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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너무나 평화로운 여수 항구. 그러나 해방 직후 좌우 대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비극의 도시이다.
ⓒ 정만진
1948년 군부는 좌익 척결에 착수하였다. 군부가 좌경화되어가는 현상은 우익적 이승만 정권으로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였고, 미국 군사고문단으로서도 국내 치안의 경우 우선 군부 안의 공산주의자부터 정리하는 것이 당연히 우선적 과제였다.

국방경비대와 미군들은 여수의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킬 가장 위험한 부대라고 판단하였다. 제14연대장은 오동기 소령이었다. 광복군 출신으로 김구 추종자였던 오동기 소령은 평소 군의 부패를 개탄하면서 군대 개혁을 부르짖어오던 장교였다.

1948년 당시 여수에 주둔하던 제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은 송호성 육군 총사령관이 독점하고 있던 군대 부식의 납품을 공개입찰로 바꿔 사병들의 식생활 향상을 도모하였다. 그는 장교들에게 편중되어 있던 부식비 배정을 모든 장병들에게 골고루 배분함으로써 혜택이 균등하게 나눠지도록 조치하였다. 이는 기존 상인들과 장교들의 불만을 샀다. 오동기는 이승만 정권이 조작한 '혁명의용군'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어 10월 1일 구속되고 10년형을 언도받는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과 투옥생활을 한 미국 스프링필드 대학 졸업생 최능진은 경무국 수사과장으로 있던 중 조병옥과의 의견충돌로 강제 퇴임 당한다. 이승만은 건국 초기 국가주석 추대운동 당시 최능진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고 서재필을 지지한 데 대해 깊은 앙심을 품고 있었다.

하여튼 최능진은 1948년 5.10선거에서 이승만이 입후보한 동대문 을구에 출마하려 한다. 이승만은 서북청년회를 시켜 그의 입후보 등록서류를 탈취함으로써 무투표 당선이라는 목표를 이룬다. 하지만 이승만은 집요하게 그를 미워하여 정부 전복 음모라는 죄명을 덮어씌우려고 혁명의용군 사건을 조작한다.

최능진 등이 국가 반란을 일으킬 때, 군대는 오동기가 동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동기와 최능진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이였다. 부대장 오동기가 구속되고 새로운 연대장이 부임한 14연대에 10월 19일 여수를 출항하라는 제주도 토벌작전 출동명령이 하달된다. 오후 9시 30분, 연대 주임상사 지창수가 군대 내 좌익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킬 때 동참자는 4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음날 오후 3시경 반란군은 2천 명 정도로 증가했다.

"우리는 제주도 출동에 앞서 악질 반동 경찰과 일본군을 타도해야 하며, 나아가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에 반대한다"며 병사들을 선동했지만, 반란군 가담 병력이 처음부터 모두 공산주의자이거나 동조자들이라기보다는 핵심분자들이 총검으로 위협하는 동안 군중심리에 휩쓸려 반군측으로 쏠린 것으로 판단된다.

▲ 오동도 입구의 높은 지대에 자리잡은 이순신 장군 동상. 당신이 왜적을 물리치던 여수 앞바다에서 벌어지는 1950년대 좌우 학살을 보며 장군은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 정만진
하여간 제주도 토벌을 위해 지급된 신무기로 무장을 한 덕분에 반란군의 화력은 막강했고, 금세 여수경찰서와 순천경찰서를 점령했다. 이 동안 순천경찰서장 양계원이 총살당했고, 벌교에서는 67명이 한 자리에서 처형당했다. 순천에서는 항복한 100명 가량의 경찰이 경찰서 담장을 등지고 늘어선 채 총살당하기도 했다.

반란군은 26일 구례경찰서도 점령하였다. 그러나 국방경비대는 27일 06시 30분경 구례경찰서에서 반란군을 격퇴시켰고, 특수부대는 마침내 여수 중심부도 점령하였다. 같은 날 새벽 해군도 돌산 부근 지점에서 군사행동을 개시하였고, 함포를 사격하여 해안을 봉쇄함으로써 반란군의 후방을 차단하였다. 여수는 곧 함락되었다.

한국군이 진압에 실패할 경우 작전통제권을 인수받으라는 구두 명령을 이승만에게 받은 당시 채병덕 참모총장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는 본래 '고립된 여수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탈환해야 하며, 반군을 궤멸시키기 위한 열쇠는 백암산과 지리산에서 이미 활동 중인 게릴라들이 반군과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순천 북쪽의 구례와 동쪽의 하동에 경비대 대대들을 배치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백선엽은 '당시 여수와 순천의 은행금고에 조선은행권이 상당액 보관되어 있었는데 만약 이 거액의 돈이 반란군의 수중으로 들어가면 경제가 교란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여수 탈환을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회고록을 통해 주장했다(백선엽, <軍과 나>).

이제 우익의 보복과 살육이 시작되었다. 물 빠진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처형되었고, 정체불명의 편지를 전달하였다는 이유로 배달부가 처형되기도 했다. 종산국민학교에서는 125명을 처형하여 묻어버렸다.

반란군을 여수에서 몰아낸 국방경비대와 우익의 보복 학살은 무자비했다. 목포, 해남, 완도, 진도에서는 민중들이 바다에 실려가 돌에 매달린 채 수장되었다. 관동군 헌병 출신의 김종원 대위는 여수 시민들을 공설운동장에 집합시켰다가 철사줄로 손가락을 묶어 바다로 이들을 밀어 넣었고, 자신이 차고 있던 일본도로 직접 한 자리에서 피의자 7-8명의 목을 베기도 했다.

여기에 가입하면 좌익에 가입했던 전과를 묻지 않고 애국적인 국민으로 포용한다는 정부 공언을 믿고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순진한 농민들도 무수히 오동도 앞바다에 수장되고 말았다. (여순지역사회연구소, <여수사건 실태조사보고서>).

▲ 오동도 동백숲 사이로 바라보는 여수 바다. 작은 배가 평화롭게 지나가고 있다.
ⓒ 정만진
여순반란이 종결되고 1949년 6월 현재 여순사건의 피해에 관한 집계는 사망 5379명, 중상 3067명, 행방불명 313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사람들은 더러 여수 지방에 본래부터 '빨갱이'가 많았던 게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한다.

물론 당시 외신기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1948년 당시 전남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대다수 대중들이 좌파를 지지하였고. 어느 정도의 좌파는 오히려 온건파로 분류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좌익적 분위기는 남한 전역을 통해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분위기였고, 실제로는 좌파의 영향력이 다른 곳에 비해 우세했다고 볼 만한 증거는 없다.

특히 여순 사건의 무대가 되는 동부 전남의 상황은 서쪽(순천)으로 조계산 줄기, 동쪽(광양)으로 백운산과 섬진강, 북쪽(구례, 곡성)으로 지리산이 막고 있어서 사방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문화권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 결과 광양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우익이 우세한 위치에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다(순천시사편찬위원회, <순천시사>).

따라서 여수, 순천 지역이 본래부터 특별히 좌파 득세 지역이었다고 보고, 지역감정에 바탕을 두고서 지금도 그런 아니냐고 왜곡하여 바라보는 시선은 마땅히 교정되어야 한다.

이는 10월 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유로 대구 사람들이 특별히 좌파적이었다고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소요는 경상남북도를 비롯하여 전남, 충남북 일대와 제주도, 거제도에까지 파급되고, 하동, 양산, 울산, 김해, 동래, 밀양, 부산, 의령, 화정, 고성, 진해, 남지, 창녕, 마산, 전주, 군산에서도 소요가 일어났다.

소규모 항구도시인 월성군 구룡포리는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으로 무장한 2천여 군중들의 습격으로 경찰서장의 집까지 파괴되었고, 왜관에서는 시위대가 경찰서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경찰서장 이하 경관 5명이 살해되었으며 군중도 7명 사망하였다.

10월 20일이 되면 드디어 소요는 서울까지 번졌고 광주경찰서가 불태워졌고, 연안, 연백 등지에서도 경찰서는 습격당했다. 강원도 묵호에서도 주민 3천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처럼 해방 직후에는 군정과 친일파 경찰에 대항하여 민중이 폭동을 일으킨 일은 비일비재하였고, 민중들이 좌파적 사고에 더 우호적이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대구 사람들이 레드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10월 사건을 입에 담는 일조차 스스로 두려워하는 것은 난센스 중의 난센스이다.

우리는 좌우익의 대결 속에서 사람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일이 피차간에 일상화되어 있었고, 그만큼 비인간적인 사고와 행동에 물든 채 한 시대를 보냈다는 안타까움을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이제 오동도에 가면 여순 반란사건의 참상도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동도 특산인 동백꽃만큼이나 붉은 생명을 영문도 모르는 채 잃고만 무수한 겨레의 넋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그저 유람만 즐기고 만다면 혼이 있는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가 없다.

▲ 오동도 동백숲 사이로 난 산책로. 봄이면 동백꽃 축제가 벌어진다.
ⓒ 정만진
'용서는 하지만 잊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독일이 왜 우리보다 훨씬 수준 높은 국가이고 민족인지를 곰곰 생각해보아야 마땅하다. 잘 잊는 사람은 개인이든 민족이든 지난 잘못을 또 다시 반복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해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가 잘 일깨워준다.

'우리들은 역사를 배움으로써 역사적 사고력과 비판력을 기를 수 있다. 역사학습은 역사적 사실의 외면에 대한 파악에서 시작하여 역사적 사실의 내면의 이해로 발전해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역사적 사건의 보이지 않는 원인과 의도, 목적을 추론하는 역사적 사고력이 길러지게 된다.'

덧붙이는 글 | 대구시민신문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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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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