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저마다의 아픔을 앓는 방들
ⓒ 김수자
공간엔 주술적 힘이 있구나, 생각한 건 문병을 다녀오는 길에서였습니다. 누구에게도 쉬 고개 숙이지 않던 분이 병원에 들어와 환자복을 입더니 몰라보게 고분고분해졌습니다. 안쓰러운 맘이 드는 한편, 새삼 문병 온 보람이 느껴지는 듯하여 으쓱해집니다.

2인용 병실은 똑바른 직사각형입니다.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어서 ‘옆 침대’가 아니라 ‘앞 침대’라고 해야 옳은 구조입니다. 앞 침대의 환자도 은발의 노인입니다. 내가 문병하는 환자보다 더 나이가 드신 듯한데, 어젯밤에 들어와서 어디가 아픈지 아직 소문이 돌지 않은 모양입니다.

병원에서는 비밀을 갖기 힘듭니다. 주로 정형외과 환자들이 입원한 이 6동 병동만 해도 한 이삼 일 지나면 누가 누구고, 무슨 병을 앓으며, 입원한 지는 얼마나 되고 간병인은 누구인지 다 알게 된다고, 환자를 돌보던 간병인이 말합니다.

“요즘은 자식이 수발 드는 일이 없어.”

큰병은 아니지만 그래도 입원을 했는데 잘 들여다보지도 않는 자식들이 섭섭한지 환자는 아까부터 여러 번 그 말을 합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문병하는 환자도 그 앞 침대 환자도 모두 전문 간병인이 수발을 들고 있습니다. 하긴 내가 알기만도 이 분이 입원하신 게 벌써 서너 번 됩니다.

꽤 심각한 교통사고도 있었고 암으로 대수술을 받은 적도 있었는데, 이번엔 가벼운 사고라 하니 자식들 입장에선 생활을 팽개치고 달려들 엄두를 낼 필요는 없겠지요. 하지만 환자복을 입으면 사람은 온순해지는 한편 어리광도 느는가 봅니다. 평소에 그리 씩씩하던 분이 서운한 맘을 비치며 얼핏 눈물을 보입니다.

“전 자식도 없으니 아예 기대할 수도 없는 걸요.”

위로라고 던진 말이 그래도 효험이 있었습니다. 환자는 금세 기운을 내서 자식을 갖지 못한 나를 위로하고 걱정합니다. 무심한 자식들 때문에 쓸쓸해하던 것을 어느새 잊은 모양입니다. 위로와 걱정을 듣는 사이, 나 역시 머지않은 미래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며 마음이 울울합니다.

갓 스물이 되었을 때 복막염으로 병원에서 일주일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맹장이 터지도록 기를 쓰고 참은 덕에 얻은 훈장이 지금도 배 위를 기어다닙니다만, 그래도 그때 병원에서 지낸 날들은 좋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잘생긴 의사 선생님을 때마다 보는 즐거움, 외과 병동에 들어온 기념으로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읽으며 언젠가 ‘칼바도스’ 한 잔을 꼭 마셔 보리라 다짐하던 기억(거의 십년이 지나서 이 소원을 어느 작은 술집에서 이뤘지요), 비가 오던 날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혼자 젖은 동대문을 내려다보며 병자의 감수성을 느껴보던 날까지...

아프지만 죽을 병도 아니고, 젊고 멋진 인턴들이 즐비한 병원에 있는 것이 스무 살 처녀애에게는 슬프다기보단 꽤 근사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스물이 마흔이 되고 마흔이 예순이 되면서 병실은 두려움의 공간이 됩니다. 찾는 이 하나 없이 혼자 맛 없는 병원식을 먹을 때 울지 않을 자신이 내겐 없습니다. 앞 침대의 은발 환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간병인에게 뭔가를 달라고 합니다.

입이 말랐던 모양인데, 텔레비전에 넋을 빼앗긴 간병인이 한참을 흘려 들었나 봅니다. 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니 속상하고 답답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화장실 한 번을 가려고 해도 공사가 큽니다. 이래저래 사는 게 쓸쓸하고 무서워집니다. 병실에 관한 환상은 모두 날개를 접고 이젠 그 하얀 공포를 견디는 일만 남았는가, 화장을 지운 환자의 갑자기 늙은 얼굴이 견디기 힘들어집니다.

“입이 마른 데는 귤이 제격이에요.”

문병 오며 사온 귤을 앞 침대 환자에게 주라고, 환자가 눈짓으로 재촉합니다. 귤 세 개를 앞 침대 은발 환자에게 건넵니다.

“고맙수.”

사느라 바쁜 자식들을 둔 두 노인이 나란히 놓인 침대 위에서 서로를 느끼며 서로를 위로합니다. 삶은 늘 그렇듯 도처에 비상구 하나씩을 숨겨 두고 있습니다. 내 안의 쓸쓸함이 깊으면 잊었던 타인의 외로움이 보이고, 죽음이 가까우면 삶이 슬며시 기운을 차립니다. 그렇게 처음과 끝이 인사하고 끝이 처음을 마중하는 게 사람살이인가 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