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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공부와 따뜻한 눈을 가르쳐준 선생의 명문들
ⓒ 김수자
선생이 가신 지 일년이 지났답니다. 아침 신문에 기름기 하나 없는 선생의 마른 얼굴이 크게 실렸습니다. 기린을 닮은 선생의 얼굴. 이마엔 고민의 흔적이, 눈엔 한없는 연민이 서렸습니다.

믿었던 것들이 조금씩 흔들리던 90년대 초 어름이지 싶습니다.

금지된 책들이 당당히 서점에 진열되고 시대가 청춘을 품었던 무렵, 나는 처음으로 '우리'라는 호명을 긍정하고 내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 기를 썼습니다. 의심이 없었기에 고단을 모르던 시절이었지요. 돌멩이처럼 단단한 희망들이 모여 우뚝한 돌탑을 세운 듯했습니다. 허나, '우리'의 탑에 시간의 이끼가 머물기도 전에 돌 틈은 벌어지고 탑은 휘청거렸습니다. 비로소 우리에 대한 의심이 생겼고, 고단해졌습니다.

약속된 모임에 거짓 핑계를 대고 나는 전주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혼자 길을 나서면 뭔가 보이지 않을까, 아마 그런 심사였겠지요. 하지만 장소를 옮겼다고 사람이 쉬 바뀌겠습니까. 하릴없이 발품을 팔다가 날이 저물었습니다. 혼자 여관 잠을 자기가 서먹하여 아는 이의 집에서 불편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집을 나왔습니다. 그러곤 무작정 낯선 길을 걸었습니다. 무얼 찾는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길손에게 길은 그저 길로 이어질 뿐이었지요.

얼마나 걸었는지,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그냥 눈에 띈 작고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밥 때가 지난 식당은 고즈넉했습니다. 콩나물국밥인가를 시켰던가, 말수 적은 주인 아저씨가 국밥을 내 앞에 놓아주고 입구 쪽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대의 열망이 탄생시킨 <한겨레신문>이었습니다.

신문을 뒤적이던 아저씨가 한 곳에서 눈길을 멈췄습니다. 아저씨는 꼼꼼하게, 손가락으로 문장을 따라가며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무렵 <한겨레>에 연재되던 선생의 칼럼이었습니다. 동료들 사이에서 선생의 사상적 성향에 대해 차가운 말들이 늘어가던 때였지요.

그런데 낯선 지방도시의 작은 식당 한구석에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밥벌이를 할 것 같은 중년의 남자가 손가락으로 글줄을 좇으며 선생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 그리고 눈앞이 환해졌습니다.

나는 국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표현을 빌자면, 소가 되어 인간을 미는 삶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선생은 <중앙일보>에 칼럼을 연재하였고, 나는 조그만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름도 잘 모르는 작은 출판사라 속상한 일이 꽤 있었지요. 뭣보다 열심히 만든 책이 소리 소문도 없이 찬밥 신세가 될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에 출근하니 모든 직원이 <중앙일보>를 보며 화색이 만면해 있었습니다. 선생이 쓰는 칼럼에 우리 책이 소개된 것입니다. 선생은 장문의 리뷰를 통해 내용과 편집을 알뜰히 소개하고 좋은 책이란 칭찬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선생께 책을 보내드린 일도 없는데, 놀랍고 벅찼습니다. 직접 찾아뵐 자신은 없어 전화를 드렸습니다.

"저희 책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좋은 책을 내주니 고맙지요."
"저희가 책도 못 보내드렸는데…."
"아뇨, 제가 볼 책이니 제가 사야지요. 그런데 혹 옆에 그 책을 갖고 계십니까?"


나는 다급히 책을 찾았습니다. 선생이 말했습니다.

"제가 읽다보니 두어 군데 오류가 있습니다. 말씀드릴 테니 저자분께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혹 지금 받아 적기가 곤란하며 제가 표시해 둔 제 책을 보내드리지요."

스승, 이란 말이 그냥 떠올랐습니다. 정말 큰 스승이시구나, 선생의 지적을 받아 적는데 목울대가 뜨거워졌습니다. 알량한 지위를 내세워 공짜 책을 요구하는 사람과 작은 허물도 크게 꾸짖는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내게, 그리하여 그들을 탓하며 인간에 대한 환멸을 서슴없이 떠들어대던 내게, 선생의 행동은 고스란히 가르침이었습니다.

선생님, 정운영 선생님, 선생님은 저의, 우리들의 영원한 스승이십니다. 선생님을 마음에 품고, 소가 되어 인간을 끝까지 밀겠습니다.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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