주석 4)

민족의 힘으로 해방을 쟁취하지 못한 까닭에 해방정국에는 일제에 부역했던 대부분의 언론인들이 아무런 반성이나 자책 없이 활동을 재개하였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출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외가 있다면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 기자, 직원들이다.

<매일신보>는 1945년 9월 24일 〈매일신보사 전종업원은 삼가 3천만 동포와 백만 독자에게 고한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다음은 사과문의 뒷 부분이다.

생각하면 과거 다년간에 걸쳐 그것이 비록 제국주의 일본의 억압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나 그러나 우리가 총독정치의 익찬(翼贊) 선전기관의 졸병으로서 범하여 온 죄과에 대하여는 어떠한 엄정한 비판과 준열한 힐책일지라도 이를 감수할 각오이어니와, 우리는 이 때를 당하여 심기일전, 건국대업의 완성을 위하여 분골쇄신의 성(誠)을 다할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 

우리는 감히 동포와 독자 제위의 양서(諒恕)를 바라는 바이며 동시에 갱생의 도정에 있는 우리들에게 협력과 편달을 아끼지 말기를 절망(切望)하는 바다. (주석 5)

해방정국의 새로운 지배자로 군림한 미군정은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다. 1945년 9월 8일 서울에 진주한 미 제24군사령관 하지는 11일 한국인 기자단과 첫 회견을 갖고 미군정의 언론정책을 밝혔다.

미군이 한국에 들어온 이후의 언론 자유는 문자 그대로의 자유가 왔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에서 얼마나 한국의 언론계가 상처를 받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신문과 언론이 치안을 방해하는 데까지 미칠 때에는 우리로선 적당한 처치를 해야 할 것이다. (주석 6)


주석 
1> <회고록>, 275쪽.
2> 앞의 책, 279쪽.
3> <김자동회장 구술 면담집>, 96쪽, 면답자 한찬욱과 한지헌, 일시 2004년 6월 24일. 장소, 태평로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위원회 사무실, (이 면담록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민주화운동 관련인사 구술자료  수집사업에 제출하기 위한 결과물, 이후 <면담록> 표기) 
4> 송건호, <한국현대언론사>, 17쪽, 삼민사, 1990.
5> <매일신보>, 1945년 9월 23일.
6> 송건호, 앞의 책, 1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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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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