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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마다의 이야기가 숨쉬는 놀이터
ⓒ 김수자
"이 녀석들, 저리 가지 못해." 경비 아저씨의 호통이 떨어지자 악마구리처럼 떠들던 아이들이 '와~' 하고 흩어집니다. 아파트 마당 한가운데 미끄럼 하나, 시소 둘, 그네 하나의 단출한 놀이터가 있습니다. 백 걸음도 못 되어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는 마당이니 놀이터라 해도 아이 열을 감당하기 힘든 작은 규모입니다. 게다가 시소 바로 옆에 정자까지 놓여 있어 아이들이 뛰놀 공간은 더욱 작아집니다.

그런데도 일요일이면 동네 아이들이 축구공까지 대동하고 모여듭니다. 남자아이들이 공을 차며 뛰어다니는 옆에서, 여자아이들은 그네를 놀고 미끄럼을 탑니다. 더 어린 꼬마들은 시소를 타거나 괜히 소리를 지르며 언니 오빠들 뒤를 좇습니다.

화단으로 들어온 공이 어느 구석으로 숨었는지, 사내 녀석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높입니다. 아마 그 소리에 더 참지 못한 어느 집에서 경비실로 전화를 했나 봅니다.

"한번만 더 오면 그땐 가만 안 둔다." 경비 아저씨가 눈을 부릅뜨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늘 겪는 일에 이골이 났는지 아이들은 별로 서운한 기색도 없이 홀씨처럼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저러고 가지만 어느새 또 모일 걸 아이들도 알고 아저씨도 알고, 아마 항의전화를 했을 어느 집 사람도 알 겁니다. 놀이터를 잃은 아이들이 안쓰럽지만 아이들의 악다구니를 고스란히 견디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저 서로 제 자리에서 제 몫을 할 뿐이지요.

고즈넉해진 놀이터에 젊은 엄마가 유모차를 밀고 나타납니다. 아기를 유모차에서 내려놓습니다. 어린 아기들이 으레 그렇듯 사내앤지 계집앤지 가늠하기 어려운 아기가 뒤뚱뒤뚱 걸음마를 합니다. 아기의 입이 벙긋 벌어지고 지켜보는 젊은 엄마의 얼굴이 환해집니다. 정자에 앉은 엄마를 향해 아기는 온몸으로 걸어옵니다. 머리가 마음을 앞서는 바람에 서너 걸음이면 "콩"하고 넘어지지만, 폐타이어로 만들었다는 푹신한 바닥 덕분에 넘어진 아기도 바라보는 엄마도 편안합니다.

다시 비워진 정자에, 교회를 다녀오는 길인지 검은 성경책을 손에 든 할머니 두 분이 와 앉았습니다. 두 분의 표정이 자못 심각합니다. 점점 말소리가 커지고 빨라집니다. 아무래도 누군가 맘에 안 드는 이가 있었나 봅니다. 주거니 받거니 한참을 그러시더니 어느새 맘이 풀렸는지 무릎을 치며 웃습니다.

오래 전, 어느 마을의 입구를 지켰을 느티나무 아래 정자에서도 저런 풍경이 펼쳐지곤 했겠지요. 문득, 그런 느티나무를 보고 "느티나무가 아니라 정자나무"라고 우겨대던 친구가 떠오릅니다. 속명이니 학명이니 하는 것들이 생활이 붙인 이름 앞에서 다 무색해지는 순간이었지요.

걸레질을 하고 빨래까지 개키고 나자 짧은 가을 해가 슬쩍 기울었습니다. 놀이터에선 여학생 하나가 열심히 줄넘기를 합니다. 여름이 가까울 땐 밤에도, 새벽에도 줄 넘는 사람들이 곧잘 보였는데 한동안 뜸하더니 오랜만에 한 사람이 나섰네요.

신발장에 처박아 둔 줄넘기가 떠오르고 '나도!' 하는 맘이 불쑥 떠오릅니다. 하지만 빙 둘러싼 아파트 건물들 한가운데서 휙휙 줄 넘는 소리를 울리며 잘하지도 못하는 줄넘기를 할 엄두는 차마 내지 못합니다. 여학생은 꽤 건강체인 모양입니다. 두 단 뛰기까지 거뜬히 해내고는 집으로 들어갑니다.

해가 지고 아파트 마당가 가로등에 불이 켜집니다. 집집마다 동화처럼 따스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시간입니다. 저녁을 지어 먹고 쓰레기를 챙겨 오늘 처음 집을 나섭니다. 밤바람이 선뜩합니다. 쓰레기를 버리고 그냥 들어오기가 심심해 놀이터로 향합니다.

그런데 놀이터에서 제일 어둑한 그네 뒤편에 시커먼 물체가 있습니다. 어두워 잘은 몰라도 꽤 어린 커플이 몹시 추운 듯 잔뜩 몸을 붙이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밤의 놀이터에서 사랑을 키우던 기억, 참 멀구나 싶습니다. 그들의 속삭임에 발소리를 죽이며 뒤로 물러납니다. 이토록 놀이터에서 체온을 나누는 어린 사랑이 그립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합니다.

고층 아파트 건물에 빙 둘러싸인 작은 놀이터입니다. 그곳에 그네 하나, 시소 둘, 미끄럼 하나, 지붕 달린 정자 하나가 있습니다. 그곳에 골목을 잃은 아이들이 모이고, 사람이 그리운 어르신들이 모이고, 생활을 나누는 식구들이 모이고,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이 모입니다. 놀이터에서 지난 세월과 다가올 세월을 봅니다. 놀이를 멈추기엔 아직 이른 세월도 깨닫습니다.

희미하게 숨죽인 달이 혼자서 오래된 전설을 지키는 밤, 나는 당신과 잊었던 놀이를 다시 시작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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