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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을 둘러보는 일은 다른 지역에서 통일관, 전적기념관 등을 관람하는 것과 사뭇 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1950년 8월 11일, 포항여고(당시 포항여중) 운동장에서 학도의용군 71명이 일반군대의 지원도 없이 단독전투 끝에 대부분 죽고, 일부 다치거나 포로가 된 사실을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아파온다.

그들이 모두 아직은 부모 밑에서 투정이나 부렸음 직한 10대 청소년들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기념관 안의 수많은 전시물들과 기록들을 두루 인용할 필요도 없이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한 이우근 학도병의 주머니에서 나온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만 읽어본 이라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가슴 속에서 솟아오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영천호국원에 전시된 한국전쟁 당시 포항여고 운동장 전투 기록화
ⓒ 정만진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 학도병 이우근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壽衣(수의)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거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관창의 어린 얼굴이 새삼 떠오르는 포항

▲ 포항여고 정문 앞에 세워진 '學徒義勇軍 六二五 戰跡碑'. 자물쇠로 굳게 출입문이 봉해져 있어 평상시에는 창살 사이로만 볼 수 있다.
ⓒ 정만진
'學徒義勇軍 六二五 戰跡碑'는 포항여고(한국전쟁 당시 포항여중) 정문 앞에 세워져 있다. '학도의용군 한국전쟁 전적비'라고 한글로 쓰여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부질없는 희망이다. 그보다도 전적비가 울타리로 에워싸여 있고, 출입문마저 시퍼런 자물쇠로 굳게 채워져 있어 '보통사람들'은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게 더욱 안타깝다. 그나저나 이 전적비를 보노라면 저절로 궁금증이 일어난다. '전적비는 왜 여기 세워졌을까, 하필이면 여고 정문 앞에?' 왜 '싸워서 이긴 업적'을 뜻하는 전적(戰績)비가 아닌 '싸운 흔적'을 의미하는 전적(戰跡)비를 세웠을까?

전국 유일의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은 포항의료원 인근 '탑산'에 건립되어 있다. 이 기념관은 1층이 전시실, 2층은 시청각실로 이루어진 연건평 903㎡의 2층 건물이다. 기념관 뒤의 가파른 계단을 줄기차게 오르면 1957년에 제막된 '전몰 학도 충혼탑'과 1980년에 건립된 '포항지구 전적비'를 만날 수 있다(두 탑 모두 비명이 한글로 새겨져 있다).

기념관의 전시에 따르면, 학도의용군은 노량진(북한군 한강 도하 저지), 낙동강, 다부동, 안동, 기계, 안강, 영천, 포항(이상 경북), 창녕(경남) 전투에 가담하여 싸웠고, 1950년 9월 14일 장사(모래밭이 길다 하여 길 장(長), 모래 사(沙)로 이름 붙여진 포항 북쪽의 장사 해수욕장 지역) 상륙작전에 학도병 600여 명이 참전하였다가 130여 명이 전사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18일부터 20일 사이 포병 제18대대 서울학도포병대에 선발된 341명의 학도병이 박천, 덕천(이상 평북)에서 중공군을 막는데 나섰고, 역시 같은 해 9월 15일부터 10월 18일 재일(在日) 학도의용군 641명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으며, 1951년 2월 4일 웅진학도유격대가 결성되어 휴전시 이북 지역에서 게릴라 활동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이 포항에 건립되고, '學徒義勇軍 六二五 戰跡碑'가 포항여고 정문 앞에 세워진 것은, 학도의용군이 경상도 지역 전투에 주로 참전했고, 특히 전쟁 당시 국군 제3사단 후방 지휘소로 사용되었던 포항여고의 운동장에서 북한군과 큰 교전을 벌인 것을 기념한 결과이다.

▲ 전국 유일의 학도의용군기념관인 포항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에 전시된 포항여고 운동장 전투 기록화. 영천호국원의 그림과 이 그림 모두 학도의용군이 크게 우세한 듯 그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전투에 참가한 어린 학생 71명 중 48명이 전사하고 10명이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 13명은 부상을 입은 전투였다.
ⓒ 정만진
한 가지 남은 궁금증은 왜 전적(績)비가 아니라 전적(跡)비로 표기했을까 하는 것인데,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포항여고 전투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학도의용군이 전투에서 이겼기 때문에 기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10대 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전투에 나선 것 그 자체를 기념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여겨진다(한국전쟁 당시 학도의용군은 5만여 명, 전사자는 7천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하여튼 1950년 8월 11일, 학도의용군 중대 71명은 국군 제3사단 후방 지휘소인 포항여고 건물의 경계 근무를 섰다. 이날 새벽 4시경 북한군이 기습 공격을 해왔다. 결국 학도의용군은 장갑차까지 앞세우고 공격해오는 북한군을 당하지 못한다. 학도의용군은 포항여고 운동장에서 백병전까지 하는 11시간 30분 동안의 교전 끝에 12시 30분경 전체 71명 중 48명이 전사하고 1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0명은 포로가 되었다. 기록은 이날 포항여고 운동장 백병전이 학도의용군의 '단독전투'였음을 증언한다.

단독전투? 기념관의 기록을 다시 읽어보면, 학도의용군은 71명 중 48명이 죽어가면서 '11시간 반 동안 교전으로 적 부대의 포항 시내 진출을 지연'시켰고, '포항 시민 20여 만명과 육군 제3사단 및 기타 지원부대 병력, 경찰, 행정기관원들을 형산강 이남의 안전지대로 철수'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그리하여 '(국군이) 차기 전투(를 준비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학도의용군들이 공이 있다 한들 그것은 전적(戰績)이 아니라 전적(戰跡)이 아닐까.

우리가 반굴과 관창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어찌 환호를 내지를 것인가. 10대 청소년들이 교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로 총에 맞고 칼에 찔려 죽어간 모습을 생각하면 누군들 '學徒義勇軍 六二五 戰跡碑'와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에서 마음 아프지 않을 수 없으리라. 군번도 없고 무덤도 없이 10대 아이들까지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으로 몰아넣는 전쟁,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임에 틀림이 없다.

 

덧붙이는 글 | - 기사는 계속됩니다
- 대구시민신문 2005년 9월 2-3째주에 게재한 원고를 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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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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