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저고리 칼질 사건은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다. 재일동포 민족극단 '달오름'의 1인극이다. 주인공은 강하나.
김지운제공
구량옥이 이 호소문을 마주하기 몇 해 전부터 길거리에서 조선학교 여학생 교복에 칼질을 하는 테러가 일어났다. 남학생 교복과 달리 여학생 교복은 눈에 잘 띄는 치마저고리여서 표적이 되기 쉬웠다. 일본 극우의 이런 소행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여러 번 일어났다.
하지만 경찰은 수사 시늉도 내지 않았다.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에선 심각하게 사태를 받아들였으나 뚜렷한 방안이 없었다. 고민 끝에 나온 대안이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등하교 시에는 일본 학교 여학생과 비슷한 교복을 입고 학교 안에서만 치마저고리를 입는 안이 거론되었다. 그때 교토조선 제1초급학교에 다니던 구량옥은 중급학교에 올라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치마저고리를 입는 언니들이 부러웠다. 옥잠화보다 흰 저고리, 흑단보다 짙은 검정 치마, 그 아래로 살짝 드러난 하얀 종아리에 곱게 땋은 머리까지. 그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곤 했다. 구량옥은 치마저고리를 입지 않는다는 해결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교무실 문을 열었다.
"우리가 무슨 나쁜 짓을 했나요. 어째서 자기를 숨기듯 살아야만 하나요. 나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니겠습니다. 칼질이든 폭탄이든 맞겠습니다."
어린 구량옥의 매서운 항의에 선생님들은 얼어붙었다. 그렇게 구량옥의 초급학교, 중급학교 시절은 어수선했다.
구량옥 자신도 지하철에서 험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중급학교 2학년 어느 날 하굣길, 긴테츠(近鐵電車)노선의 단바다시(丹波橋)역에서 순서대로 지하철을 타려는 때 뒤에서 어떤 중년의 일본인이 "조센징 주제에 먼저 타"하면서 땋은 머리를 잡아당겼다. 구량옥은 뒤로 넘어질 뻔했다. 승강장에 있는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고 열차 안의 승객도 머리를 내밀었다.
조선학교 학생들은 이런 일을 자주 당했다. 선배 한 명은 술에 취한 일본인이 "너 조센징이지?"라며 계단에서 미는 바람에 크게 다칠 뻔했다. 겁에 질려 한동안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등하교를 했다. 또 다른 선배는 버스에서 우산으로 머리를 맞기도 했다.
구량옥은 내게도 결국 이런 일이 닥쳤구나 생각하며 조그마한 어깨에서 나온 팔로 그 일본인의 손목을 잡았다.
"역무실로 갑시다."
순간 중년 일본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호기심으로 쳐다보던 승강장의 사람들은 구량옥의 용기에 놀라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일본 남자를 역무실로 끌고 갈 때 소녀 구량옥의 가슴은 벌렁거리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조선학교 여학생의 등학교길은 이처럼 전쟁이었다. "조심하세요" "복장을 단정히 하세요" 선생님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구량옥과 친구들은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숨죽이고 몸을 움츠렸다. 승강장이건 열차 안이건 손가락질이 목덜미에 느껴졌고 "조센징이야"하는 수근거림이 귀를 파고들었다.
이게 우리의 운명이구나, 우리는 천대받아야만 하는 존재인가 체념이 쌓여갈 때 마주한 오사카 변호사회의 호소문 한 장이 구량옥에게 구원의 손길처럼 다가왔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일본 사회에서도 우리 조선인을 존중하는 사람이 있구나, 역시 변호사는 다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량옥은 이런 글을 쓴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다. 또한 변호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그날 구량옥은 변호사가 되어 재일교포의 처지에서 일본의 법을 다루고 동포 사회에 힘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단번에 사법고시 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