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선이 작성한 탄원서. 그는 이런 탄원서와 진정서를 수천 장 썼다.
박명선 제공
박명선은 2월 20일, 밤을 꼬박 새우며 결심했다. 병석에 있는 남편 그리고 아들 셋과 딸 하나, 생활을 꾸려가기에도 버거운 하루하루지만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겠다고. 다음 날부터 증거를 찾아 나섰다. 우선 부대의 출입 기록을 요구했다. 용권이가 귀대한 시간, 그동안 용권이를 면회한 사람이 누구이고 언제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2월 18일 통화에서 인사계는 용권이가 귀대할 때 적어놓은 서명이 없다고 했는데 넘겨받은 출입부에는 20:08에 도착한 것으로 적혀있었다. 용권이가 집에 들렀다 영등포역에서 전철을 탄 게 19시경이다. 그날 아들은 121병원에 들렸다가 집에서 저녁을 먹고 귀댓길에 올랐기에 박명선은 그 시각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출입부에 따르면 영등포역에서 한 시간 만에 의정부의 인디언(Indian) 캠프에 도착한 것인데 이는 날아가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의문은 또 있다. 군부대가 점호를 통해 병사를 관리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 18일 밤에 귀대한 병사가 19일 아침과 저녁 점호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이는 탈영으로 의심되는 상황이다. 부대에 비상이 걸려야 하지 않는가? 더욱이 부대원 대부분이 팀스피릿 훈련에 동원되어 남아 있는 대원은 극소수였으니 인원 점검은 더 쉬웠을 터이다.
미8군의 육군 소장인 에이치엘 참모장은 "2월 19일 07:30분 점호 시에 안 보여 121병원에 간 줄 알았다. 그런데 2월 20일 07:30분 점호 시에도 안 보여 121병원 입원과에 전화를 했다. 지정진료 날 외에 김용권 상병이 오지 않았다고 해 영내를 철저히 수색했고 10시 50분에 비상 열쇠로 김 상병의 방문을 열어 사체를 발견했다"라고 경위를 설명했다.
박명선은 이 해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병사가 상급자의 허락 없이 병원 진료를 받으러 영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단 말인가? 병사가 안 보이는데 "병원 갔나 보지" 이런 정도로 느슨하게 판단한다? 아무리 카투사의 한국군 군기가 느슨하다고 해도 납득할 수 없었다.
박명선은 아들이 먹던 약 봉지를 받아보고 또 한 번 놀랐다. 121병원에서 처방받은 알약 15정과 가루약 5봉 중에 알약은 12정, 가루약은 4봉이 남아 있었다. 밥을 먹고 약을 먹었을 테니 정상적으로 식사를 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영내 식당에서 밥을 먹었을 터인데 아무도 보지 못했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들의 행적은 파고들면 들수록 의문투성이였다.
박명선은 보안사에서 근무하는 사돈 집안의 추 상사를 의심했다. 그는 서울대에서 학생운동을 한 아들의 정보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1986년 8월 3일에는 자신이 근무하는 208보안부대로 면회 오게끔 아들을 유인했다. 아들이 카투사에 근무하는 만큼 보안사에서 마음대로 연행할 수 없는 사정이 작용했을 터이다. 그때 아들은 208보안부대에서 서울대 '민민투 수배자'의 행방을 추궁당하며 많은 고초를 겪었다. 박명선은 그 일을 떠올리며 아들의 죽음이 보안사와 관련이 있을 거라 의심했다.
전두환 정권은 김용권 사건이 발생하자 몹시 긴장했다. 1987년 1월 14일 김용권이 죽기 한 달여 전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숨졌다. 2월 7일에는 명동성당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박종철 추도회가 열렸고 49재에 맞춰 3월 3일에는 진상규명을 위한 대규모 가두행진이 예정되어 있었다. 박종철의 죽음으로 위기에 처한 때, 김용권의 죽음이 자칫 정권 퇴진 투쟁의 거대한 풀무가 될까 봐 크게 당황한 것이다.
제6군단 헌병대는 부검을 서둘렀다. 사고 다음 날인 2월 21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부검을 시도했다. 박명선은 진상규명이 먼저라며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헌병대는 2월 25일 6군단 군법회의에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강제 부검을 시도했다. 박명선은 이를 재차 거부하고 "미군 군의관이 부검하고, 우리가 요구하는 변호사를 선임해 입회하게 해달라"라고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져 부검은 2월 27일 121병원 병리 실험실에서 제6군단 우종대 검찰관, 김상철·조상현 변호사, 미 대사관 2등 서기관 할비쿠, 김용권의 백부와 6촌 형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121병원 군의관 와이코프 소령은 17시 20분에서 20시 30분까지 진행된 부검 후 "목이 졸린 흔적 이외에 외부로부터 구타나 상처를 입은 흔적이 없다. 모든 장기에서 사인이 될 만한 질병을 발견할 수 없다. 자신이 목을 매 질식사한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결과를 밝혔다.
무릎이 땅에 닿아 체중이 실리지 않은 채 목이 졸릴 수 있냐는 의문에 대해서도 "법의학교과서를 보면 몸이 지면에 닿은 상태로 숨진 사례가 많다, 김용권의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라며 문제 제기를 일축했다. 또 어딘가에서 살해되어 영내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고 흔적도 없다며 사건의 종결처리가 마땅하다고 했다. 이런 결론을 내고 미8군 공병단은 장례식을 서둘렀고 정부는 이 부검 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언론도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 <동아일보>는 2월 28일 "숨진 카투사 자살로 판정"이라는 제목으로 사건을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한술 더 떠 "당국에 따르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라며 신변을 비관한 자살로 몰고 갔다.
한편 박명선의 진정을 통해 김용권의 죽음을 접한 종교계와 민주화운동세력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박종철에 이은 또 한 청년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고문폭력대책위원장 김상근 목사와 김동완 목사 등이 주도하여 '김용권군 사망사건 진상규명소위윈회'가 만들어졌다. 위원회는 2월 25일 "김용권에게 민민투관련 수배자의 행방을 추궁했는지, 이를 위해 고문을 했는지"를 밝히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런 요구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외려 탄압으로 나왔다. 동대문경찰서는 부검 당일인 2월 27일 기독교회관을 압수수색하고 2월 28일에는 "허위 소문을 유포한다"는 명목으로 김상근 목사를 연행했다. 김동완 목사도 3월 3일 성동경찰서로 붙잡혀갔다. 두 목사의 연행과 구류 처분에 한국기독교장로회 목회자 30여 명이 항의 농성에 들어가고 일반 신도도 성명을 발표하면서 싸움에 동참했다. 이렇게 불씨가 커지자 문공부 장관 이웅희는 직접 나서 "젊은 병사의 죽음은 애석하나 시중의 풍문은 허무맹랑한 낭설"이라고 말하며 사태 확산을 막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미국기독교협의회를 비롯해 세계기독교협의회까지 전두환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며 파장은 점차 커져갔다.
어려운 가정 돌보던 듬직한 아들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