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01 10:39최종 업데이트 24.01.0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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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기자말]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임성욱 그는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특임강의교수다 ⓒ 민병래

 
2006년 1월부터 KBS에서 상영된 <서울 1945>는 최고 시청률 17.9%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71부작으로, 해방 후 격동의 순간을 다룬 이 드라마 34회차에는 '조선정판사 사건'을 다룬 장면이 펼쳐진다. 무장경찰이 '위조지폐범'을 잡겠다고 인쇄소인 조선정판사와 조선공산당 본부가 입주해 있던 소공동의 근택빌딩을 습격하면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진다.

2002년 7월부터 124부작으로 방영된 SBS의 <야인시대>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조선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찍고 있는 현장"을 경찰이 급습하고 붙잡힌 피의자들은 위조지폐가 수북이 쌓인 책상 앞에서 조사를 받는다.

<서울 1945>와 <야인시대>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제대로 그린 것일까? "조선공산당이 남한 시장 질서의 교란과 파괴를 목표로 삼았다"는 <야인시대>의 극중 해설은 과연 진실일까?
 
분단의 기원을 찾고 싶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미군정 공보부가 1946년 5월 15일 공식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발표의 요지는 이관술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간부와 조선정판사 사장 박락종 등이 1945년 10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총 6회에 걸쳐서 1200만 원, 지금으로 치면 수백억 원이나 되는 위조지폐를 찍었다는 것이다.

이후 4개월 동안 열린 재판을 통해 1946년 11월 28일 열 명의 피의자는 모두 10년부터 무기징역까지 중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2심제에서) 이들은 모두 상고했지만 상고 신청 자체가 기각되어 1947년 4월 11일 판결이 최종 확정되었다.

그 후 단독 선거 단독 정부 반대 투쟁과 한반도의 전란 속에서 이 사건은 '잊힌' 일이 되고 말았다. 물론 역사학계에서는 "토지 개혁이 지지부진하고 쌀값을 비롯해 물가가 치솟아 민심이 나빠지자 미군정이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경제 파탄의 책임을 조선공산당에 씌운 조작 사건이다"라는 문제 제기가 꾸준히 있었다. 하지만 관련 자료를 깊이 있게 연구한 학술적 주장은 아니었다.
 
2014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마친 임성욱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로 삼겠다고 제안서를 냈다. 이때 지도교수 반병률은 "선행연구로 무엇을 보았는지, 새로운 사료로 무엇을 분석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반 교수는 임성욱의 답변을 듣고 흔쾌히 써보라고 했다. 임성욱은 "주제가 민감하고 연구 결과에 따라 파장이 클 수 있지만 '학문적 양심'에만 충실해서 논문을 쓰라"는 격려로 받아들였다. 주제가 예민해서인지 앞서 나온 연구는 고작 석사 논문 한 편과 학술지 논문 한 편, 디딤돌로 삼기에는 양이 너무 적어 개척하는 마음으로 연구를 해야 했다. 
 
임성욱은 서른여덟인 2011년,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많은 나이였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고 학위를 따도 역사학과가 없어지는 실정이니 교수는커녕 강사 자리도 힘들 터인데 이를 무릅쓴 결정이었다.

그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다. 해방 후 불과 3년 만에 남북에서 분단 정부가 수립되고 2년 만에 내전이 일어나 무려 삼백만이나 희생된 까닭을 알고 싶었다.

임성욱이 처음부터 분단 문제에 관심을 두었던 것은 아니다. 2001년 대학 시절 교환학생으로 멕시코에 다녀온 게 계기였는지도 모른다. 중남미 어디엘 가도 "너는 일본인이지" 아니면 "중국에서 왔냐"고 물었다. 그 넓은 땅 어디에나 일본기업이 진출해 있고 문화교류도 활발해 중남미 주요 대학에 일본어학과가 개설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국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중남미대륙 어디에도 한국어학과가 없었다.

그는 교환학생을 마칠 때 한국을 알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뜻이 통해서인가?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코이카'라 불리는 한국국제협력단에 들어갔다. 외교부 산하의 준 정부기관이어서 고용도 보장되고 한국을 알릴 기회가 많았다.
 
코이카에 근무하면서 임성욱의 생각은 한발 더 나아갔다. 한국을 알리겠다는 내가 한국어를 제대로 아나?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있게 알고 있나? 그런 질문 끝에 그는 한국어교육과 한국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임성욱은 직장을 그만두고 석사 과정에 들어갔다. 열심히 했고 한국어교육 2급 교사 자격증도 땄다.

그런데 한국학을 공부하면서 그의 가슴 속에 더 큰 의문이 생겼다. 바로 분단과 내전 문제였다. 이 비극의 원인을 찾으면 거꾸로 통일로 가는 지름길을 찾을 것 같았다. 늦었지만 아직 30대 청년, 그래서 부모님과 친구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서른여덟에 박사 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제2회 공판정의 모습 서 있는 사람은 조선공산당 당원이며 조선정판사의 서무과장이었다. ⓒ 임성욱제공

 
임성욱을 사로잡은 의문들
 
임성욱은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포부 그대로 '1945~1948 통일 독립 국가 건설 운동 연구'로 논문 주제를 잡았다. 하지만 범위가 너무 넓어 분단국가 수립의 분기점이 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로 방향을 바꿨다. 임성욱은 논문 주제를 정한 후 가능한 많은 사료를 모았다.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 등 어디든 갔다. 어떤 자료는 복사가 되지 않아 일일이 손으로 옮겨썼다. 또 해방 직후 신문 자료는 인쇄 상태가 좋지 않아 글자를 해독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렇게 모은 사료를 분석하는 과정은 거듭거듭 질문하는 나날이었다.
 
우선 그를 사로잡은 의문은 '5월 8일 이른바 '피의자'를 체포하고 수사가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왜 미군정 공보부가 5월 15일 직접 사건의 개요를 발표했을까?'였다. 1946년 5월 8일, 정오 조선 제1관구 경찰청과 본정경찰서는 무장경관을 동원 "위조지폐를 찍었다"며 조선정판사를 습격했다. <야인시대>에서 묘사한 것처럼 '위조지폐'를 인쇄하고 있는 상태는 전혀 아니었다. <1945 서울>에서 그린 것과 같은 총격전도 없었다. 조선공산당 당원이며 조선정판사 직원 10여 명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을 뿐이다.  
 

경향신문사라고 쓰인 건물이 근택빌딩이다. 조선정판사 '위폐'사건 당시 이 건물 1층에는 조선정판사 2층에는 조선공산당 3층에는 해방일보사가 입주해있었다. 현재 위치는 중구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의 맞은 편 부지다. ⓒ 임성욱제공

 
이는 장안에 큰 충격을 불러왔고 여론의 관심은 들끓었다. 조선공산당은 즉각 반발했고 이관술과 권오직도 성명을 내 "이 사건은 전면적인 허위"라고 주장했다. 수사당국이 어떻게든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군정은 수족 같은 조선 제1관구 경찰청장 장택상이나 일선 수사 담당인 이구범 본정경찰서장이 해도 되는데 이들을 제치고 직접 범죄 개요를 발표했다.

조선 경찰의 최고 책임자인 조병옥 경무부장은 "아직 수사 중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이 발표한 것을 납득할 수가 없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결정권이 없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해 뭔가 흑막이 있음을 내비치기까지 했다.

게다가 발표내용에 허점이 많았다. 5월 15일은 위조 지폐 금액을 삼백만 원이라 했다가 다음 날 구백만 원으로 정정하고 7월 19일 기소할 때는 천이백만 원으로 다시 바꾸었다. 또 범행 장소를 조선정판사가 입주해 있는 근택빌딩 지하라고 했는데, 조선정판사가 근택빌딩 1층에서 사무를 본 건 맞지만 인쇄시설은 부지 내 근택빌딩 옆의 공장에만 있었다. 이렇듯 발표 내용을 보면 금액이나 범죄 장소 같은 기초 사실조차 많은 오류가 있었다. 당연히 반박이 잇따랐고 미군정과 경찰은 제대로 해명이나 답변을 하지 못했다.

미군정은 발표를 끝내고 5월 18일 마치 준비했던 것처럼 CIC 소속 미군과 미헌병대를 동원해 근택빌딩을 포위했다. 2층에 있던 조선공산당과 3층의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를 압수수색하고 건물 출입을 통제했다. 5월 19일에는 아직 수사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조선정판사를 폐쇄하고 해방일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조치를 내려 사실상 폐간을 시켜버렸다.

박헌영의 항의를 받은 미군정은 조선공산당과 관련이 없다고 하면서도 해방일보의 속간을 허락하지 않았고 급기야 5월 27일에는 조선공산당에 근택빌딩에서 48시간 내에 떠날 것을 명령했다.

한편 반동 친일 세력은 발표가 나자마자 조선공산당이 경제를 파괴한 주범이라고 열을 올려 비난하고 '조선인민보'를 습격하는 등 테러에 나서기 시작했다. 조선공산당은 기관지를 잃어버리고 거리에 나앉는 상황이 되었으니 '파렴치범' '경제파괴범'이라는 공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미군정이 직접 발표를 한 것" 외에도 임성욱은 공소 사실이 불분명한 점에 대해 큰 의문을 품었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는) 조재천 검사는 공소장에 1945년 10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총 6회의 범행을 기록했는데 1회차 범행의 날짜는 못 박지 못하고 10월 하순이라고 두루뭉술하게 적었다. 총 6회의 범행 중 1회차의 범행이 제일 중요하고 피의자들이 실제 범행을 했다면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부분일 텐데 이것이 엉성한 상태로 기소된 것이다. 당연히 이 부분은 재판 과정에서 "날조된 범죄임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큰 공격을 받았다.

더더욱 핵심 피의자가 범죄 현장에 없었다는 증언과 증거가 쏟아졌다. 이관술은 10월 하순에 평양에 갔었다며 동행인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조선정판사 사장 박락종은 10월 24일부터 부산으로 출장을 갔던 여러 증거, 여행지의 숙박 기록과 자신의 움직임을 보도한 <민주중보>의 11월 3일 자 '진주판' 그리고 11월 6일 자 '부산판'을 내놓았다. 검찰의 공소가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결국 (훗날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양원일 판사는 이관술과 박락종의 알리바이를 깰 수 없어서 공소장이 변경되지 않았는데도 10월 중순이라고 범행 일시를 자기 맘대로 바꿔 판결해 버렸다. 이것은 상고심으로 가면 가장 큰 쟁점이 될 부분이었는데 상고 신청이 기각됨으로써 이 쟁점은 다퉈볼 기회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
 
- 2편 <보수 진영 누구도 반박 못한 미국의 조작 범죄>(https://omn.kr/26we5)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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