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01 19:18최종 업데이트 24.03.0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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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편집자말]
새벽을 찢는 벨소리에 최봉규는 놀라서 깼다. 창가에는 어둠이 묻어 있고 방안은 어스름했다. 잠결에 전화를 받은 아내의 음성은 높았다.

"네? 뭐라구요, 어디, 무슨 병원이요?"


수화기를 내려놓는 아내의 떨리는 목소리가 방안의 어스름을 몰아냈다.

"우혁이가 좀 다쳤는가 봅니다. 의정부에서 동두천 가다 보면 있는 덕정병원이라 합디다."

최봉규와 아내는 서둘렀다. 1987년 4월 28일 입대, 육군 제20사단 7327부대 정보과에서 근무하던 막내가 '입원했다'라는 소식에 다급했다. 아내는 조바심 속에서도 "잘 먹어야 낫는다"며 부침개를 준비했다.

아현동에 있는 집을 나서 택시로 수유리 시외버스정류장까지 내달렸고 동두천행 버스에 올랐다. 8시나 되었을까 창문으로 비껴드는 아침 햇살 사이로 막내 우혁이의 얼굴이 가득하다. 혹시 총기 사고는 아닐까? 유격 훈련을 하다가 팔을 다쳐 깁스를 한 게 엊그제였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마음이 콩콩댄다. 동두천 길로 접어들자 4차선 도로에는 군용트럭이 일으킨 흙먼지가 어지러웠다. 아내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는지 사뭇 눈을 감고 있다. 최봉규도 초조한 마음을 달래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몇 모금이나 빨았을까 덕정병원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는 "별일 없기를 기도하며" 부침개를 가슴에 품은 아내와 버스에서 내렸다.
  

최우혁의 대학생시절 모습 그는 1987년 9월 8일 20사단 7327부대에서 숨을 거두었다. ⓒ 최우혁기념사업회제공

 
외딴 건물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아들의 영정과 시신

병원 정문으로 다가가니 소령 계급의 장교 하나와 보안대 상사, 정보과 선임하사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봉규는 이들에게 이끌려 병원 앞 지하다방으로 내려갔다. 여름 더위가 남아있는 9월 8일이어선가 실내는 후덥지근했다. 보안대와 헌병대에서 사건을 조사 중이라며 이들은 "최 이병이 누나하고 다정하게 지냈다면서요? 아버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라며 애먼 얘기를 늘어놓았다. 심드렁한 대화가 몇 토막 오갔을 때 소령은 갑자기 "형들에게 연락을 취해야 할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다.
  
최봉규는 가슴이 철렁했다. 동두천으로 오는 내내 큰 사고면 어쩌나 불안했는데 우혁이의 큰형 종순과 작은 형 인휴에게까지 연락해야 한다면 많이 다쳤다는 얘기가 아닌가. 아내의 표정도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다방 전화를 빌려 큰아들에게 연락을 마쳤을 때 우혁이의 직속상관이라는 대위가 나타나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최봉규는 '위로'라는 말에 가슴이 또 한 번 내려앉았다. 대위 역시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최봉규는 속이 더욱 타들어가 진땀을 훔쳐내며 보리차를 거푸 마셨다. 잠시 후 병졸 한 명이 내려와 조사가 끝났다고 알렸다. 그제야 최봉규는 아내 강연임과 다방을 나섰다. 숨을 길게 들이쉬면서.

병원 정문을 통과해 몇 걸음 걸었을 때 소령은 갑자기 뒤돌아서서 "다 끝났습니다"라고 말했다. 최봉규는 순간 멍했다. 아침 햇살은 오간 데 없고 깜깜한 장막이 눈 앞을 가렸다. 소령이 가리키는 슬레이트 지붕의 외딴 건물을 향해 내달리는데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듯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부침개를 꼭 안고 있는 아내도 종종 걸음을 내딛는데 제자리만 맴돌았다. 아내의 뺨에 눈물인지 땀인지 하얀 물방울이 아침 햇살을 튕겨내고 있었다.

조화가 서 있는 창고 같은 건물 안에 들어섰을 때 향 두어 줄기가 가날프게 일렁였다. 그 뒤에 놓여 있는 아들 우혁이의 영정! 최봉규와 아내는 놀라 걸음을 멈췄다. 아내는 "이것이 웬일이여,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여..."하며 비명을 질렀다.

최봉규도 넋을 잃으며 주저앉았다. 건물 한구석에 홑이불과 담요에 덮여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최봉규는 기다시피 다가가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하며 담요를 들쳤다. 매정하게도 막내 우혁이었다. 군복이 불에 탄 듯 여기저기 검은 구멍이 있었고 머리카락이 그을린 상태였다. 다리는 달걀처럼 오므렸고 가슴에 올려진 왼쪽 손등이 붉었다. 최봉규는 담요를 덮었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하고 실내에 스멀스멀 퍼지는 향내가 역겨워 구역질이 올라왔다.

영정을 끌어안은 아내의 울음은 더욱 커졌다. 어찌 마음이 찢어지지 않을까? 1984년 서울대 서양사학과에 입학한 우혁이는 '경제법학회'에 들어가 사회과학 공부를 하면서 학생운동에 발을 디뎠다. 친구를 집에 데려와 밤늦게까지 열띤 얘기를 나누고 "전두환은 광주학살 원흉이야"라고 분노를 터트리는 아들이 아내는 불안했다.

아내는 "우혁아, 아무래도 군대 다녀와야 쓰겄다"며 입대를 권했다. 막내는 엄마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욱 열성이었다. 강의는 뒷전, 시위를 쫒아다니기 바빴고 관악경찰서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1986년 5·3 인천 투쟁에 참여한 후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못한 적도 있었다. 1986년 5월 20일 문익환 목사의 강연이 서울대 교내에서 있던 날, 학생회관 옥상에서 원예학과 83학번 이동수가 분신하자 흥분한 학생들은 교문 돌파 투쟁을 했다. 이때 막내는 발등에 최루탄을 맞아 10주나 치료를 받았다.

아내의 근심은 더욱 커졌다. 학생과에 연락해 휴학 방법을 문의하고 병무청에 전화해 군대에 빨리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엄마에게 약한 막내는 간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게 1987년 4월 28일에 입대한 자식이 불과 반년도 안되어 싸늘한 주검이 되었으니 아내는 죽음을 제 탓으로 여기며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몸부림쳤다.
 

최우혁이 군대에서 보낸 편지 그가 1987년 4월 입대해 6월에 보낸 편지다. ⓒ 최우혁기념사업회 제공

  
유서를 태웠다니

이날 정오경 큰아들과 작은아들, 우혁이의 큰형 종순과 작은형 인휴가 도착하고 나서 최봉규는 현장 확인을 위해 덕정병원에서 길을 나섰다. 헌병대 수사관의 차를 타고 15분 남짓 달려 "우혁이가 분신했다"는 7327부대의 쓰레기 소각장 앞에 섰다. 너른 연병장과 띄엄띄엄 서 있는 블록 건물이 무슨 사막 한가운데 세트장 같은 느낌이었다.

"저기 검게 탄 종이재가 유서로 추정되는 것입니다."

20사단 헌병대 대장은 우혁이가 분신한 곳으로 지목된 땅 앞에 완전히 타버린 종이 한 줌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헌병대장의 설명을 들으며 최봉규는 기가 막혔다. 아들의 자살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데 유서를 불살랐다니, 태울 유서라면 왜 썼단 말인가? 그리고 바람만 불어도 휙 날아갈 종이재가 아들의 분신으로부터 10시간 넘었는데 그 모양 그대로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아내는 "우리 우혁이가 이런 더러운 곳에서 목숨을 끊을 아이가 아니여" 하면서 다시 몸부림을 쳤다.

사실 아들에겐 어떤 기미도 없었다. 자대에 배치된 7월 이후 아내는 네 번이나 면회를 다녀왔다. 8월 23일이 마지막 면회였고 프랑스로 떠날 외동딸과 같이 간 자리였다. 그날 우혁이는 엄마의 흰머리를 한올 한올 뽑아주면서 면회 올 때마다 머리칼을 다듬어주겠다고 했다. 부대 앞 공중전화에서 종종 들려준 목소리에도 침울한 구석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우혁이는 입대를 기다리는 동안 부천 등지의 노동현장에 들어가 나름 단련했었다. 그때의 느낌을 환일고등학교 도서부 친구 조재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대 갔다 와서 공장에 들어가야겠어. 몇 달 해보니 생각처럼 어렵지 않더라. 내가 먼저 자리 잡아놓을 테니까 마음 놓고 따라 들어와라."

아들은 '민중 속으로'라는 이상을 위해 살려 했고 삶의 의지가 충만했다. 그런 막내가 마지막 면회 2주 만에 숨지게 되었을 때는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있었을 것이고 어떻게든 그 사연을 남겼을 터이다. 어린 시절부터 일기 쓰기가 몸에 배었던 우혁이, 책 읽기를 좋아해 전집을 사다 주어도 한두 달이면 다 읽어치우는 막내였기에 최봉규는 '유서를 태워버렸다'라는 헌병대장의 말을 믿으려야 믿을 수 없었다.
 

1978년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그는 어린시절 일기쓰기와 책 읽기를 좋아했다. ⓒ 최우혁기념사업회제공

 
분신한 지 몇 분 만에 숨기 끊기다니

헌병대장은 가족의 의구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하 장병 앞에서 연설하듯 설명을 이어갔다. "최 이병이 몸에 불을 붙인 시간이 9월 8일 00:50분, 쓰레기 소각장에서 멀지 않은 정문 위병소에서 초병 둘이 이를 알아채고 뛰어갔다. 한 명은 철모에 주변 흙탕물을 담아 끼얹고 또 한 명은 야전잠바로 내리치며 불을 껐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위생병이 경동맥을 짚었을 때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덕정병원에서 내린 의사의 진단도 마찬가지였다"라는 것이었다.

헌병대장의 말을 들을수록 최봉규의 의혹은 깊어졌다. 휘발유 900ml를 몸에 끼얹었다? 휘발유는 어떻게 구했으며 그 정도면 막걸리 한 통보다 조금 많은 양이어서 겨우 머리나 어깨 정도만 적셨을 것이다. 그런데 병원에서 본 아들은 다리까지, 온몸이 탄 모습이었다. 불은 분명 위로 치솟았을 터인데. 또 피부의 색깔이 다소 붉었으나 살갗이 오그라들지도 비틀리지도 않았다. 물집도 없었다. 이들 말처럼 3도 화상이면 피부 신경이 망가지고 살갗이 검게 변할 정도인데 우혁이 몸은 약간 그을렸다는 느낌 정도였다.

헌병대장은 설명을 마치고 7327부대장의 방으로 최봉규와 가족을 안내했다. 연병장 가득 파리한 햇빛이 쏟아졌다. 큰아들과 작은아들은 자신들도 흐느끼면서 무너져 내리는 엄마를 부축했다. 7327부대장인 권 대령은 위로의 인사를 하더니 "사망 몇 시간 전 최 이병은 우측 손목을 사무용 칼로 자해했습니다. 아마도 이 방법으로 안 되니 2차 수단으로 분신을 택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분신 앞뒤 상황을 면밀하게 조사했다는 인상을 주려 애쓰는 분위기였다. 권 대령이 말을 마치자 헌병대장은 부검을 해 정확한 사인을 가리자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유품을 건네겠다며 헌병대 파견대 사무실로 다시 최봉규를 이끌었다.

사병들이 가져온 유품은 뒤죽박죽이었다. 우혁이 시계는 마지막 면회 때 누나가 사다 준 전자식이었는데 엉뚱하게도 기계식을 두 개나 가져왔다. 군번줄도 우혁이 것이 아닌 다른 사병의 것을 가져왔다. 물건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로 허둥거리는 모습이었다. 두 개의 훈련 수첩은 막내의 글씨가 담긴 걸 보아 제대로 가져온 것 같은데 한 개의 수첩은 거의 뜯겨 있어 내용을 알 수 없었다.

헌병대장은 유품을 건넨 후 최초 목격자인 정문 초병인 김 상병을 불렀다. 그는 김 상병에게 "(최 이병이) 장승처럼 서서 타고 있더란 말이지"라고 물었고 김 상병은 "네"라고 대답했다. "흙탕물을 끼얹어서 끄고 그 다음은 어떻게 했나" 이어지는 헌병대장의 질문에 그는 "뭐 해, 굴러라 굴러! 하니까 좌로 한번 우로 한번 굴렀습니다"라고 답했다.

최봉규는 이 문답을 보면서 의구심이 더 커졌다. 사람이 어찌 불 속에서 발버둥치지 않고 '장승처럼 꼿꼿이' 탈 수 있단 말인가? 몸이 타들어가다 고참이 말하니까 그때야 생각난 듯 좌로, 우로 한번 굴렀다는 설명은 그야말로 황당했다. 잠시 전 현장을 봤을 때도 흙탕물이 고여있던 흔적은 없었다. 김 상병은 헌병대장이 유도하는 듯한 물음에 짧게 대답하곤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다. 또 다른 목격자는 아예 부르지도 않았다.

유서가 없고, 짧은 시간에 숨진 점 등 여러 의문점을 생각하면 자살을 받아들일 수 없는데도 헌병대장은 초병과 문답을 마치자 재우쳐 부검에 대한 확답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상황을 매듭지으려고 서두를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부검

최봉규는 두 아들에게 우혁이의 빈소를 지키게 하고 이날 밤늦게 집으로 올라갔다. 친척과 우혁이 학교에 연락을 취할 작정이었다. 9월 9일 새벽부터 최봉규는 전화를 돌렸다. 서양사학과 학과장실, 집에 남아 있는 우혁이 친구의 연락처 여기저기로. 최봉규가 부대에서 보낸 차로 덕정병원에 왔을 땐 정오 무렵이었다. 점심 시간이 지나자 헌병대장은 부검을 위해 집도의가 대기하고 있다며 무더운 날씨에 시신이 상할 수 있으니 서둘러야 한다고 압박을 해왔다.

어떻게 연락을 받았는지 재야인사 계훈제 선생, 경원대학에서 분신한 송광영의 어머니, 그 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들이 찾아왔다. 오후 2시가 넘어서면서 우혁이의 학교 친구들까지 모여들었다. 계훈제 선생은 "변호사가 입회하지 않으면 절대 부검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우혁이의 친구들은 "우혁이가 자살했을 리 없습니다. 그동안 보안사의 녹화 공작으로 죽은 사례가 많습니다"라며 부검을 늦추라고 했다.

헌병대장과 7327부대장은 이런 상황 변화에 놀라 병원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냉동실이 없어 시신이 썩을 수 있고, 집도의는 지금 아니면 다음 일정을 잡을 수 없다"라며 최봉규에게 더욱 부검을 재촉했다. 최봉규는 어쩔 수 없이 부검을 받아들였다.

- 2편 <'내가 귀한 우리 아들 죽였다' 아내마저 떠나버리고>(https://omn.kr/27l52)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최우혁열사기념사업회가 2017년 만든 <30주년추모집>에 나온 '최봉규'의 회고와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 인터뷰에 응해주신 최종순님과 기념사업회 관계자, 강제징집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조종주 사무처장님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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