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도심에서 반한(反韓) 시위가 열렸다. '재일(在日)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이하 재특회) 소속 참가자가 "세금 도둑 돌려줘"라고 쓴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한국학교에 대한 지원금을 문제삼는 내용이다. 2013.9.8
연합뉴스
구량옥이 변호사가 되어 처음 참가한 소송이 '재특회의 교토조선 제1초급학교 습격사건'이었다. 이 학교는 그의 모교이기도 했다.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의 습격은 2009년 12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서 자행되었다. 10명 안팎의 무리가 난데없이 학교 앞으로 몰려와 악다구니를 쏟았다.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학교가 이웃해 있는 공원을 불법 점거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교토시 히가시쿠조(東九条)에 작은 땅뙈기를 마련해 만든 학교는 건물만 있고 운동장이 없었다. 조선학교는 1963년 교토시가 학교 옆에 있는 공원 정비를 시작할 때, 지역의 근린자치회연합회, 교토시와 협의를 해 공원에서 기념식이나 운동 수업을 해도 된다는 합의를 맺었다.
학교는 스피커와 축구 골대, 조회대 같은 시설물을 설치하는 한편 주민이 사용하게끔 철봉과 그네를 만들어 기증했다. 물론 축구 골대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40여 년이 흘렀으나 일부 주민의 민원도 있고 하여 2010년 1월까지는 조회대 등을 철거하고 운동 수업을 다른 곳에서 하기로 교토시와 협의를 마친 상태였다. 재특회는 이런 사정은 전혀 모르는 채 악다구니를 늘어놓았다.
"공원을 불법점거하고 있다" "스파이 양성기관이니 꺼져라" "이것들아 반도로 돌아가서 똥이나 처먹어" "김치 냄새 지독하다"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발언 내용도 어마어마했지만 확성기 소리가 너무 커 교실을 흔들었고 발언 사이마다 우웅하는 소리가 귀를 찢을 지경이었다. 학교는 난데없는 사태로 혼란에 빠졌다. 교사는 창문을 굳게 닫고 커튼을 친 채 아이들이 욕설에 상처받을까 큰 소리로 게임과 오락을 진행했다.
교장과 일부 교사들은 교문을 사이에 두고 재특회와 대치하면서 "수업을 방해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충격으로 초급 1, 2학년 어린이는 눈물을 떨궜고 밤에 오줌을 싸는 아이도 생겨났다. 부모를 붙잡고 "조선인은 왜 나쁘다는 거야?"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전의 극우는 거리에서 혐한발언을 하거나 개인이 치마저고리를 찢는 식이었는데. 재특회는 인터넷에서 차별을 부추기고 회원을 모았다. 종래 볼 수 없는 양상이었다.
경찰도 큰 문제였다. 학교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으나 중재자라며 팔짱을 끼고 바라볼 뿐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경찰이 이렇게 미온적이니 재특회는 2010년 1월 2차 습격을 했고 2010년 3월에는 학교 앞 200m 접근금지라는 가처분 결정까지 무시하며 세 번째로 습격을 했다.
이들은 이런 만행을 버젓이 동영상으로 중계까지 했다. 교사와 학부모, 재일조선인사회는 분노가 솟구쳤으나 이들을 제지할 수 없어 무력감에 빠졌다. 어쨌거나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니 스스로 안전대책을 세워야 했다. 비상연락망을 짜고 학교 앞 순찰을 강화했다. 허나 시간이 갈수록 교사와 학부모는 지쳐가고 수업은 부실하게 되었다.
이때 형법학자이며 제1초급학교 학부모인 김상균과 흑인해방운동을 공부한 도미마스 스케(富增四季) 변호사, 가마가사키(鎌ヶ崎)에서 빈민구제활동을 하는 엔도 히로미치(遠藤比呂涌) 변호사가 이 사태에 맞서기로 뜻을 모았다. 형사고소는 물론 손해배상소송까지 하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착수했다.
교사 월급도 제때 못 주는 조선학교로서는 변호사 선임 비용을 댈 처지가 아니었다. 변호사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는 조선학교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런 차별주의 시위가 허용되는 일본 사회를 뜯어고쳐야 한다"라며 모두 무보수로 합류했다. 자료 조사며 법정을 오가는 차비며 모두 자기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인지대도 마찬가지였다. "고소를 했다가 재특회를 자극해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이제까지 수많은 재판에서 패했는데 더 나쁜 판례를 만드는 게 아닐까요" 등 우려가 많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때 구량옥은 김상균의 연락을 받았다. 그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들어간 아스나로 로펌은 다행히도 수익성 사건만이 아니라 공익소송도 열심히 하라는 곳이었다. 구량옥은 소송단의 막내가 되어 여러 실무를 맡아 분주히 움직였다.
소송단은 먼저 교토부경찰청 미나미 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했다. 기물손괴죄, 위력업무방해죄 위반은 너무나 명백했다. 그들 스스로 자신의 짓을 인터넷으로 퍼트리기까지 했으니. 문제는 학생·학부모·교사가 입은 정신적 상처와 피해, 존엄이 유린당한 점이었다. 어쩌면 이 부분이 형사고소와 더불어 민사소송에서도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
그런데 주범 4명을 송치받은 교토 검찰청 특별형사부 담당검사는 '명예훼손죄'를 빼달라고 요구했다. 원고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지만 검사는 '명예훼손죄'가 아닌 모욕죄로 기소를 했다.
교토 검찰청이 이런 태도를 보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모욕죄는 명예훼손보다 형사처벌 수위가 현저히 낮다. 노골적으로 일본인 피의자의 편을 드는 태도였다. 일본의 검·경은 '치마저고리 칼질 사건'에서 보듯 재일조선인이나 한국인이 피해자인 경우에는 "너희는 고통받아도 돼"와 같은 태도를 보였다.
교토 검찰에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모욕죄는 단순 욕설이 대상이지만 명예훼손죄는 사실 관계의 왜곡여부가 쟁점이다. 이 사건을 수사해 명예훼손죄 위반으로 재특회를 기소하면 검찰 스스로 "조선학교가 스파이 양성기관이 아니고 재일조선인이 일본 식민주의의 피해자로서 민족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했다"라는 점을 증명해야 하니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수사기관과 더불어 재판부도 문제였다. 주범 1명은 모욕죄, 위력업무방해죄 등으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으나 집행유예를 받아 실제 구속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주범은 2017년 다시 교토조선학교 터를 찾아가 혐오 발언을 했다. 교토조선제1초급학교는 학생 수가 줄고 있던 터에 이 습격의 충격으로 입학 희망자가 격감, 2013년에 폐교가 되고 말았는데 이 부지에서 상처를 덧나게 한 것이다.
주범은 다시 기소가 되었다. 그런데 교토지방법원 제3형사부는 재특회의 혐오 표현이 "일본인 납치 문제를 거론하고, 이를 일본 사회에 알리기 위한 공익 목적이 있었다"라며 주범에게 겨우 50만 엔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혼자 편하게 살라고 내버려 두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