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01 10:40최종 업데이트 24.01.0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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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편집자말]

소장학자 임성욱의 모습 그는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특임강의교수다 ⓒ 민병래

 

- 1편 <미국이 조작한 위조지폐 사건이 내게 말을 걸었다>(https://omn.kr/26we4)에서 이어집니다.

임성욱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연구하는 내내 학자의 양심, 연구의 윤리에 충실하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조사와 연구가 어느 정도 진전되었을 때, 그는 미군정의 조작 범죄가 확실하다는 판단을 했다. 하지만 연구 막바지까지 사료와 증거가 전하는 말에 귀 기울이며 열린 자세를 유지했다. 미군정의 발표와 대법원 최종 판결을 뒤집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려면 한 치의 오류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논문 초안을 쓸 때 임성욱은 잠시 '유족의 목소리를 들어볼까' 고민했다. 주모자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이관술의 막내딸인 이경환 할머니를 만나면 혹시 사료가 들려주지 못한 '비밀'이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더라도 유족이 자신에게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또 유족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유족의 아픔에 마음이 쏠려 연구 윤리를 저버리지 않을까, 유족을 편드는 쪽으로 집필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결국 그는 유족을 만나는 걸 포기하고 논문이 발표된 이후에나 찾아뵙는 걸로 마음을 정했다.   

연구가 깊어질수록 임성욱은 더 많은 의혹을 접했다. 공소에 따르면 이관술과 박락종 등 피의자들은 100원권으로 12만 장이나 되는 엄청난 '위조지폐'를 찍었다. 그런데 검찰 측은 사용된 것이건 사용되지 않은 것이건 단 한 장의 위조지폐도 증거로 제출하지 못했다. 검사가 제시한 33장의 위조지폐는 이미 조선은행에서 자료로 보관하고 있던 별개의 것이어서 직접 증거가 될 수 없었다. 그 외 인쇄기, 종이, 잉크는 통상 인쇄소에서 사용하는 물품이니 증거가치가 없고 위조지폐를 찍는 데 꼭 필요한 인쇄원판조차 공판에 제출하지 못했다. 범죄 사실은 엄청난데 이렇듯 공소 내용은 허술하고 직접 증거가 하나도 없는 기소였다.
 
날조라는 여론이 비등하고
 
당연히 법정 안팎에서 미군정의 날조라는 여론이 높아졌다. 위기를 느낀 미군정은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해 미군정을 비판하는 <조선인민보>, <중앙신문>, <현대일보> 등 좌익 신문을 폐간하며 언론 탄압에 나섰다.

재판 과정 또한 불공정하기 짝이 없었다. 기소 후 열흘 만에 공판이 개시되어 변호인단은 4000장이나 되는 공소장을 검토할 시간조차 없었다. 제1회 공판 날에는 무장간수와 무장경관 수십 명이 재판정에 배치돼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급기야 제 5회 공판 때 윤학기 변호사는 "이 재판은 죽은 재판이다"라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양원일 판사는 이 발언과 항의를 문제삼아 윤학기를 '징계재판소'에 회부해 정직 8개월을 받게 해 재판정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다. 변호인단의 의견 표명까지 탄압한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대법원장 김용무는 좌익 사건에서는 증거가 없어도 증언만으로 판결하라는 지침까지 내렸다. 폭력에 의한 강제 자백을 증거로 채택하라는 얘기였다.
 
실제 피의자들은 공판을 앞두고 한결같이 고문당했다고 주장했다. 일선 수사 책임자 이구범 본정경찰서장은 반민특위가 체포령을 내리자 일본으로 도망치려다 잡힌 인물이고 수사팀의 최란수·조성기·현을성·김성환도 일제하에서 경찰을 했으니 조선 민중을 탄압하면서 고문 수사가 몸에 배어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조병옥·장택상은 악질 경찰 노덕술까지 불러서 대책회의를 했으니 이들이 수사팀에 어떤 지침을 내렸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만한다.

피의자 홍계훈은 법정에서 "취조관 여덟 명이 팔다리를 포박하고 둘러앉아 걸레로 입을 틀어막고 물을 코에 부었다"라고 고문 사실을 폭로했다. 항일운동 경력이 있는 박락종, 송언필같은 피의자들도 일본경찰에게 당한 것보다 더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울분을 토했다. 심지어 제1회 공판일에 법원 앞에 있다가 체포된 전사옥 같은 사람도 전기 고문을 당했고 석방될 때는 거의 폐인이 되어 나왔다. 그럼에도 모든 피의자가 밝힌 고문 사실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임성욱은 5년여 연구 시간 내내 이런 의혹과 씨름하면서 사료를 보고 또 봤다. 자료의 공백은 큰 고통이었다. 검사의 주장에 변호사의 반론이 없거나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이런 빈틈을 상상력으로 메울 순 없었다. 다시 자료를 찾아보며 치밀하게 생각을 공글렸다. 그러노라면 사료 위에 땀방울이 떨어지고 어느결에 새벽 빛이 찾아오곤 했다. 꼬인 실타래가 풀리면 피로는 온데간데없고 연구의 쾌감에 흠뻑 젖기도 했다.

그렇게 달려온 시간, 고비도 많았다. 한국어학당 등에서 교사 노릇을 하며 조금 모아둔 돈이 있었지만 박사 과정의 학비를 내야 하고 논문에 매달린 2년 동안은 수입이 거의 없어 이래저래 쪼들렸다. 부모님에게 계속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고개를 넘었나 싶으면 또 한 고개가 보이고, 그 뒤로도 아득한 봉우리가 있었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은 심사에 들아가면서부터였다. 1차 심사에서 제기된 문제를 보완하느라 여러 날을 세웠다. 2차 심사에서는 조선정판사 사건이 해방 직후에 일어난 일이니 그 배경이 되는 일제강점기 말기의 상황이 보충되면 좋겠다는 심사위원의 지적이 있었다. 충분히 공감 가는 문제제기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말기의 정세를 몇 페이지만 쓰려 해도 책과 논문을 수십 편 찾아봐야 한다. 소화불량에 걸릴까 염려하면서도 허겁지겁 읽고 '소단락'을 만들어 넣어야 했다. 이렇게 강행군을 하다 보니 3차 심사를 앞두고 밤을 지새운 어느 날은 샤워를 하다가 욕실 바닥에 쓰러진 적도 있었다.
 
임성욱이 적은 마지막 문장
 
임성욱은 2015년 이런 노력 끝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2019년 600쪽이 넘는 <조선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 연구>(신서원)라는 단행본으로도 나왔다. 그는 논문과 책에서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일제강점기, 미 군정기,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제국주의, 점령군, 독재정권 등 권위주의 세력은 국민을 주권자가 아닌 통치의 대상으로 간주한 채 반정부 세력을 탄압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반공을 앞세워 끊임없이 조작 사건을 만들어 내고 분열 통치술을 사용했다.

그러한 점에서 정판사 위폐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권위주의 정치 권력이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대중을 통제하기 위해 반공주의적 분열 통치술의 일환으로 꾸며낸 조작 사건의 대표적 사례라고 역사적 평가를 내릴 수 있으며,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반면 교사의 사례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임성욱이 쓴 단행본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9년 신서원출판사에서 나왔다. ⓒ 임성욱제공


실제로 조선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으로 미군정은 정치적 위기를 벗어난다. 당시 미군정이 식량공출제를 실시해 조선 농민은 일제에 강제 수탈을 당할 때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토지개혁은 기미가 없는데 소작료는 여전히 높아 농민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또 적자 재정과 통화 남발로 물가는 자고 나면 곱절로 올랐고 생산 부진까지 겹쳐 도시와 농촌 어디서나 못살겠다는 원성이 터져나오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임성욱의 분석처럼 미군정은 조선정판사 '위조 지폐' 사건을 통해 경제 파탄의 불만을 조선공산당에 대한 분노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 조작 여부를 떠나 이 사건으로 미군정은 최대의 이익을 얻었고 조선공산당은 '파렴치범'이라는 낙인을 받아 낭떠러지로 몰렸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벌어진 그해 1월 20일 미국의 상원의원 반데버그(Arther H Vandenverg)는 공산주의에 맞서 냉전을 제창했고 이는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에 의해 미국의 핵심 외교 정책이 된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이처럼 미국이 전 세계를 냉전으로 몰아가는 가운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에 들어간 5월 6일 직후 발생한 것이기에 임성욱의 결론은 더더욱 의미심장하다.
 
임성욱의 박사논문이 나온 지 벌써 10년. 그동안 아스팔트 극우를 포함해 보수 진영 누구도 그의 학술적 성과에 대해 단 한 편의 반박 논문을 발표하지 않았다. 이제 역사학계에서는 자연스레 임성욱의 주장이 주류 학설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라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국민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울 1945> <야인시대>처럼 역사를 아무렇게나 뒤틀어버리는 일들이 마구 벌어질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시대에 뒤떨어진 반공국가체제를 강화하고 남북대결을 심화할 뿐이다.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대전 골령골에서 불법 처형된 이관술의 손녀 손옥희는 2022년 11월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요청했다. 더불어 2023년 7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이 사건의 재심을 청구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재심을 개시하면 이 법정은 역사의 법정, 민족의 법정이 될 것이다.

분단 국가와 반공 국가로 나아가는 분기점이 된 조선정판사 사건의 실체가 이제라도 밝혀진다면 분단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임성욱의 말처럼 반면교사가 되지 않겠는가? 재심을 통해 역사의 진실이 담긴 판결문이 나온다면 그것은 날조와 조작이 더 이상 이 땅에서 활개치지 못하게 하는 빗장이 되지 않겠는가?
 
2015년 젊은 역사학자 임성욱이 쏜 불화살은 정녕 역사의 검은 장막을 불태울 수 있을까?
 

왼쪽부터 손옥희, 김상구, 임성욱 손옥희는 이관술의 손녀딸이고 김상구는 올해 9월 '정판사 조작사건'(책과나무)을 펴냈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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