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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 박정희 생가에 온전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 있는 감나무. 본래 감이 많이 달렸으나 전쟁의 포화로 나무가 이렇게 되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박정희 생가에는 많은 게시물이 부착되어 있지만 박상희ㆍ박정희 형제의 남로당 활동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 정만진
1946년 3월 11일, 4월 1일, 7월 1일, 8월 19일, 대구에서는 기아(飢餓)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대구의 초등학생들은 평균 50% 이상 점심을 굶었고, 전교생의 80%가 굶는 학교도 있었다. 대구 주민들의 대부분이 절대적으로 쌀을 필요로 했지만, 군정 당국은 수집한 식량을 배급하지 않았다. 군정 당국은 신생 국가에서 식량 부족이란 흔히 있는 일로써 문제가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오판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8월 19일의 4차 시위는 특별히 격렬했다. 콜레라의 창궐이 민심을 더욱 자극한 결과였다.

1946년 8월에 발생한 대구 콜레라는 단숨에 시민 1만여 명을 감염시켜 골목마다 환자가 없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콜레라 감염에 대비하여 경비, 통제, 격리를 담당하는 통행검문소의 관리는 허술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경찰은 이에 항의하는 대구의전 교수 이상요(李相堯)를 도리어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유치장에 구금해 버렸다. 일제 시대에는 자신들의 것이었던 보건권과 위생권이 이제는 손밖에 있는 데 대해 경찰이 분개하고 있던 중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10월사태의 진원지가 대구의전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 1946년 10월 대구사태(10월항쟁)의 진원지 대구의전(현재의 경북대 의대)
ⓒ 정만진
일제 시대 때 경찰이었던 자들이 해방 후에도 여전히 동일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점 때문에(일제 안동경찰서 형사주임이었던 이성옥이 대구경찰서장, 일제 김천군수 권영석이 경북 경찰의 총수인 5관구 경찰청장으로 부임) 경찰에 대한 민중의 적대감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경찰은 피의자를 마구 구타하고 고문했으며, 양곡 수집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부당하고 거칠었으며 정직하지도 않았다.(신복룡, <한국분단사연구>)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조선공산당 수뇌부는 9월 9일 총파업을 지시했다. 당내 반대파의 도전에 치명적인 반격을 가하고자 하는 것이 목표였다. 박헌영은 모택동의 추수 폭동(1927)을 연상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9월 30일 새벽부터 탱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관 2천여 명과 우익 청년 1천여 명이 서울의 철도파업 현장인 경성철도기관구를 습격함으로써 무력탄압이 시작되었다.

대구에서는 10월 1일, 파업 중이던 40여 공장 노동자들이 허가를 받고 집회를 하였다. 학생과 시민이 참여하여 시위대 숫자는 점점 늘어 3-4천여 명으로 불었다. 그들은 “쌀을 달라”고 외쳤다. 시간이 흘러 시위대가 조금 축소된 즈음에 경찰이 발포를 하였다.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경찰은 그 시체가 행려병자의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다음날 대구의전 학생 수십 명은 연탄공장 노동자 황팔용(20세 전후)의 시체를 들것에 싣고 경찰서 앞에 나타났다. 당시 일간신문 보도에 의하면, 10월 1일-3일 사이의 충돌을 통해 경찰 33명 사망, 중경상 135명, 경찰가족 1명 사망, 부상 33명, 시위대 17명 사망, 부상 25명, 검거 636명이 발생하였고, 영천군수가 그 와중에서 피살되기도 했다.

10월 2일 오후 5시 이후 대구 지역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0월 3일에 발표된 포고령 제3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사람은 그들의 집이나 그 주변에 있을 것. (2) 어느 누구든 대구시에 들어오거나 대구를 떠날 수 없으며, 도로 봉쇄 조치를 빠져나가려고 하는 자는 무장 군인이 체포할 것.’

어디선가 읽은 듯한 내용의 포고령이다. 그렇다, 1980년 광주! 그 누구도 광주로 들어갈 수 없었고, 광주 안에 있던 사람은 그 누구도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멀리 독일 통일의 발상지 라이프치히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은 일어났다. 처음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민주화 요구 집회가 시민들의 호응을 얻어 점점 규모가 커지자 동독정부는 라이프치히로 드나드는 국도와 고속도로를 모두 봉쇄하였다.

물론 결과는 다르다. 한국은 무차별 사살을 통해 광주 시위를 진압하였고, 동독은 시위 인구가 10만이 되자 무력진압을 포기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동독정부 중앙위원회 Sindermann씨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이 재미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계획했고 준비했지만, 촛불과 기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이민수, <독일기행>)


1946년 10월 1일 소요가 시작된 대구에는 2일 바로 계엄령이 선포된다. 그러나 6일 이후 대구는 무법천지가 된다. 소총과 수류탄, 낫과 창으로 무장한 시위대는 왜관 경찰서장과 경관 2명의 눈알을 뽑고 혀를 잘라 살해하였다. 물론 당시의 희생자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지금도 거의 불가능하다.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은 엄청난 보복 살해와 우익의 즉결재판과 암매장은 증거조차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사람 중 전쟁 중에 마구 학살된 숫자도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구사태로 남로당 몰락 재촉

1946년과 한국전쟁 중에 발생한 마구잡이 학살에 대해서는 신복룡의 <한국분단사연구>에 나오는 ‘한국전쟁 당시에 낙동강 전선이 위험하게 되자 이승만 정권의 하수인들은 형무소나 경찰서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끌어내어 죄가 있든 없든, 경범이든 중범이든, 기결수이 미결수를 가리지 않고 처형했다. 특히 대구와 왜관에서 헌병들은 200-300명씩 줄을 세우고 사살했으며, 그 중에는 12-13세의 아이들도 섞여 있었다. 총이 부실하여 단발에 사살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시 확인사살을 했고, 그러고도 살아남은 자의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았다’는 기록 인용과, 경상북도의회가 펴낸 <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 활동결과보고서>에 나오는 ‘이 당시에 대구형무소에서 군에 이첩되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는 행방불명자는 모두 1402명이었다’는 조사보고를 참조할 만하다.

당시 박헌영은 대구 사태를 통해 자파의 세력을 복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익만 강화되었고, 남로당은 대구사태를 계기로 몰락을 재촉하게 되었으니 현실적으로도 박헌영의 판단은 우매한 것이었다. 이는 미국이 대구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해소하는 과정과도 일치한다.

당시 경상남도 내무국장이었던 버그스트롬은 “전략적으로 선거(과도 입법의원 선거)를 장악하기에는 지금이 가장 적당한 시기였다. 왜냐하면 좌익들은 모두 감옥에 가 있거나 산 속으로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남겼다. 대구 사태가 우익의 강화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다는 말이니, 좌익 지도자로서 박헌영은 크나큰 실패를 자초한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박헌영의 9월 9일 총파업 지시와 ‘대구의 분위기를 서울까지 가져간다(bring Taegu to Seoul)'고 생각한 공산주의자들의 판단은 너무나 참혹한 결과를 빚어냄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비인간적 아픔을 안겨주었다. “쌀을 달라”고 외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한번 살아보고자 했던 대구사람들의 민중적 소망을 잔혹사로 귀결되게 만든 박헌영과 공산주의자들의 판단은 “정치가는 인간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개화를 방해하는 장애를 제거하면 된다”고 갈파한 사르트르의 가르침에 오히려 상반되는 반인간적인 것일 뿐이었다.

▲ 1946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 박상희는 2천 군중을 이끌고 선산경찰서와 군청을 습격하여 '접수'한다. 사진은 청사가 구미로 옮겨간 뒤 큰 나무만 남아 있는 선산경찰서 터.
ⓒ 정만진
대구 사태는 대구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당시 전국적으로 70~80개 시(군)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예를 한 곳만 들어보면, 선산에서는 시위대가 경찰서를 접수하여 간판을 파괴하고 선산인민위원회 보안서라는 간판을 내걸고 서장 이하 20여 명을 구속하고 인민재판을 실시하던 중 군부대와의 교전 끝에 경찰청사에서 퇴각하였다. 이때 2천명 군중을 이끌고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면서 구미경찰서와 군청을 접수했던 박상희는 결국 경찰의 반격을 받아 논바닥에서 사살되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 박상희는 선산 들녘에서 사살된다.
ⓒ 정만진
박상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이다.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 본인도 육사 공산당 세포 책임자로 일하다가 적발되어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군대 내의 공산주의자 비밀조직 명단을 백선엽에게 소상하게 제공하여 ‘마치 줄기가 딸려나오는 고구마’같이 좌익이 색출되도록 협조함으로써 구차하게 살아남았다. 필자는 박상희ㆍ박정희 형제의 남로당 활동 사례를 볼 때마다 에머슨의 “사상은 인간을 노예 상태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가르침의 깊은 뜻을 생각해본다.

박헌영이든 박정희든 이른바 지도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대중을 버리고 혼자서 살아간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다. 박헌영과 박정희가 나란히 그 이름을 남기고 있는 여수와 대구, 선산을 돌아보며 필자는 다시는 그와 같은 개인적, 민족적 비극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루 빨리 통일을 이루어야겠다는 다짐을 재차 다져본다.(계속)

 

덧붙이는 글 | 10월 중에 대구시민신문에 2회에 걸쳐 게재했던 글을 하나로 뭉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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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 <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장편소설 <딸아, 울지 마라><백령도><기적의 배 12척> 등을 썼다. <집> 등 개인 사진전도 10회 이상 열었다.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다. 전교조 활동으로 5년간 해직교사 생활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