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10 19:17최종 업데이트 22.12.10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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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9일 아침 11시, 수원 호매실동의 집을 나서는 정대일을 서울 경찰청 안보수사대가 둘러쌌다. 국가보안법 제7조 1항을 위반한 혐의로 세 차례 소환장을 보냈지만 출두를 거부했기에 체포한다며 수갑을 채우려 했다. 정대일은 순간 이웃에 뜨일까? 경비아저씨가 지켜 보고 있을까? 신경이 쓰였다. 그의 몸은 구겨져 승용차에 뒷좌석에 실렸다. 차창 밖으로는 쪼그라든 잎 몇 장만 걸친 은행나무가 빠르게 지나갔다.

기독교장로회의 전도사이며 주체사상 1호 박사로서 통일선교를 꿈꾸는 정대일은 그렇게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안보수사대로 끌려갔다. 

<세기와 더불어>를 압수합니다

고난은 지난 여름부터였다. 정대일은 민족사랑방 출판사 김승균으로부터 김일성의 항일운동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판매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대법원은 2011년, 정부 허가없이 방북한 정○○씨의 재판에서 그가 지니고 있던 <세기와 더불어>를 이적표현물이라고 판결했다. 그 후 판례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김승균은 조선노동당 출판사에서 간행된 원본을 바탕으로 이 회고록을 제작해 교보문고·예스24·알라딘 등 국내 대표 서점에 보급했다.


2021년 4월 1일부터 책이 판매된 사실이 뉴스를 타자 서울경찰청은 5월 26일 국가보안법 7조 위반혐의로 민족사랑방 사무실과 김승균 대표 집은 물론 한국출판협동조합과 서점까지 수색해 책을 빼앗아갔다.

'양심수후원회'나 '6·15남측위원회' 같은 시민단체와 종교계 원로 196명은 이 압수가 시대를 거스르는 사상검열이라고 반발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도 출판의 자유에 역행하는 조치라고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자유민주주의연대(NPK)'와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법원에 이 책에 대한 판매·배포금지 가처분신청을 제출했다. 고등법원에 이어 대법원(제3부 노상희대법관)도 2022년 1월, 이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이적표현물'이라는 예전의 판단을 뒤집고 책의 판매를 허용한 것이다. 이 판결은 해방 이전의 항일운동을 남북이 공유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면서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기에 의미가 컸다.

김승균대표는 이에 힘입어 2022년 봄 <세기와 더불어>를 다시 제작했다. 영인본 형태였던 처음과 달리 디자인을 새로 하고 활자를 조금 키워 500질, 4000권을 찍었다. 이때 김승균대표는 <통일시대연구원>의 연구실장을 맡고 있는 '정대일'에게 시중 서점들이 소극적이니 보급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정대일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이 북의 역사에서 근본 바탕을 이루기에 이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보았다. 300질 2400권을 사무실에 들여놓고 8권 한 질을 조금 할인해 알음알음 판매를 해나갔다.
 

주체사상 1호 박사 정대일 정동의 프란체스코 성당 앞에서 ⓒ 민병래


경찰이니 문을 열어주세요

책을 들인지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28일, 전날 일이 많아 서대문 사무실에서 잔 정대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잠결에 받으니 "경찰이다, 사무실 앞에 있으니 문을 열라"고 했다. 정대일은 <세기와 더불어> 때문이려니 직감했다. 그가 전화를 끊기 무섭게 문을 철컥철컥 좌우로 돌리는 소리가 났다. 때맞춰 "여보 경찰이 문을 열어달라는 데 무슨 일이야"하는 아내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원의 집에도 동시에 들이닥친 모양이다. 방학이어서 집에 있었을 딸들이 충격을 받았을 게 걱정이 되었다. 10여 명의 수사관이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컴퓨터와 핸드폰에 대한 압수 수색영장을 내밀었다.

안보수사대는 정대일의 컴퓨터와 핸드폰을 노트북으로 연결해 저장된 정보를 옮겨나갔다. 작업이 길어져 점심 무렵이 되었을 때 정대일은 인근 식당으로 향했다. 어느결에 쫓아 왔는지 경찰 한 명이 식당 한구석에서 사뭇 정대일을 지켜보았다. 수색이 끝난 건 저녁 무렵, 그들은 인부까지 동원해 남아 있는 2천여 권을 빼앗아갔다. 아내가 전한 소식에 따르면 그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모은 북의 원전도 모두 앗아가 버렸다고 했다.

정대일은 식당에서 순대 몇 점에 시든 김치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는 압수목록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국민의힘'조차도 국민의 판단에 맡기자고 논평했고 대법원이 판매허가까지 내린 책에 대해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하고 집행한 안보수사대의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상급심 판결을 무시하고 이런 영장을 내준 판사의 입장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압수수색 이후 소환장이 왔다. 제목은 "반국가단체를 찬양 고무하고 이적표현물을 반포"했다는 것, 정대일은 출두를 거부했고 결국 11월 9일 집 앞에서 체포된 것이다.

주체사상을 공부한 20년의 여정

정대일은 1989년 부산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외할아버지가 목사였고 집안 모두가 고신교단의 교회를 다니기에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고신대학교 신학과에 들어가려 하니 외삼촌들은 철학을 폭넓게 공부해야 신학 또한 깊어진다며 학부에선 철학을 공부하라고 권했다.

부산대 철학과의 학풍은 그의 가치관과 달랐다. 독일에서 마르크시즘을 공부하고 헤겔좌파의 입장에 섰던 윤노빈 교수와 그 제자들이 주도하는 학과 분위기는 사회철학전공을 따로 둘 정도로 진보 성향이 강했다. 전두환을 위한 국가조찬기도회에 정성을 기울이던 교단에서 보수적으로 자란 청년 정대일은 곤혹스러웠다.

또 하나 다가온 충격은 그해 봄 이루어진 "문익환 목사의 방북"이었다. 문익환 목사는 1989년 첫새벽에 북녘 땅으로 가는 의지를 담은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시를 쓰고 그해 3월 25일에 평양으로 갔다. 파장이 컸다. 안기부는 문익환과 일행인 정경모, 유원호, 황석영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문 목사의 자택을 압수수색하고 판문점을 통한 귀국을 불허한다고 밝혔다. 반공단체는 국론분열을 일으킨다고 규탄대회를 열었고 일부 기독교 교단에서는 문목사를 빗대 사탄이나 마귀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장차 대학을 마치고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목사가 되려던 정대일은, 4월 13일 일본을 통해 귀국한 문목사가 구속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문익환목사와 김일성주석의 만남을 곱씹어보았다. 그때 "북에서는 주체사상이 어쩌면 국가종교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그렇다면 문익환과 김일성의 만남은 두 종교가 나눈 대화가 아닐까? 두 종교가 진정으로 포옹한다면 남북교류의 밑돌이 놓이지 않을까? 그때부터 정대일은 주체사상에 대해 강한 탐구심을 가졌다.

부산대 철학과에서 쓴 논문은 '주체사상의 종교적 성격'이었다. 한신대 대학원 신학과에선 '주체사상의 영생관에 대한 신학적 일고찰'이란 석사논문을 썼다. 박사논문은 '북한 국가종교의 이해'였다. 1989년부터 그는 20여 년 가까이 주체사상을 연구했고 덕분에 그는 남한에서 주체사상 1호 박사가 되었다.

난관은 많았다. '주체사상'의 '주'자만 꺼내도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는 현실도 조심스러운데 국내에 주체사상 연구자가 거의 없었다. 일부 대학원의 북한학과에선 정치와 경제에 대한 강의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조선노동당 출판본을 비롯 주체사상에 대한 '원전'은 모두 특수자료로 분류돼 일반인은 접근조차 어려웠다.

그가 해결책으로 찾은 곳이 한국학 중앙연구원. 1978년 박정희가 세워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출발한 이곳은 설립목적이 "국민정신교육을 체계적으로 계발, 진흥하는"데 있듯 체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이론가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국책연구기관이기에 학비도 면제받고 기숙사도 제공받았다. 당연히 도서관에는 북에서 출간된 모든 자료가 갖춰 있었다. 그는 부산대나 한신대에서 풀지 못했던 갈증을 해결했다. 마음껏 연구했고 보수적인 예장통합의 목사, 이상훈 교수 밑에서 박사논문을 완성했다.
 

통일선교를 꿈꾸는 정대일 박사 동숭동의 낙산교회에서 ⓒ 민병래


먼저 온 통일, 탈북 청소년을 만나며

주체사상을 공부하면서 정대일은 경동교회에서 운영하는 탈북청소년대안학교인 '똘배학교'에 교사로 참여했다. 주체사상을 공부하기에 탈북청소년과 누구보다 얘기가 잘 통할 것 같았다. 탈북민은 통일부 기관인 '하나원'에서 12주에 걸친 적응훈련을 받고 약간의 정착금을 손에 쥐고 나오나 남쪽에서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다. 특히 '고난의 행군' 시기에 떠나온 청소년은 거의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터라 더 어려웠다.

그는 '똘배'에 이어 '셋넷'이라는 학교에서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사노릇을 했다. 청소년대안학교이나 서른이 넘은 어른도 배우러 왔다. 정대일은 생업도 뒤로 미룬 채 이들을 "먼저 온 통일"이라는 마음으로 대했다.

정대일은 마침내 2011년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뜻을 펼칠 수 없었다. 이명박 정부의 5·24조치, 박근혜의 개성공단 폐쇄조치 이후 남북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니, 남북교류에 이바지하겠다는 그의 소망은 뜬 구름이었다.

숨통이 트인 계기는 2018년 4.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문재인·김정은의 회담이었다. 2017년, 한반도의 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북이 핵실험과 ICBM인 화성-15형의 발사에 성공하면서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자 긴장은 한껏 고조되었다. 이런 정세 아래서 열린 판문점회담은 남북관계를 단숨에 평화모드로 바꿨다. "연내 종전선언을 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한다"는 선언이 발표되었다. '9·19 군사합의' 같은 실천적 조치도 뒤를 이었다.

이런 흐름을 보면서 정대일은 마음이 바빠졌다. 개성공단과 금강산이 다시 열리는 것은 물론 북미간 평화협정과 수교 또한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남북관계에 순풍이 불면 할 일이 많을 터. 그는 서둘러 향린교회 담임에서 퇴임한 조헌정목사와 함께 '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를 만들었다.

정대일은 연구실장을 맡아 '주체사상 100문 100답'을 쓰고 '에큐메니안'이란 매체에 이를 연재했다. 머지않아 통일선교의 기회가 올 터인데 기독교인이 북에서 국가종교로서 기능하는 주체사상을 이해해야 제대로 된 선교가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이슬람 지역에 가려면 이슬람을 알아야하고 힌두 지역에 가려면 힌두를 공부해야 하는 것처럼.

그는 '100문 100답'에서 주체사상과 그리스도교의 유사성을 밝혔다.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머리로 하고 교회가 몸체이며 모든 신도가 지체처럼 연결되어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다고 신앙공동체를 설명하는 것처럼 주체사상도 수령을 뇌수로 당을 중추로 하여 인민대중과 함께 사회주의대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공동체 관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모심으로 사후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주체사상은 수령과 당의 영도를 통해 생물학적 생명은 끝나도 인민대중의 사회정치적 생명은 대를 이어 계속된다는 영생관을 갖고 있다."


이렇게 그는 그리스도교와 주체사상이 만날 수 있는 접점,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 대화의 바탕을 마련하려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주체사상 대화연구소'에서 한발 더 나아가 <통일시대연구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터넷매체 '통일뉴스' 발간에 힘을 기울였다. 남북의 평화교류와 번영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무언들 못하랴 하는 마음이었다. <세기와 더불어> 판매도 그런 생각이었다. 회원들의 후원비가 많지 않아 겨우 최저임금으로 아이 넷을 키워야 하지만 기꺼이 감내해왔다.

주체사상 소장학자 100명의 시대는 치기 어린 꿈일까?

11월 9일 아침 신정동에 끌려간 정대일은 폐쇄 공간에서 조사를 받았다. 모든 형사사건 피의자가 개방된 조사실에서 심문을 받으나 국가보안법 피의자에 대한 밀실조사 관행은 여전했다. 그는 민변의 심재환 변호사 도움을 받으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국가보안법에 저항하는 몸짓이었다.

정대일은 이날 밤 9시경 풀려났다. 당일 신정동의 서울경찰청 안보수사대 앞에서는 한국기독교 장로회총회가 "사회선교사이며 전도사, 주체사상연구자인 정대일의 체포는 학문활동, 출판활동에 대한 탄압이다"라고 반발하며 기도회를 열었다.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행동본부'도 "'헌법재판소'에서 국가보안법 7조의 위헌여부에 대한 공개변론이 이뤄지는 때 이런 탄압을 하는 것은 '국가보안법' 유지를 위한 책동"이라고 규탄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기독교 장로회 총회의 기도회모습 양천구 신정동 안보수사대앞이다. ⓒ 에큐메니안(ecumenian.com)제공

 
북에서는 1967년 김일성이 발표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과도기와 프로레타리아 독재문제에 대하여'라는 5·25교시 이후, 주체사상이 신성시되고 정치종교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갖고 있던 책을 불태우거나 도서관에 기증하라고 압박을 받았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물론 중국 독일의 고전철학 서적까지 불태워졌다.

1974년 김정일이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발표하고 나서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유물론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김일성주의가 대신했다. 같은 시기, 남쪽에서는 박정희가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로 주민을 옥죄고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사소한 저항마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으로 처단했다.

남북 당국이 사상을 통제하고 하나의 주의를 강요함에 따라 휴전선만이 아니라 남북 주민의 마음에도 수십 년간 철조망이 쌓여왔다. 정대일은 이런 마음속 분단, 마음속 철망을 녹이고 싶었다. 그리스도교와 주체사상이 만나서 대화하면 통일선교가 이루어지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 남북 통일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주체사상을 연구하는 젊은 학자 100명을 양성하면 어떨까? <세기와 더불어>를 동네 도서관마다 비치하고 자유롭게 돌려보면 과연 문제가 될까? 과장과 조작이 넘치는 실록인지 항일투쟁의 엄연한 한 부분인지는 우리 역사학계에서 치열하게 검증하고 남쪽 주민이 판단하면 될 일이다. 나라가 독서생활까지 참견하는 건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다.  

서울경찰청 안보수사대는 정대일에 대한 수사를 마친 상태다. 국가보안법을 걸어 정대일을 과연 검찰로 송치할까? 검사들은 그를 기소할까? 그리된다면 판사는 정대일에게 국가보안법으로 죄를 물을 것인가? 정대일이 재판을 받는다면 '사상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 선교의 자유'를 다투는 역사의 법정이 될 것이다. 2022년 오늘 우리 한국사회의 사상적 역량을 묻는 법정이 될 것이다.

<못 다한 이야기>
① 서울경찰청 안보수사대는 예전으로 치면 대공관련 업무를 전담한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나 서울시경 대공분실과 같은 조직이다
② 평생 교회를 섬겨온 정대일의 직책은 많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출신으로 현재 한국기독교장로회 평화공동체운동본부 전문위원,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선교연대 평화통일위원장, 기독교사회선교연대 평화통일위원장,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 종로시찰 낙산교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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