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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자
집착이 강해선지 능력이 부족해선지, 태어나 자란 마을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몇십 년째 그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아마 땅값이 제일 안 오른 지역을 꼽으면 그중 하나에 꼭 들어갈 그런 곳이라, 이른바 ‘개발’이란 것도 안 되고 집값도 싸서 내겐 만만하고 편하기만 한 곳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곳에도 개발의 바람이 불어, 사방이 파헤쳐지고 우뚝우뚝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골목길이 사라지고 대신 도로 정비라며 넓은 길이 펑펑 뚫리니까 사람들은 시원해졌다고 좋아들합니다. 하긴 도로가 넓어지고 아파트가 서니까 가만있어도 집값이 오르고 다니기도 편해서 좋기는 좋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스치면 어깨가 닿을 듯 좁던 골목길과, 그 골목 끝에 그리움처럼 나타나던 우물이 사라진 것은, 참 오래도록 용서가 안 됩니다. 이 동네로 이사 와서 처음 여기저기를 기웃대다가 그 우물을 발견하고, 금광맥을 찾아낸 듯 설레고 반가워서 얼마나 혼자 흐믓해했는지….

집집마다 수도가 다 놓인 뒤에도 마을 아낙들을 불러모으던 우물이었습니다. 저물녘 집으로 가는 길에 우물가를 지날 때면, 쌀이며 채소를 씻고 다듬는 아낙들의 수다가 우물 위를 둥둥 떠다녔습니다. 거기 한패로 어울린 적은 없지만 늘 마음이 머물곤 했었는데, 지금 그곳엔 20층짜리 아파트가 세 채나 들어섰습니다.

잃어버린 우물을 생각하니 얼마 전 잃어버린 어린 날의 마당이 떠오릅니다. 지금 사는 곳에서 서너 정거장만 가면 유년 시절부터 십여 년을 살았던 옛 동네가 나옵니다. 서울내기인 내게는 그 집, 그 동네가 고향인 셈이지요.

그런데, 그것도 고향이라고 그런 걸까요, 가까이 있어도 그리움뿐 선뜻 찾아가지는 않게 되더군요. 하긴 추억 속의 풍경을 찾아 두어 번 가기는 했는데 옛날과 다름없이, 아니 옛날보다 더 초라한 모습이 쓸쓸해서 안 가게 되고, 그러다 다시 가선 어설프게 변한 모습이 낯설고 우울해서 다시 걸음을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 동네가 모조리 개발된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살던 집도 개발이 될 거라고, 천 세대나 되는 어마어마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거라는 얘기도 들렸지요. 가볼까, 마지막으로 내가 살던 그 집, 그 마을을 찾아 사진으로도 찍고 마음으로도 꼭꼭 새겨둘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나와 동무들이 저물도록 뛰어다니던 길이 파헤쳐지고, 오원짜리 엿을 훔쳐 먹던 뚱땡이 아줌마의 가게가 허물어져 있다면, 족제비가 숨어 있다가 방 창문으로 갑자기 머리를 내밀어 나와 언니들을 숨 넘어가게 했던 우리집과 옆집 사이 그 비좁은 고샅이 무너졌다면, 등하굣길에 늘 발돋움 하며 기웃거렸던 단청 화려한 정체불명의 그 기와집이 허물어져 터만 남았다면, 무엇보다, 꽃밭과 장독대와 펌프가 놓인 수돗가가 한데 어울린 실용적이며 낭만적인 우리집 마당이 파헤쳐져 흔적도 없어졌다면, 아! 나는 정말이지 끝내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은평구 진관외동 한양주택에 사는 이들은, 개발도 뉴타운도 아파트도 싫다고, 그냥 이대로 살게 해달라고 벌써 여러 달째 싸우고 있답니다. 여름이면 보랏빛 달개비꽃이 환하고, 겨울이면 흰 눈 사이로 사철나무의 초록잎이 눈부시던 어린 날의 꽃밭을 떠올립니다.

여러 셋집이 함께 나누던 마당에서 셋집 아이들과 남녀도 없이 한데 발가벗고 목욕하던 여름날을 떠올립니다. 물 한 바가지를 붓고 손잡이를 힘껏 아래위로 저어주면 시원하게 물을 쏟아내던 펌프와, 그 물에 설걷이도 하고 빨래도 하느라 허리 펼 틈 없었던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아버지에게 혼나고 장독대에 올라 혼자 별을 보며 다른 삶을 꿈꾸던 어느 날의 상상을 떠올립니다.

내가 잊고 버려둔 사이 홀로 사라져버린 그 시절의 마당을 떠올리니 무정한 내가, 시절 탓을 하는 게으른 내가 싫어집니다. 그래서 서너 정거장만 걸어가면 닿을 옛 마을을 찾지 않습니다. 그냥 내 마음에 선명하게만 두고, 아무 상처도 받지 않은 양 잊고만 싶습니다. 이미 무너진 마을을 조문하는 짓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습니다. 허나, 아직 무너지지 않은 마당이 있다면 꼭 지키고 싶습니다.

한양주택에 사는 이들이 지키고 싶은 건, 저마다의 이야기와 저마다의 추억과 저마다의 상상이 담긴 마당일 겁니다. 한숨만 쉬어도 고스란히 옆 식구에게 전해지는 아파트 말고, 방도 아니고 밖도 아닌 그 중간 어름에 슬며시 걸친 마당의 상상을 지키고 싶은 걸 겁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이런 무자비한 세상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나는 참 용서가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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