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행자가 찬 음식 먹으면 탈나는 지 애비를 위해 전자레인지로 돌려 녹아버린 고구마 케이크
송성영
노래만 할 줄 알지 세상 물정에 어둔 촌놈, 큰 행자. 차게 먹도록 돼 있는 고구마 케이크를 찬 음식에 탈이 나는 지 애비에게 따듯하게 데워준다고 전자레인지에 돌렸습니다. 그랬더니 전자레인지에서 나온 케이크가 생크림이 줄줄 흘러나올 정도로 다 녹아 버렸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들 와 하하하 웃어가며 숟가락 들고 맛나게 퍼 먹었습니다. 먹을 게 별로 없으면 모든 것이 맛있습니다. 어수룩한 큰 행자를 놀려가며 진수성찬 따로 없이 다들 기분 좋게 맛있게 먹었습니다. 군 생활 하고 있는 작은 행자 인상이가 빠져 아쉽긴 했지만 나름 행복한 회갑 잔치였습니다.
다음날 큰 행자는 친구들 만나러 서울로 콧바람 쐬러가고 나는 오랫동안 버텨온 사랑니가 흔들려 읍내 치과에 갔습니다. 사랑니를 뽑고 나서 거즈를 물려 놓고 간호사가 항생제와 진통제 나흘치 처방전을 내밀었습니다.
"이틀 치만 처방해 주세요. 내가 위가 좋지 않아 약을 너무 많이 복용하면 안 될 것 같네요."
하루치만 처방해 주세요. 하려다가 간호사에게 미안해 이틀 치만 처방해 달라고 했는데 이틀 치가 아침점심저녁 여섯 번 복용할 양이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두 차례의 위기와 가끔씩 통증이 찾아오곤 했는데 고집스럽게 단 한 차례도 위장약이나 진통제 따위를 복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부실한 면역력으로 발치한 자리에 염증이 생길 가능성을 배제 못해 딱 한 차례만 복용했습니다. 그럼에도 일주일 넘게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면역력이 형편없다는 암환자가 이 정도이니 건강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항생제나 진통제는 꼭 필요한 만큼만 복용하는 게 좋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입니다.
사랑니 뽑힌 자리의 피를 멈추기 위해 거즈를 물고 산막에 돌아오자 대전에 계시는 엄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아이고 셋째야! 깜박 했다. 달력에 표시를 해놨는데도 니 환갑을 깜박 했구나. 미역국은 먹었냐?"
"아이구 인효가 푸짐하게 차려 줘서 잘 먹었어요. 걱정마세요."
"아이구 야야 어쩌냐!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어떡허냐!"
93세 노모는 내가 태어난 날을 60년 동안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니 내 생일뿐 아니라 칠순이 지난 큰 형님에서부터 7남매 모두의 생일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자식들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기 위해 회갑이 지날 무렵까지 평생 일손을 놓지 못했던 엄니, 당신의 회갑 날에는 당신 스스로 모은 돈으로 주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7남매와 그에 딸린 손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복을 새로 해 입혔습니다.
구순하고도 삼년이 지났지만 엄니는 회춘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영민합니다. 엄니 앞에서 모두가 쉬쉬하여 셋째가 이혼 했다는 사실이나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지만 옷장 어느 구석에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숨겨 놓으셨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하십니다. 거기다가 여전히 부엌일을 합니다. 자식이나 손자들이 찾아오면 손수 밥상을 차려 주실 정도로 정정합니다.
"내가 복이 많나 보다. 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그러셨다. 자신의 몫까지 살다가라구. 그래서 내가 이리 오래 사나 보다."
평생 농사꾼이었던 아버지는 회갑이 찾아온 그 해 돌아가셨습니다. 농토가 전부였던 마을길에 신작로가 들어설 무렵 농기구 대신 술병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위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위출혈로 쓰러졌던 아버지와 닮은꼴이지만
그 무렵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수업 중 황급한 호출로 어린 여동생의 손을 잡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 계신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병원에 찾아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 보다 두 배가 넘는 지게질을 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던 아버지는 그 며칠 후 산소마스크를 벗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