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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 집에 살가운 사람이 밀물지고 있었네
▲ 면목동 누나 집, 우로부터 시인 박광배, 오우열, 윤재걸, 김이하 그 집에 살가운 사람이 밀물지고 있었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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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을에 사랑이 사네
그 집에 사람이 밀물지네
이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른다네
스님들도 불전처럼 드나들고
목사들도 예배당처럼 오가고
가난한 시인들이 제집처럼 사는
그 마을 면목동 그 집
삼겹살이라도 굽는 날이면  
여기저기 전화 걸어 소주라도 한 잔 먹여야
응어리가 풀리는 그 누나 
기어이 며칠 밤 묵고 가게 만드는 그 형
그 집에 우리가 모르는 세상이 있네
그 술에 시인도 모르는 시가 눈 깜빡이고 있네

-이소리, '면목동, 그 집' 모두

'사람이 물에 빠지면 살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사람이 이 모진 세상을 살다 보면 몹시 어려운 때를 당하는 때가 더러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깡그리 잃어버린 것처럼 그 눈물겹고 힘들 때 내가 붙잡아야 할 그 '지푸라기' 하나라도 없다면 얼마나 서럽고, 얼마나 깊은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겠는가.

'지푸라기' 하나가 물에 빠진 나를 건져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지푸라기' 하나가 있어 절망의 늪에 빠져서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정말 어려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이리저리 낙엽처럼 뒹굴 때 언제든지 다가가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그런 기둥이 있다면 절망 따위도 바람 앞에 티끌처럼 날아가 버리지 않겠는가.

사람은 흔히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가족이다. 가족에게는 이런 저런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쉬이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족이 내미는 큰 도움을 받고도 계속 어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그 다음으로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게 되는 곳이 늘상 살갑게 지내는 가까운 벗들일 것이다.

예로부터 가까운 사람과는 돈 거래를 하지 말라고 했다. 돈 거래 때문에 그동안 참 좋았던 사이가 자칫하면 '원수'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어려울 때 가족이나 벗에게 "언제 언제까지 갚으마" 하며 돈을 빌렸다가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고, 빌린 돈을 제 때 갚기 못할 때 일어나는 큰 상처이다.

하지만 간혹 '원수'가 되기도 하는 가족과 가까운 벗보다 더 살가운 가족도 있다. 내가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언제나 따스하게 도와주는 가족 아닌 가족, '살붙이'가 그들이다. 나는 사업에 실패한 뒤부터 가족은 친인척을 합쳐 '피붙이'라 이름 붙였고, '피붙이'가 아니면서도 '피붙이'보다 더 살가운 가족을 '살붙이'라 이름 지었다. 지금 쓰는 '가족에게 길을 묻다'라는 이 글은 바로 나의 '살붙이' 이야기다.   

사람은 흔히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가족이다
▲ 땅끝마을 형제바위 사람은 흔히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가족이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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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대로 꽁꽁 얼어붙어버릴 것만 같았던 그 추웠던 2월. 나는 그동안 힘겹게 다니던 직장에 어쩔 수 없이 사표를 내게 됐다
▲ 서울살이는 저 빈 들판처럼 황량했다 지난 겨울,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대로 꽁꽁 얼어붙어버릴 것만 같았던 그 추웠던 2월. 나는 그동안 힘겹게 다니던 직장에 어쩔 수 없이 사표를 내게 됐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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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딸이 고등학교에 다닌다고 했잖아, 어쩔려구?"

"어때? 10여 년 만에 다시 올라온 서울살이 할만 해?"
"월급이 너무 적어 저 혼자 먹고 살기에도 빠듯합니다. 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럼 창원 집에 돈 한 푼 못 보내겠네? 두 딸이 고등학교에 다닌다고 했잖아. 어쩔려구?"
"그렇잖아도 집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돈도 제대로 못 보내 줄 밖에야 왜 서울에서 혼자 살면서 그 고생을 하느냐구요."

지난 겨울,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대로 꽁꽁 얼어붙어버릴 것만 같았던 그 추웠던 2월. 나는 그동안 힘겹게 다니던 직장에 어쩔 수 없이 사표를 내게 됐다. 실물경제가 점점 나빠지면서 회사가 어려워지자 오너가 사흘이 멀다 하고 회의를 열어 월급 감봉, 인원 감축을 들먹이며 은근히 사표를 쓸 것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적은 월급이었다. 4대 보험과 여러 가지 세금, 2평짜리 원룸 방세와 수도세, 전기세, 가스비 등을 떼고 나면 노동부에서 정한 최저 생계비보다 조금 더 많은 월급이었다. 여기에 식사비, 손님 접대비까지 떼고 나면 오히려 돈을 보태야 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집에서 쉬는 게 나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하루 업무는 그야말로 '코피 터지게' 많았다. 출근시간은 정각 9시로 정해져 있었으나 퇴근시간은 아예 없었다. 오너는 밤 9시가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툭 하면 전화로 불러내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1시간 이상 하는 게 예사였다. 국경일, 일요일은 물론 심지어는 1월1일에도 사무실에 나가 일을 해야 했다.       

지금 당장 방을 빼라는 데요? 저 입장도 난처합니다
▲ 모래집 지금 당장 방을 빼라는 데요? 저 입장도 난처합니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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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방을 빼라는 데요? 저 입장도 난처합니다"

"오늘 중으로 당장 방을 빼 주세요."
"이 추운 땡겨울에 너무 하는 것 아닌가요.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 시간은 주셔야죠? 어떻게 지금 통보 받고 당장 방을 비울 수가 있습니까?"
"그 사정이야 내가 알 바 아니고 당장 빼라면 빼세요."
"이 캄캄한 밤에 당장 어떻게 방을 빼라는 겁니까?"

아무리 직장 구하기 어려운 세상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설날을 며칠 앞둔 그날 아침, 나는 출근하자마자 사표를 내던졌다. 오너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표를 받아들이며 큰 배려라도 하듯이 "그동안 고생도 많이 하셨는데, 이 달까지는 방을 그냥 쓰세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다.  

나는 그때 그 회사에서 운영하는 2평짜리 원룸에서 생활했다. 방세 선불을 월급에서 제하는 조건으로. 그도 그럴 것이 가진 돈 한 푼 없이 서울에 올라와 보증금 없는 방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보증금 없는 고시촌에 들어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고시촌은 회사에서 멀기도 했고, 무엇보다 식사비를 아끼기 위해서는 회사와 같은 건물에 있는 원룸이 좋을 것만 같았다. 밥을 직접 해 먹어야 했으니까.
  
사표를 쓴 그날, 나는 대낮부터 인사동에 있는 <시인>으로 가서 술을 꽤 많이 마셨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고향 창원으로 내려가 설날 연휴를 보낸 뒤 서울로 올라왔다. 강남고속터미널에 도착한 그때가 아마 밤 8시쯤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손전화가 심하게 울렸다. 그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 내용은 "지금 당장 방을 빼라는 데요? 저 입장도 난처합니다"였다. 기가 막혔다.   

피붙이 하나 없는 이 서울 땅에서 피붙이보다 더 살갑게 대해주는 누나와 형이 곁에 있어 그해 겨울은 참 따뜻했다
▲ 가족에게 길을 묻다 피붙이 하나 없는 이 서울 땅에서 피붙이보다 더 살갑게 대해주는 누나와 형이 곁에 있어 그해 겨울은 참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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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이사 와, 뭐어~ 큰일도 아니구먼"

"누나! 설 잘 보냈어?"
"그래. 고향 잘 다녀오고. 근데 이 밤중에 어쩐 일이야?"
"그때 누나가 말한 원룸 그거 아직도 비어 있어?"
"응. 비어 있어. 근데 왜?"
"그걸 내가 당분간 좀 쓰면 안 될까. 내일 오전부터 당장."
"무슨 일이 있나 보네. 그러지 말고 지금 당장 집으로 와. 집에 와서 차분히 이야기하자구."

나는 그 회사 원룸에서 2월 끝자락까지 생활하면서 직장과 원룸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근데, 난데없이 한밤중에 당장 방을 비우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황당하기도 했지만 사실 자존심이 더 상했다. 어쩌지? 그때 문득 면목동 누나가 떠올랐다. 누나가 한때 내가 살고 있는 원룸에 왔다가 "에게!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원룸을 내주는 건데"라고 툭 던진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내가 면목동 누나 집에 갔을 때 누나와 형은 미리 술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라며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누나와 형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러자 누나와 형은 "당장 이사 와. 뭐어~ 큰일도 아니구먼. 그 방은 오래 비워두어서 일주일 정도 수리를 해야 하니, 내일 오전에 짐만 옮겨놓고 그동안 우리 집에서 지내"라며 빙그시 웃으며 술잔을 건넸다.

고마웠다, 정말. 피붙이 하나 없는 이 서울 땅에서 피붙이보다 더 살갑게 대해주는 누나와 형이 곁에 있어 그해 겨울은 참 따뜻했다. 그때부터 나는 손전화 전화번호부 그룹관리에 '살붙이'라는 항목을 하나 더 추가했다. '피붙이'는 직계가족 이름을, '살붙이'에는 누나와 형, 그리고 나를 가족처럼 따스하게 보살펴주는 분들 이름을 저장했다. 친인척으로.

면목동 누나는 1980년대 중반 <탑골>에서 처음 만났다
▲ 면목동 그 누나 면목동 누나는 1980년대 중반 <탑골>에서 처음 만났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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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동 살림집에 제2의 <탑골> 차리다? 

"어서들 와요."
"그나저나 오늘 그게 없는데 어쩌죠?"
"그런 거 걱정 말고 앉기나 해요. 여기가 어디 남의 집인가? 드시고 싶은 만큼 맘껏 드시다가 집에 못 갈 것 같으면 안방에서 주무세요. 뜨끈하게 데워놓았으니깐."
"이거 한두 번도 아니고 미안해서 어쩌나?"
"별 걱정을 다 하시네."

면목동 누나는 1980년대 중반 <탑골>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는 군사독재정권 때여서 툭 하면 가투가 자주 벌어졌다. 그렇게 가투가 끝나고 나면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늘상 찾는 곳이 누나가 꾸리고 있었던 <탑골>이란 주점이었다. 모두들 가난한 문인들이어서 술값도 없었지만 누나는 늘 웃는 얼굴로 반갑게 맞이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문인들에게는 안방까지 내주며.

나 또한 그때 누나에게 외상을 참 많이도 졌다(지금도 좀 남아 있지만). 하지만 누나는 한 번도 외상값을 재촉한 때가 없었다. 그 뒤 내가 사업에 망해 지방으로 내려가 10여 년 세월을 보내는 동안 누나는 <탑골>을 정리했다. 그 뒤 결혼을 해 아들을 하나 두고 있다는 소식을 서울에 살고 있는 가까운 벗으로부터 들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난 뒤부터 나는 가끔 서울에 볼 일이 있어 다녀가곤 했다. 누나는 그때마다 나를 면목동 집으로 불러 서울 볼일을 보는 내내 가족으로 대했다. 나 또한 누나와 형을 가족으로 대했다. 누나의 아들도 내게 '삼촌! 삼촌!'하며 아예 가족으로 여기며 잘 따랐다. 그때부터 나는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누나 집에서 지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누나 집에는 항상 손님이 들끓었다. 스님, 목사,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가 등등. 그러니까 면목동 누나 집이 제2의 <탑골>이 된 셈이었다. 누나는 또한 내가 서울에 다시 올라왔을 때에도 살림살이와 먹을거리까지 꼼꼼하게 챙겨주었다. 가끔 삼겹살이나 차돌박이, 삼계탕을 먹을 때면 꼭 전화를 걸어 함께 먹었다. 

누나가 마련해 준 그 원룸에서 또 한 번 겨울을 따스하게 날 준비를 하고 있다
▲ 불꽃 하나에 희망의 길을 누나가 마련해 준 그 원룸에서 또 한 번 겨울을 따스하게 날 준비를 하고 있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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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길을 열어준 누나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요즈음 어떻게 살아?"
"그냥 그럭저럭."
"아, 이 사람아!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인데 어찌 그리 연락도 한번 없이 사냐? 무심하기는. 얼른 집으로 와. 소리(글쓴이 필명) 씨가 가장 좋아하는 차돌박이 사 놨어."
"술은?"
"그냥 와. 아까 시장 볼 때 막걸리랑 소주랑 맥주랑 다 사놨어."

나는 누나가 마련해 준 그 원룸에서 또 한 번 겨울을 따스하게 날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누나가 마련해 준 5평 남짓한 원룸에서 살면서도 나는 누나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다. 지난 추석에도 작은 선물 하나 보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직장을 잡은 것도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힘겹고 빠듯하게 보내고 있다. 

참 뻔뻔스럽기도 하다. 누나가 살 길을 터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도 헤매고 있다. '다음 달엔, 다음 달엔' 하면서. 하지만 누나와 형은 언제나 밝고 상냥한 얼굴로 나를 다독여주고 있다. 맛있는 음식이 있거나 어디 경치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게 되면 반드시 나를 부르는 나의 진정한 가족, 면목동 누나와 형.  

나는 오늘도 누나와 형의 따스한 보살핌을 받고 있고 그 고마움을 가슴에 늘 새기고 있다. 내 앞에 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동안 이 원룸에서 수많은 글을 썼고, 오늘도 쓰고 있다.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고 살듯이 글쟁이는 글을 써서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 글에 하루속히 햇볕이 환하게 비쳐와 누나와 형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가족에게 길을 묻다' 응모 글



태그:#면목동 그 누나, #탑골, #가족보다 더 살가운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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