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04 15:24최종 업데이트 24.04.04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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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지난 3월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민주당 의원이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공공 주택을 위한 그린 뉴딜'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나는 선출된 공직자나 공인으로서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말하는 겁니다. 엄마가 되고자 꿈을 꾸는 여성은 행복과 슬픔이 교차하는 느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알고 있고 우리의 행동이 아이들이 마주할 절망적인 가능성을 만드는 데 일조를 하기 때문입니다." -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lexandria Ocasio-Cortez, AOC) 미국 하원의원

"우리의 민주주의는 정말로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요?" - 장혜영 국회의원



나는 2020년 2월 16일 자 <경향신문> 칼럼을 통해 AOC 하원의원과 장혜영 국회의원을 소개한 적이 있다. AOC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스타 진보 정치인이고 장혜영은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2021년 선정한 세계 100인의 떠오르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둘 다 밀레니얼 세대로서 기후위기와 복합불평등, 그리고 평화공존 등 새로운 도전 과제에 대한 미래 정치를 상징한다. 그들은 취약한 존재들에 대한 비통한 마음을 가지고 의회에서 현 모순구조에 대해 송곳 질의를 하며 대활약을 했다.

하지만 다시 선거에 도전한 그들 앞에는 거대한 벽이 마주하고 있다. 나는 사실 승리 여부를 떠나 '밀레니얼 세대' AOC가 '조용한 세대' 조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 경선에서 멋지게 겨루는 모습을 보기 원했다. 하지만 소프트 파시즘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할지도 모르는 위험 앞에서 미국 민주당 주류들은 AOC가 목소리를 낮추고 오직 바이든 지지만을 해주길 요구하고 있다.

나는 사실 당선 여부를 떠나 밀레니얼 장혜영이 소위 586 운동권들과 진보의 대표 자리를 놓고 멋지게 겨루는 모습을 보기 원했다. 하지만 윤석열 행정부의 반(反)자유민주주의 통치 앞에서 한국의 민주당과 일부 기존 정의당 주류들은 장혜영이 오직 윤석열 심판만을 외쳐주기를 요구하고 있다.

세계화 물결 '루저'들, 트럼프 도구로 복수극
     
나는 이번 미국과 한국 선거와 그 선거를 주도하는 정당들에 점차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 그저 오래된 정치질서 간의 쟁투만 부각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좁고 어두운 틈새에서 미래가치를 심는 이들은 그 성장을 응원하고 싶다. 미국 시민권이 없어 AOC는 후원하지 못하지만 장혜영 의원은 후원회장을 맡았다.

도대체 왜 미국과 한국의 이번 선거철에 유달리 미래가치를 대표하는 이들이 전면에 부상하지 못할까? 아니 한국은 미래를 선도하는 정치인에 주목하기는커녕 청년 후보들을 주변으로 밀어내거나 막장 공천에서 철저히 짓밟았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잘못된 걸까?

이에 대한 내 답은 오늘날 미국 민주당의 위기는 결국 운동으로서의 정당 역할을 잃어버리고 더 나은 공화주의적 가치를 세워나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미국 민주당은 80년대 선거에서 부단히 패배하는 소수정당이 되면서 당시 대세인 신자유주의를 주도적으로 수용했다. 나는 당시 이 길이 일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정치란 연구실의 학문과 달리 시대적 제약 속에서 가능한 길(레이건 보수주의 속 진보)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일부 전술적 수용이 아니라 아예 신자유주의 가치와 문화를 온몸으로 수용하는 기득권 정당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선거 캠페인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아니라 고급 아르마니 정장을 입은 컨설턴트들의 마케팅 게임으로 변질했다. 다시 운동의 정치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실제로는 경제위기 책임이 있는 금융자본을 구제해 대마불사의 신화를 창출했다.

결국 세계화와 다원화의 물결에서 '루저' 취급을 받던 이들은 트럼프를 도구로 삼고 피의 복수극을 시작했다. 좌파 대신에 부동산 백만장자이자 내로남불의 나르시시스트가 기득권(Deep state) 해체를 주장하는 우파 포퓰리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국 진보의 위기도 결국 운동으로서의 정당 역할을 잃어버리고 더 나은 가치를 세워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찾아왔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 후보는 애초에 국제통화기금(IMF) 재협상을 주장하며 신자유주의에 저항했다. 하지만 일부 좌파까지 김대중 비난에 합류하면서 그는 대세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여의도를 활보하는 이들 중 그때 누가 그 왼쪽에서 싸웠는지 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장혜영 국회의원이 3월 31일 서울 마포구에서 유세를 하고 있다. ⓒ 녹색정의당

 
그 이후 한국 사회는 잔인한 미국 신자유주의 모델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각자도생, 각자도사의 사회로 악화했다. 취약한 자들과 함께 싸우는 운동으로서의 정당과 공존공영의 공화주의 정신이 약화한 틈새에 '부자되세요' 구호를 앞세운 이명박의 부자 포퓰리즘, 기본소득을 브랜드로만 써먹은 이재명의 좌파 포퓰리즘, 그리고 소위 586 기득권 해체를 주장하는 검찰 포퓰리즘이 치고 들어 왔다. 다양한 포퓰리즘과 그 변종이 화려하게 입점한 백화점을 보려면 한국을 방문해야 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 이후 미국과 한국의 민주당은 이 위기에 전혀 다른 대응책을 선택했다. 미국의 민주당은 운동 정신은 약화했지만 적법한 절차와 개인의 권리 등 최소한의 헌정주의 가치는 지키려고 한다. 기존 자유주의 헌정주의를 다 무너뜨리는 트럼프에 맞서 자신들은 자녀 스펙을 조작하거나 법무부를 진영 싸움의 도구로 삼는 괴물이 되지 않으면서도 선거에서 승리하려고 한다.

그리고 바이든과 같은 중도파도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과 AOC의 운동적 가치를 일부 수용하며 더 진보적인 민주당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야심 찬 인플레 감축 법안은 기후위기 극복에서 중도-진보 연합의 귀중한 성취이다. 미국 극우들도 입으로는 이 법안을 공산주의라 비난하면서도 발로는 자기 주에 더 많은 지원금을 유치하려고 광분한다. 그 결과로 2020년부터 일련의 선거에서 민주당은 승률이 매우 높다.

노무현과 김근태의 민주당은 이제 없다
       
반면에 놀랍게도 한국의 민주당은 그간 오랜 벤치마킹의 대상인 미국 민주당의 길이 아니라 정반대로 트럼프 공화당의 길을 선택했다. 즉 운동도 약화하고 가치도 버렸다. 오직 권력 게임과 복수만 남았다. 기존 자유주의를 다 무너뜨리는 윤석열 시대에 맞서 자신들이 내로남불의 괴물이 되어 그들을 심판하고자 한다.

기존 김대중과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가치 추구 정당의 흐름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직 자신의 사당화에 올인하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오늘날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로써의 징후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심지어 선거 승리 여부도 사당화보다는 부차적 관심으로 전락한 듯하다. 이 사당은 미국 바이든과 달리 녹색정의당과의 넓은 연합 대신에 통제 가능한 위성정당을 통해 자유주의 가치가 의심스러운 세력을 선택했다.

그리고 화려한 복수극으로 등장한 조국 전 교수는 정치의 필수요건인 최소한의 도덕과 자기성찰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마치 드라마 <모범택시>의 주인공인 양 더 세고 더 진보적인(모두가 용이 될 필요가 없다던 이가 교육의 기회균등을 주장하는 아이러니) 태도를 표방하며 화려하게 귀환했다.
소위 586세대 주류의 감성을 극단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유시민 작가는 정치에 왜 도덕이 개입하냐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한다.

천민 보수가 버린 품격과 윤리에 맞서 더 인간다운 사회를 추구한 노무현과 김근태의 민주당은 이제 없다. 진영을 전투적으로 지키더라도 최소한의 도덕을 유지하며 '미국의 혼' 캠페인을 전개하는 바이든의 민주당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한국에서는 연일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한국 민주당의 선거 승률은 미국 민주당보다 좋지 않다. 물론 총선에서는 승리할지도 모르지만 과연 진보의 가장 강한 무기인 인간다운 가치를 버리고 기득권이 더 잘하는 힘 대결을 선택한 그들이 2027년과 2032년 대선에서 미국 민주당보다 실용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까? 글쎄 나는 회의적이다.
 

2023년 8월 16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시행 1주년 행사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물론 미국 민주당이 선택한 경로도 그리 희망이 보이지는 않으며 우리의 모델이 아니다. 양당제의 구심력이 너무 강한 기득권의 나라 미국에서 AOC와 같은 세력은 부단히 주류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 압력에 굴복해야만 한다. 더 평등하고 더 평화로운 노선을 채택하려면 외부에서 거대한 사회운동의 압력이 일어나야 하지만 오늘날 제국의 황혼인 미국에서 이는 오지 않는 '고도'이다. 그저 바이든과 AOC가 부단히 비틀거리며 연합하거나 갈등하며 힘겹게 트럼피즘과 싸우는 비탈길만 남아있다.

과연 한국의 민주당과 제3세력들이 선택한 길은 앞으로 미국보다 희망이 있을까? 나는 비관적이다. 한국도 양당제의 구심력이 강하고 과거 김대중, 노무현, 김근태, 노회찬의 가치 기반 세력들이 여의도에서 거의 멸종 상태이다. 이를 극복하겠다는 제3세력들과 기존 정의당도 그리 새롭지 않고, 전략적으로 유능하지도 않다. 이번 위성정당 소동 과정에서 소위 시민사회 일각이 취한 행동을 보면 여의도 외부의 에너지도 그리 건강하지는 않다.

최소한 2027년까지는 그저 피비린내 나는 권력 게임과 이재명과 조국 재판을 둘러싼 불확실한 사법 정치만 보게 될 것 같다. 미국의 트럼프를 둘러싼 기소, 특검, 법정 줄다리기, 지연전술, 판사 공격과 판사의 동요 등을 앞으로 전부 한국에서도 보게 될 것 같다. 앞으로 넷플릭스보다 더 짜릿한 현실 드라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꼬인 매듭을 단칼에 자를 순 없어
     
그럼 더 나은 대안은 없는가? 이미 오랫동안 꼬일 대로 꼬인 매듭을 단칼에 자르는 건 알렉산더 대왕 전설에나 존재한다. 언제나 역사의 진전은 미래가치를 선도하는 이들이 비틀거리면서도 부단히 성장하며 다른 이들을 견인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번 미국 대선 결과가 어떻게 되든 미래 정치 블록이 잘 성장하기를 희망한다. AOC 등 밀레니얼과 Z세대 정치인들이 지금의 지나치게 이념적인 거친 톤을 조절해 나가며 더 많은 미국인에게 설득력 있는 가치를 제시하고 의제를 형성해 나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버니 샌더스와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등 진보 중장년 세대들이 이들을 지원하고 협력하는 '노장청' 연대를 만들어 내야 한다.

한국에서도 총선 결과가 어떻게 되든 미약하게 산재하는 미래 정치의 다양한 씨앗들을 살려나가야 한다. 밀레니얼과 Z세대 정치인들이 향후 10년간 더 성숙하게 다수의 시민들과 함께 설득력 있는 가치와 의제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 이들을 지원하면서 미국보다 더 힘들게 노장청 연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듯이 AOC와 장혜영은 우리가 지금 어떤 행동으로 책임 있게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인지를 심각하게 묻고 있다. 이 질문에 모든 세대와 모든 정치세력이 실천적으로 대답해야 한다.
 

안병진 /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 안병진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바이오크라시(생명 정치 질서) 학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관심영역은 미국과 한국 대통령제 정치를 비교하며 더 나은 가치에 기반한 정치질서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최근 관심은 이론적으로 기후위기 등 미래가치를 선도하는 전환 정치론이며, 실천적으로는 이를 위해 장혜영 의원의 공동 후원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 <노무현과 클린턴의 탄핵 정치학> 등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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