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1 19:43최종 업데이트 23.05.12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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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월간 옥이네>를 발행하는 고래실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 꾸렸던 텃밭 활동 때의 밭 풍경. 이때는 토종과는 상관없는 활동이었지만, '소비자'로만 머물렀던 이들이 농사의 고단함을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가 있었다. ⓒ 박누리

 
올해는 농사를 짓는다. 과연 이것을 '농사'라 부를 수 있을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하겠으나. 

충북 옥천군 농촌신활력플러스사업 일환으로 진행하는 '옥천토종씨앗학교' 이야기다. 농촌신활력플러스사업은 사람과 민간조직, 시설 등 지역 자원을 발굴‧활용해 지역 특화산업과 사회적 경제 조직을 육성하고 지역 공동체의 자립기반을 구축하는 농림축산식품부 사업이다. 옥천의 경우 로컬푸드 운동으로 축적된 다양한 자원을 바탕으로 농업, 복지, 교육, 문화 등 각 분야의 먹거리 활동가를 키우고 민간-중간지원조직-행정 간 연결망을 강화해 먹거리 복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신활력플러스사업 활동으로 굳이 토종씨앗을 이야기하는 이유를, 농업과 농촌에 관심 있는 이라면 금세 이해할 것이다. 화학비료와 유전자조작 식품을 개발하고 종자를 개량해 각국에 판매하는 생명공학기업-몬산토니 카길이니 네슬레니 하는-에 빼앗긴 농민의 주권을 토종씨앗을 통해 회복해보자는 것이다.

당장 농업‧농촌의 문제를 해결할 순 없을지라도 토종씨앗과 종자주권을, 나아가 우리 농업과 식량주권을 일반 소비자 역시 공감하는 바탕을 만들자는 게 일단의 목표다. 이 활동을 계기로 토종씨앗 보전을 위한 조례와 직불금 등 관련 정책을 마련하고 지역 로컬푸드직매장과 공공급식에서 토종 농산물 및 가공품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면, 고작 150여 평 텃밭에 심은 꿈이 너무 크다고 면박 받으려나. 어찌됐든 지난 3월 막을 올린 이 활동은 5월부터 본격적인 텃밭 공동 경작에 들어갈 예정이다. 

옥천토종씨앗학교는 재배와 수확‧채종까지 농사 전 과정을 밭에서 직접 진행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흔히 하는 '텃밭 농사'의 종자를 토종씨앗으로 삼은 것으로 이해하면 쉬울 듯하다.

그래서인지 전체 활동 계획 수립 및 참가자 모집 단계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나 농민보다는 일반 주민 참여가 더 눈에 띈다. 농번기가 이제 막 시작됐고(사실 농업은 흔히 '농한기'로 알고 있는 겨울을 포함해 사시사철 일손이 필요한 분야다) 앞으로는 내내 바빠질 일만 남았으니, 농민 입장에서 이런 활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텃밭의 '낭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올해 진행하는 옥천토종씨앗학교에서 기르게 될 토종씨앗 '개골팥'. 지역에 따라 '까치팥'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 박누리

 
올해 옥천 사람들과 함께 진행할 토종 농사를 앞두고 지역 안팎으로 관련 전문가들을 몇 차례 만났다. 이 중에는 과거 옥천에서 토종 작물을 길러온 농민들도 있었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새삼 '뜨끔'했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콩이고 팥이고, 토종으로 다양한 종류를 길렀잖아요. 저도 얼마 전까지는 토종벼도 하고 토종콩도 몇 종류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다 중단했죠. 수확량은 물론이고 판로 확보도 쉽지 않으니까요. (...) 식량주권 차원에서 토종종자에 대한 육성은 분명 필요해요. 하지만 개별 농가가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은 게 현실이에요. 당장 생산비도 빠지지 않는데요."

또 다른 농민의 이야기는 뼈를 때리는 듯 아팠다. 

"기후재난에 생산비 상승에... 쌀값이니 뭐니 농산물 가격도 제대로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토종이요? ... 농민들 입장에서는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식량자급률 40%대, 곡물자급률 20%대를 간신히 웃도는 나라에서 농산물 가격마저 내팽개친 상황은 농민들을 더욱 경제적 궁핍으로 몰아넣는다. 수십 년째 1천만 원 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연평균 농업소득(월평균이 아니다)은 이를 그대로 반영한 '수치'다. 먹거리 생산자인 농민이 정작 농업으로는 먹고 살기 어렵다니, 이 얼마나 우리 사회의 모순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현실이란 말인가. 

국산 농산물 가격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분별한 농산물 수입까지, 우리 역사의 농촌‧농민‧농업 수탈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생산비 폭등과 쌀값 하락 대책을 마련하라는 요구에 포퓰리즘을 운운하는 것을 보라).

이러니 농민들 입장에서 '토종'을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과는 한참 동떨어진 일로 비춰질지 모를 일이다. 토종이든 뭐든 텃밭 농사를 하는 이들이 빠지기 쉬운 낭만을 경계해야 할 이유다. 나름대로는 '생명을 살리고 건강한 먹거리를 전파하겠다'는 활동이 누군가의 어려운 현실을 고려하고 있는지 말이다. 

내 하루에 없어서 안 될 농촌을 기억하며
 

2020년 <월간 옥이네> 코너로 진행했던 '토종씨앗 영농일지’'때 기른 토종오이. 노각으로 키워 무쳐먹으면 향기와 맛이 일품이다. ⓒ 월간 옥이네

 
여전히 현실은 팍팍하지만 반가운 소식도 있다. 농어민기본소득전국운동본부가 청년농어민기본소득 사회실험을 시작한다는 소식이다. 그 대상이 청년으로 한정돼 있고 기본소득 금액도 월 30만 원 정도로 높진 않지만 지금과 같은 농업 현실을 돌파할 하나의 출구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그동안 끊임없이 외쳐온 농어민기본소득 필요성을 실제로 보여주는 만큼 이후 정책 도입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기대가 모아진다. 

이 실험을 앞두고 옥천을 비롯한 충북 남부3군 지역 청년 농민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수소문 중이지만 현재까지 적절한(혹은 실험 참여를 자원하는) 청년 농민을 만나진 못하고 있다. 그만큼 농사를 짓는 청년이 없다는 이야기이고, 현재 세대에게 농업과 농촌은 미래의 선택지로 고려되기 어렵다는 현실의 방증일 테다. 어쩌면 오늘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농업과 농촌의 어려움만 너무나 크게 인식할까 염려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오늘 당신의 하루에 없어서는 안 될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촌과 농민들을 기억해 달라는 당부다. 

이와 함께 농촌에 살며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한 사람으로 기억해야 할 질문도 담아본다. 무작정 농산물을 수입해놓고 농민들에겐 '왜 그렇게 농사를 많이 지었냐'고 윽박지르는(실제로 '과잉생산'도 아니기에 더욱 억울하다) 상황에서, 생산량도 소비량도 갈수록 떨어지는 국내 농업 상황에서, 우리 토종 농사가 올해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올 연말 토종텃밭 수확을 마친 후에도 여전히 농사의 'ㄴ'을 알지 못한 상태이겠지만, 그럼에도 농민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마음의 자리가 우리 안에 돋아나길 바라본다. 해를 거듭할수록 어려워지는 농업 현실에서도 여전히 모를 심고 밭을 일구는 농민들을 기억하며. "내년엔 진짜 그만둘란다"고 말하면서도 생명의 힘을 믿고 흙과 땅을 지키는 사람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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