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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도와 서도로 이루어진 독도의 풍경. 독도 수비대는 동도 꼭대기에 있다.
ⓒ 정만진
오래 전부터 인디언이 평화롭게 살아온 땅에 문득 나타난 서양인들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그것이 호들갑으로만 끝났다면 다행이다. 그들은 인디언을 학살하고 그 땅을 자신들이 처음 살게 된 곳인 양 호도한다. 이른바 '신대륙'이 되는 것이다.

울릉도. 여러 유적 분포로 보아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하지만 역사에는 그들의 삶이 나타나 있지 않다. 울릉도는 그저 신라 지증왕 13년(512년)에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했다고 처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 후 고려 때인 1018년, 동해안 일대를 침탈한 여진이 울릉도까지 쑥대밭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래도 1950년 한국전쟁 때 울릉도에는 살육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다행한 일이다. 다만 울릉도 아름다운 바닷가 곳곳에 철조망이 쳐져 있고, 시퍼런 바닷바람을 맞으며 병사들이 밤새워 망망대해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병사들은 누구를 지키나. 왜구(!)도 아니고, 같은 동포인 북한의 침략을 지키고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지켜야 마땅할 국군이 울릉도 바닷가를 지키고 있는 이 분단의 비극!

그런 점에서 독도는 울릉도와 다르다. 독도 수비대가 독도 중 동도에 머무르고 있지만, 그들은 북한 간첩이 아니라 국토를 지키고 있다. 국민의 군대가 국가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주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우리가 가끔 독도를 방문하여 그들의 씩씩한 젊음을 바라보며 느긋한 신뢰를 보내는 것은 국민으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이리라.

물론 울릉도 도동에서 배를 타고 독도로 닿았을 때, 동도 접안시설에 마중 나오는 수비대를 바라보면서 우리 국민들은 누구나 수비대가 지키는 것이 일본이라고 생각한다. 독도는 울릉도에 비해 우리 국민들의 뇌리에 분단과 전혀 무관한 이미지로 박혀 있는 것이다.

▲ 독도로 가는 바다의 길. 미군은 이 곳에서 고기를 잡는 우리 어민들에게 폭격을 가했다.
ⓒ 정만진
하지만 아니다. 1948년 6월 8일. 독도에 미군 B29 폭격기가 나타나 평화롭게 고기잡이를 하는 우리 어민들을 향해 네 차례에 걸쳐 무자비한 폭격을 퍼붓는다. 심지어 저공비행을 하여 기관총 사격까지 자행한다. 수십 척의 고깃배가 침몰하고, 수십 명의 어부들이 죽는다(당시는 통계 개념이 없던 시절이다). 물론 그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되어 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다.

미군은 왜 아무 이유도 없이, 평화롭게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향해 무자비한 폭격을 퍼부었을까. 이에 대해 주강현은 저서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통해 '독도 문제가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이 일본의 독도 지배를 마음속으로나마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미군이 독도 주변에서 고기 잡는 우리 국민을 향해 마구잡이 비행기 폭격을 한 까닭은 독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분석이다.(미국은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말한 적은 있지만 한국 땅이라고 발언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즉, 독도는 한·일의 문제가 아니라 한·일·미의 문제이며, 미국이 거대한 아시아 전략 속에서 독도를 판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독도는 우리의 1945년 독립, 1950년 전쟁, 그 이후의 분단과 무관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하여튼 폭탄을 퍼붓고 저공비행을 하면서 기관총까지 쏘아댄 미군의 만행으로 많은 어부들이 숨졌다. 1951년 6월 8일,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 중 서도의 자갈밭에 위령비를 세운다. 이 자리에는 경북 도지사도 참석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위령비는 쇠망치로 파손되어 바닷 속에 내던져진다. 한국전쟁의 혼란을 틈타 1953년 일본이 독도에 상륙하여 위령비를 파괴한 것이다. 그러고는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표지판을 세운다.

▲ 독도 위를 휘도는 이 새는 안정복의 혼일까.
ⓒ 정만진
미군의 폭격은 그 뒤에도 연이어 발생한다. 1952년 9월 15일, 미 극동사령부 소속의 폭격기가 나타나 폭탄을 투하했다. 다행이 조업 중이던 어부들의 살상은 없었다. 9월 22일에는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 일행이 독도 부근으로 항해하였는데 또 다시 4대의 폭격기가 나타나 해상에 폭탄을 투하하는 바람에 조사단은 황급히 울릉도로 귀환하였다.

일본은 자기네 땅도 아닌 오키나와를 미군 기지로 조차시켜 놓았다가 결국 일본 영토로 환원하였다. 미국은 2차대전 종료시 독도를 일본영토로 규정하려다가 영국 등 다른 연합국의 저지로 실패한 뒤 일본과의 강화조약에서 독도를 한국 땅으로도 일본 땅으로도 표기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독도의 푸른 바다에는 지금도 미군 폭격으로 죽은 우리 어부의 피와, 외세와 분단의 상처가 고스란히 떠 있다.

 

덧붙이는 글 | <대구시민신문>에도 함께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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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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