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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처음으로 자신이 원폭 2세라고 밝힌 김형율 씨. ⓒ오마이뉴스 이승욱


"원폭피해자 2세라는 사실을 드러내놓는 것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저 자신이 내외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몸과 마음, 모두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고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 방한 이틀째를 맞는 22일 오전 11시, '대구KYC' 사무실에서는 30대 초반의 '원폭피해자 2세대' 한 젊은이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고심한 탓인지 그는 다소 긴장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오마이뉴스 이승욱
160cm를 조금 넘긴 자그마한 키에 40kg을 채 넘지 못한다는 왜소한 체구, 핏기 없는 그의 얼굴은 지독한 '병마'에 시달리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는 기자회견을 하는 내내 기침을 내뱉었다.

김형율. 70년 6월 출생. 32세. 현재 부산거주. 김봉대(65) 씨와 이곡지(61) 씨 사이에 3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남. 출생 당시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동생은 생후 1년6개월만에 폐렴으로 사망. 태어나면서부터 기관지가 좋지 못해 잦은 감기에 시달림. 20살 무렵 '기관지 확장증' 진단을 받고, 여러 차례 입원 치료. 지난 95년 '면역글로블린 M의 증가가 동반된 면역글로블린 결핍증'이란 진단을 받았음. 현재 원폭피해자 2세 문제해결을 위한 싸움을 준비 중.

원폭 2세, 국내 처음으로 언론에 모습 드러내

'원폭 2세'가 자신의 '실명'을 밝히고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김 씨의 기자회견 역시 '사회적인 편견'을 걱정하는 부모와 가족의 만류로 1년여를 끌어온 시점에서야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원폭피해자 1세대인 어머니의 반대는 아직도 완고하다. 김 씨의 어머니 이곡지 씨는 일제강점기인 지난 40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원폭이 투하된 45년 8월 6일 히로시마현 가가구찌(川口町)에서 원폭 피해를 입었다. 이 씨의 언니는 당시 원폭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 어머니와 함께 피신한 이 씨는 목숨만은 건졌다. 하지만 이 씨는 아직도 그때의 피해로 피부병을 평생 몸에 달고 살아야 했다.

기자회견 장소에 함께 자리한 아버지 김봉대 씨. ⓒ오마이뉴스 이승욱
원폭피해자로 살아간다는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들 김 씨가 원폭 2세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아들이 겪어가야 할 고통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하지만, 김 씨는 부모와 가족에 대한 걱정이 오히려 앞선다.

"평생 병치레로 입원과 치료를 반복하면서 가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고 살고 있습니다. 나이가 서른을 넘겼지만 내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하고 가족들의 신세를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부모님도 점점 늙어가고, 저는 변변한 살림살이 하나 갖추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원폭 2세'로 살아간다는 것..."내 몸 하나 간수 못하고, 직장생활도 어려워"

김 씨가 그렇다고 원폭의 피해만을 앞세워 병마에 주저앉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그의 의지는 '늦깎이'지만 대학을 다니는 등 사회로 나가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한다해도 평범한 사람의 몸이 아닌 김 씨의 상태로는 사회생활은 힘겹기만 했다.

좌측부터 최봉태 변호사, 조광진 대구KYC 대표, 김봉대, 김형율 씨, 이호경 원폭피해자협회 대구경북지부장. ⓒ오마이뉴스 이승욱
"남들에겐 변명으로 들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당당하게 제 삶을 만들고자 노력을 했어요. 그렇지만 그때마다 몸이 아파 남들과 같은 생활을 꾸리기란 너무 버거웠죠."

대학을 졸업한 후 컴퓨터 프로그래밍 관련 업체에서 일한 적도 있었지만 그의 체력은 점점 떨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약'으로 겨우 버티던 그가 입원을 하는 것으로 직장생활은 막을 내려야 했다.

평범하지 못한 그의 삶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그의 '하소연'은 이어진다. "남들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쉽게 걸리는 감기지만 저는 오로지 누워있기만 해야 합니다. 남들처럼 삶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과 다시 이런 삶을 답습해야 하는,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병에 괴로워하는 몸보다 더 괴로웠습니다."

이미 집안의 가세는 김 씨의 병 치료에 드는 비용 탓으로 기울대로 기울어진 상태이다. 이날 기자회견에 김 씨와 함께 자리한 아버지 김봉대(65) 씨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33년 동안 어려운 경제형편에도 아들의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면서 "집을 팔아서까지 하루가 멀다하고 병원을 전전했지만 무엇 하나 나아진 것이 없다"고 답답한 마음으로 내비쳤다.

최근 들어 김 씨의 몸은 점점 악화돼가고 있다. 요즘 김 씨는 걷는 것조차 힘에 부치고 오르막을 오르는 것도 부담스러운 상태이다. 병원 진단으로는 이미 폐기능 40%가 정지됐고, 악화도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김 씨, 이미 폐기능 40%는 정지... 일본은 원폭 2세 존재도 불인정

원폭 2세, 국내 5천여 명 추정
전반적인 원폭문제 해결 없이는 역부족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원폭 2세'들의 수는 어림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이호경 대구경북지부장은 "원폭피해 1세대들이 자신의 피폭 사실을 공개하기 힘들어하는 형편에 2세가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지금 협회 차원에 피해자로 등록된 원폭피해 1세대는 2100여 명 선을 감안했을 때 원폭피해 2세대들은 대략 4∼5000명 정도가 존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원폭피해 2세들에 대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으로 원폭피해 2세 문제해결은 아직도 요원한 상태이다. 특히 원폭피해와 유전 가능성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상황을 이유로 일본 정부는 문제해결의 의지를 보이고 있지 않다.

가정의학과 전문의 노태맹 씨는 "김 씨의 경우에는 일반인들의 면역체계에 비해 외부 세균에 대한 방어능력이 현격히 떨어져 있는 상태"라면서 "어머니를 통해 문제가 있는 유전자가 유전됐을 개연성은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역학조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단언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다행히 일본 내에서는 작년 5월경부터 '히로시마 방사선 영향 연구소'가 주축이 돼 원폭2세대들에 대한 광범위한 역학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어 원폭2세대에 대한 문제해결의 단초를 제공해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원폭문제에 대한 일본, 미국, 한국 등 관련 국가들의 문제해결 '의지'가 관건이라는 것이 대다수 의견이다. 아직도 원폭 1세대에 대한 문제해결도 더딘 상황에서 원폭2세 문제해결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 원폭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법률인 '원호법' 적용을 자국에서만 가능하도록 하는 등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을 제한적으로 하고 있다. 이 '원호법' 문제에 대한 싸움도 지난 70년대부터 시작돼 최근 들어 곽귀훈(78) 씨 등 일본 내 재판에서 승소한 바 있지만 일본 정부의 항소 등으로 일본외 거주 피폭자에 대한 지원은 미루어지고 있다.

또한 원폭 투하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미국 역시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고 있고 한국 정부 역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자국민 피해자에 대한 지원조차도 방기하고 형편이다.

이와 관련해 시민사회단체들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일본 정부의 사죄와 원폭피해자에 대한 전면적인 지원 △미국에 대한 배상재판을 추진하며 원폭피해자 문제의 해결을 꾀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원폭피해자들의 문제는 여론과 사회적인 관심을 받지 못한 채 피해자들은 '음지'에서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경제적인 여건도, 마음의 여유도 없다. 다만 이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에 기대를 걸 뿐이다.

현재 일본정부는 일본인을 비롯해 한국인 피폭자들에 대한 '원호법'을 제한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원폭 1세의 경우에는 원호수첩을 발급받고, 일본 내에 입국하면 한다는 어려운 조건이나마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려진 상태이다.

그러나, 한국인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경우에도 원폭 2세의 경우에는 어떠한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태이다. 일본 정부는 원폭 2세 존재 자체에 대해 인정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정부의 자세는 쉽게 변할 모양새도 아니다.

하지만 김 씨는 누군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며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작년 6월부터는 원폭 2세들에 대한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이 직접 뛰어다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4박 5일의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하면서 원폭 2세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방문인 탓인지 큰 성과는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쪽에 있는 원폭 2세 분들과 만나면서 원폭 2세 문제에 대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원폭피해의 고통을 참으며 견디다, 이제는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김 씨. 기자회견을 마친 그는 "편한 마음만은 아니다"라는 말로 심정을 드러냈다. 원폭피해자의 문제해결을 위한 그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게다. 하지만 그는 희망만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제가 원폭 2세의 신분을 밝히는 것으로 저 개인한테는 피해가 있을 수도 있겠죠. 결혼 문제도, 직장을 구하는 어려움도 다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원폭피해자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으로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참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사회의 관심도 더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해봅니다. 하루빨리 일본정부도 피해자들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과 치료가 가능할 수 있도록 노력을 다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원폭피해 2세 김형율 씨와의 인터뷰 요지.

- 처음 자신이 원폭피해를 인식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95년경까지 계속 감기에 시달리다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면역글로블린 결핍증'이라는 병명을 진단 받으면서 의사선생님이 원폭피해 가능성을 이야기해줬다."

- 이번 원폭 2세 사실을 공개하는데 어머니 반대가 완고하다는데.
"어머니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만약 공개했을 때 사회적인 편견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악화가 되고 나니 이젠 그냥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 스스로도 고민하지 않았나?
"솔직히 두려움도 많았다. 사회적인 편견과 시선이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부모님도 점점 나이가 들어가시고 그나마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 오늘 기자회견으로 어떤 성과가 있기를 바라나.
"비슷한 처지에 있는 원폭 2세들이 많이 모여 단합을 했으면 좋겠다. 이들이 모여서 '환우회'를 조직하든지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나의 이번 기자회견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가족들에 대한 생각은.
"무엇보다 가족 생각이 많이 든다. 지금까지도 날 위해 부모, 형제들이 많이 애를 썼다. 이제 가족들에게 기대기도 힘들다. 이제껏 신세만 져온 가족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 기자회견을 마치고 난 심정은.
"편한 마음만은 아니다.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두렵기도 하다. 원만히 잘 해결될 수 있을까 의문점도 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잘 해결이 돼 마음의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지금은 많이 불안하다."

덧붙이는 글 | '대구KYC','원폭피해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연락처 : 053-477-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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