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01 10:58최종 업데이트 24.05.0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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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편집자말]
- 1편 <붉은 반점투성이... '조선소밥' 15년이 그녀에게 준 훈장 https://omn.kr/28ibc>에서 이어집니다. 

재계약을 거부당하고

그런데 정인숙과 나윤옥이 작업과정이나 화장실 같은 문제보다 더 크게 느끼는 고통이 있으니 바로 일터가 늘 벼랑 위에 놓여 있다는 것.


"2020년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문자가 왔어요. 18개월이나 납부가 밀렸다고. 다음 날 사장을 찾아가 싸웠어요. 국민연금은 해결이 되었는데 회사를 폐업할 테니 퇴직금은 노동부에서 체당금으로 받으라고 하더군요.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그날로 노조에 가입했죠. 거제·통영·고성의 조선소 하청노동자가 만든 전국금속노조 거통고조선하청지회에 들어갔어요."

나윤옥의 얘기다. 정인숙도 마찬가지다. 조선소 바닥에서는 일당직도 1년마다 재계약을 한다. 정인숙은 2022년 4월, 도장을 찍기 전 임금인상 투쟁에 참가한 것이 꼬투리 잡혀 재계약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와 더불어 아홉개 도장 하청업체 상당수 노동자에게도 이런 조치가 내려졌다.

한화와 하청업체는 요 몇 년 사이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스리랑카 등 다양한 국적의 이주노동자를 늘리면서 "너희 자리를 언제라도 대신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주노동자는 보통 E-9과 E-7 비자를 받아 한국 땅을 밟는다. 이 비자를 받은 노동자는 자기 마음대로 이직도, 지역이동도 할 수 없다. 임금 수준도 현지 계약과 달리 여기 오면 최저임금 수준으로 계약을 한다. 이들은 한국에 오기 위해 송출업체에 천만 원 안팎의 수수료를 낸 상태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 일할 수밖에 없다.

2016년 조선업 구조조정 전 20만 명에 이르렀던 숙련노동자가 떠난 자리를 조선업계는 이런 강제노동, 취업사기와 같은 방식으로 메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정인숙과 나윤옥의 신분은 늘상 위태롭고 일터는 하루하루가 불안했던 것이다.
  

한화오션 도장노동자 정인숙 그는 거제 조선서에서 15년째 도장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 민병래

     
51일 투쟁으로 신세계를 맛보다

재계약을 거부당한 정인숙은 그날로 숨어있던 조합원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노조원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2022년 6월 2일에 시작된 51일 투쟁에 적극 참여했다. 거통고조선하청지회는 임금 30% 인상과 고용안정 등을 요구했다. 얼핏 보면 30%는 많아 보이나 사실은 원상회복을 바라는 요구였다. 2016년 이후 대우조선은 조선업이 불황이라며 임금을 깎고 상여금을 줄여나갔다. 조선업 경기가 좋아지면 되돌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조선업이 다시 호황을 맞았으나 임금과 상여금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51투쟁은 7~8년에 걸쳐 깎인 임금과 상여금을 되돌리는 몸부림이었다. 

파업투쟁의 열기는 높았다. 그동안 쌓였던 비정규직의 설움, 일당 노동자의 한이 쏟아졌다. 코로나시절 정규직은 쉬면서도 급여를 받았으나 비정규직과 하청노동자는 그렇지 못했다. 4대 지원금(귀향비, 휴가비, 격려금, 성과급)은 원청에게만 돌아가고 하청노동자에겐 어쩌다 닭모이만큼 돌아갔다. 독감예방주사비 지원도 직영 정규직에게는 2만4000원이 전액 지원되지만 하청은 50%만 지급되었다. 물론 일당직은 이것마저 제외되었다.

2022년 당시 거제 대우조선소 현장에 1만 2천여 노동자가 있었다. 거통고하청지회의 조합원은 150명 안팎, 1%에 불과한 숫자였다. 대우조선은 해볼 테면 해봐라, 하청업체가 해결할 문제다, 자신과 관련 없다며 콧방귀도 안 뀌었다.

6월 2일 부분파업으로 시작한 51투쟁은 조선소 야드에 여덟 곳 거점을 확보했다. 발판이 없으면 조선소의 모든 작업이 멈추니 발판 쪽에 두 군데를 확보하고 도장 쪽에도 농성장을 마련했다.

나윤옥은 발판기자재업체 대보의 자재가 쌓여있는 서문적치장으로 배치를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동료노동자에게 함께 싸우자고 외쳤다. 6월 20일 나윤옥에게 시련이 닥쳤다. 그날은 대우조선 사측에서 경찰투입을 요청하며 긴장이 고조되던 날이었다. 김영수 거통고조선하청지회장이 출근선전전을 마치고 선각삼거리에 있는 농성장에 합류하려고 서문으로 들어갈 때 직영의 관리직 등이 막고 나섰다.

나윤옥은 사진을 찍으며 조합원 20여 명과 함께 이 저지선을 뚫어보고자 용을 썼다. 그때 누군가가 나윤옥을 잡아 던졌고, 그 바람에 나뒹굴고 말았다. 허리를 다쳤는지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는 직접 전화를 걸어 119를 불렀다. 회사 앞 대우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별일 없으니 집에 가서 몸조리를 잘하라고 했다. 하지만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나윤옥이 떼를 쓰다시피 해 MRI를 찍어보니 허리뼈 일부에서 압박골절이 발견되었다.

그는 40여 일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가 퇴원했을 때는 51투쟁이 끝난 상태여서 동지들에게 미안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외려 등을 두드리며 그를 위로했다. 입원했던 기간은 산재처리가 안 돼 가해 회사로부터 병원비만 받았다. 파업투쟁에 참가한 덕에 생활의 타격이 컸으나 나윤옥은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는 걸 위안으로 삼았다. 
 

탱크안의 발판작업 ⓒ 거통고조선하청지회

 
정인숙은 51파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했다. 그가 맡았던 거점은 'N안벽' 그곳에는 LNG선, VLCC선 많은 배가 건조되고 있었다. 여기서 작업하는 노동자를 상대로 선전활동을 했다. 생애 첫 파업, 신세계였다. 연대라는 게 뭔지도 몰랐는데 금속노조위원장과 민주노총위원장을 만나고 악수도 했다. 이름도 가지가지인 시민단체의 격려 방문에 가슴이 뛰고 설렜다. 경찰 헬기가 농성장을 맴돌아도 노조 깃발은 내려가지 않았다. 장대비가 쏟아져도 서로의 손을 놓지않았다. 장승포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밤을 세우고 새벽 안개속에 골리앗 크레인이 모습을 드러내면 웅크린 몸을 일으켜 팔부터 치켜들었다.

노조의 투쟁기세가 드높고 생산일정에 차질이 생기자 대우조선은 6월 12일부터 정규직 직반장으로 구성된 '현장직반장 책임자연합회'를 동원했다. 2~3백 명씩 몰려와 농성장 천막을 찢고 절단기로 철사와 전선을 잘랐다. 여러 곳으로 나뉜 조합원은 수에서 밀렸다. 몸싸움은 잦아지고 자칫 모든 거점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 6월 22일 유최안이 결단을 내렸다. 30만 톤급 유조선 배 밑바닥에 0.3평 쇠창살을 만들어 자기 몸을 가두고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고 호소했다. 이에 발맞춰 노조 간부 여섯 명도 탱크의 난간으로 올라가 고공 농성을 벌였다.

유최안의 모습은 강렬했다. 거제시는 말할 것도 없고 전국에서 응원의 열기가 넘쳐나고 희망버스가 달려왔다. 금속노조는 세 차례에 걸쳐 연대집회를 펼쳤다. 하지만 파업의 결과는 고작 임금인상 4.5%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지 얼마 안 돼 서슬이 퍼렇던 시절, 정부는 경찰을 투입하겠다고 엄포를 놨고 극우 언론은 불법파업이니 수출 차질이 막심하다느니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대우조선의 정규직 노동자는 기대와 달리 하청노동자의 손을 잡는 데 인색했다. 아무리 연대 투쟁의 열기가 뜨겁고 응원의 목소리가 커도 사내에서 고립된 소수의 거통고지회가 이 엄청난 압력을 이겨내긴 어려웠다. 결국 '손배소송' 등 적지 않은 불씨를 안은 채 투쟁의 깃발이 내려졌다.
 

유최안이 쇠창살에 자신을 가둔 모습 이 모습은 전국 노동시민단체의 연대투쟁을 불러일으켰다. ⓒ 금속노련

  
정인숙은 15년에 이르는 도장공 생활 동안 하청업체가 거듭 폐업해서 대여섯 업체를 전전했다. 지금은 하청의 본공에서 비정규직으로 시급에서 일당직으로 처지가 바뀌었다. 당연히 그에게는 하청의 본공이 받는 떡값 휴가비가 없다. 잔업을 안 하면 하루 13만 3천 원의 일당이 수입의 전부다. 그런데 51투쟁의 합의안에는 일당직에 대한 어떤 배려도 없었다. 물론 투쟁기간인 51일의 임금도 받을 수 없었다. 합의가 이뤄진 날, 정인숙의 눈가는 촉촉했다.

거제에 내려와 이태가 되었을까? 새벽 6시 30분까지 출근해 밤 10시까지 잔업을 하는 생활이 이어지던 때 남편을 따라갔던 아들이 거제로 내려왔다. 별 보고 퇴근하고 토요일까지 일해야 하는 그로서는 한참 사춘기의 아들을 따뜻하게 돌볼 수 없었다. 낯선 곳에 온 아들은 오랜 시간 방황했다. 속이 터질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 어려운 시절이 눈앞에 어른거렸던 것이다.

51투쟁이 끝난 후 정인숙은 1년여 동안 가슴앓이를 했다. 노조 사무실 근처를 맴맴 돌면서 막상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도장일은 매일 잔업에 토요일까지 일하고 자신이 15년 경력의 베테랑이니 정년까지 일할 수 있는 걸 위안으로 삼으며 마음을 추스렸다.

정인숙, 나윤옥의 희망은 정년까지 일하는 것

이 험하고 사나운 조선소에서 10여 년 이상 버텨온 정인숙과 나윤옥! 앞으로 두 노동자의 바람은 무엇일까? 한화의 하청업체 웰리브에서 근무하는 세탁노동자 김영미는 이렇게 말한다.

"일 끝나고 커피 한잔 나누는 시간이 좋아요. 산재로 쉬고 있을 때 동료들이 안부전화를 많이 해줬어요. 같이 일하는 순간이 행복해요. 일을 마쳤을 때 뿌듯하고요."

이는 정인숙과 나윤옥도 다르지 않다. 롤러를 잡고 동료들과 함께 일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용접으로 난 불똥 자국, 파워작업으로 생긴 상처투성이를 없애고 도장으로 옷을 입혀 배를 떠나보낼 때 정인숙은 벅찬 감동을 느낀다. 자신이 만든 배가 파나마운하나 호르무즈해협 등 가본 적도 없고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는 바다를 누빈다는 게 신기하다.

그는 "조선소에서 새로운 인연도 만나고 능력도 인정받고 삶이 많이 변했어요"라고 말한다.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많아져 행복하기에 자신도 남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려 한다.

나윤옥도 그렇다.

"충남 공주에서 아홉 살까지 살았는데 어릴 때 감자를 굽다가 불씨가 옮겨붙어 집을 몽땅 태웠어요. 아빠는 홀라당 타버린 집을 보고 너희가 다치지 않았으니 됐다고 하셨지요."

나윤옥의 가슴에 새겨진 큰 사랑이다. 그는 아빠의 넉넉한 품 덕분에 이혼의 충격도 현장의 어려움도 이겨냈다. 그는 "정년까지 일하고 싶어요. 일하는 동안 노동자의 목소리를 내고 싶습니다. 노동이 존중받는 평등한 세상이 와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
  

한화오션의 노동자 나윤옥 그는 발판설치와 해체, 하부감시를 하고 있다. ⓒ 민병래

 
정인숙과 나윤옥, 그들은 수직사다리를 오르내리며 배를 꾸미고 굵은 팔뚝으로 발판을 이어나가 하늘길을 만들었다. 어느덧 거대한 배가 꼴을 갖춰 큰 바다로 떠날 때 그 모습은 듬직한 아들이고 늠름한 장수였다. 어느 결에 마음 깊이 자리한 연인이었다. 정인숙과 나윤옥은 이 노동을 사랑했다. 옥포항의 이 땀과 눈물을 사랑했다.

정인숙과 나윤옥의 소박하고 건강한 꿈, 응원받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1)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이은주활동가의 지원으로 정인숙,나윤옥 두 노동자를 인터뷰하고 글의 감수를 받았다. 깊이 감사드린다.
2) <조선소, 이 사나운 곳에서도>(코난박스, 마창거제 산추련기획) 책에 소개된 열한 명 여성노동자의 육성을 참고해 이 글을 구성했다.
3) <울산 함성> 김정호 발행인이 현대중공업 등 울산지역 조선소 노동자의 현실을 감안, 많은 도움말을 주었다. 역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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