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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제과 소액주주운동본부(대표 염경우)가 "미국 국가명 한자표기 바꾸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4월 15일자 경향신문에 난 "美國을 米國으로 쓰자"는 기사를 통해 알게 됐습니다. 아름다울 미(美)자를 쌀 미(米)자로 바꾸자는 것이지요.

'메국 이름 바꾸기'를 역설해온 저로서는 아주 반가운 일입니다. 얼토당토않아 보일지도 모르는 이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또 있구나 하는 동지감도 느낍니다.

게다가 그 운동의 결실을 위해 실제로 발로 뛰기 시작했다고 하니 고개까지 숙여집니다. '청와대·국회·교육인적자원부를 비롯해 여러 시민단체 등'에 제안서를 보내고, 각 온라인 게시판에 취지를 설명하는 글도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운동을 시작한 '이유'가 좀 엉뚱해서 문제가 될 듯합니다.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운동본부 대변인이 "일본의 경우 미국을 한자로 표기할 때 '쌀이 많은 나라'라는 뜻으로 '米'로 표기하고 있다"고 했답니다.

하지만 그건 이 운동을 벌이는 바른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중국 것 베끼기를 그만두고 일본 것 베끼기로 넘어가자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왕 시작한 일이면 중국 것도 일본 것도 아닌 한국 것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중국이 美國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은 그 나라가 '아름답다'고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일본이 米國을 쓰는 것도 '쌀이 많은 나라'라고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네들 말로 'America'라는 소리를 음차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일 뿐입니다.

美는 중국말로 '메이'라고 읽습니다. 米는 일본말로 '메'라고 읽습니다. 이 두 발음은 모두 'America'의 둘째 음절인 -me-의 소리를 따온 말입니다. 첫 음절 A-를 건너뛴 것은 그것이 짧은 약모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美라고 쓰든 米라고 쓰든 그것은 한자의 '뜻'과는 상관 없는 일입니다. 다만 그 한자들을 제나라 한자음으로 읽은 '소리'와만 관계가 있습니다.

美와 米는 한국 한자음으로는 모두 '미'라고 읽힙니다. '어메리카'라는 음차어와는 단 한 음절도 겹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미국'이라는 이름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굳이 한자를 써야 한다면 한국 한자음으로 '메'소리가 나는 글자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국 한자음으로 '메'소리를 내는 한자는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것이 있다면 '소매 몌(袂)'자 정도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말 음절에 '메'가 있는데 굳이 발음이 더 어려운 몌(袂)자를 써야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애써 시작한 운동의 의의가 반감되고 맙니다.

저는 한자 폐지론자가 아닙니다. 한자어를 빼고 고유어만 쓰자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이천 년 동안 조상들이 써온 문화적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한자와 한자어를 가지고 의사를 전달하고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면서 문화를 가꾸어 왔습니다.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소리글자인 한글과 뜻글자인 한자를 잘 섞어서 쓰면 더 훌륭한 말글살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외국어 음차에까지 한자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소리글자인 한글을 가지고 외국어를 훨씬 더 잘 음차할 수 있습니다.

한국말에는 에프(f)와 브이(v), 티에이치(th) 등의 발음이 없기 때문에 자음체계는 외국어 음차에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음체계만은 아주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일본말에는 기본모음이 '아에이오우'의 다섯 개 밖에 없습니다. 중국말은 단모음이나 단모음을 연이은 중모음들만 많을 뿐이어서 복합모음을 표현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국말에는 기본모음도 8개나 되는 데다가 상시적으로 쓰는 복모음이 13개나 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될 자음이 없는 America라는 영어 낱말을 음차하는 데는 모음에 문제가 있는 중국말이나 일본말보다 한국말이 훨씬 더 낫습니다.

'어메리카'라는 한국식 음차어는 '메이리지안(美利堅)'이라는 중국식 음차어나 '아메리까(アメリカ)'라는 일본식 음차어보다 훨씬 더 원음에 가깝습니다. 우리에게는 '메이꿔(美國)'나 '베이고꾸(米國)'보다는 '메국'이나 '메나라'가 훨씬 더 적합한 말입니다. 한국말의 음운론에 훨씬 잘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음운론에 더 맞는 '어메리카'나 '메국'이라는 말대신에 '美利堅'이니 '美國' 같은 중국식 음차어나, 'アメリカ(亞米利加)'나 '米國' 같은 일본식 음차어를 다시 빌려다가 쓸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해태제과 소액주주운동본부가 시작한 메국 이름 바꾸기 운동이 꼭 결실을 맺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과 언어의 주체성을 되돌아보고 재정립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美國'을 '米國'으로 바꾼다는 방침만은 재고하는 게 좋겠습니다. 역사적으로나 국어 음운론적으로나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외세의존적 명명법을 주체적인 명명법으로 바꾸는 것이 훨씬 더 정당하고 유익한 일입니다.

'미국'이라는 말은, 米國이든 美國이든, 한국 음운론에 맞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메국'이나 '메나라'가 한국말글의 특성을 잘 살린 더 나은 대안이라고 확신합니다.

해태제과 소액주주운동본부가 '주체성 있는 이름 바꾸기'로 방향을 전환하면 좋겠습니다. 또 그런 운동이 꼭 가시적인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4월15일자 경향신문에 난 관련기사입니다.

‘美國을 米國으로 쓰자’

미국 국가명 한자표기를 ‘美國’에서 ‘米國’으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150여명의 해태제과 소액주주운동본부(대표 염경우)는 미국 국가명 한자표기를 아름다울 미(美)가 아닌 쌀 미(米)로 바꾸자는 ‘미국 국가명 한자표기 바꾸기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운동본부 박용렬 대변인은 14일 “일본의 경우 미국을 한자로 표기할 때 ‘쌀이 많은 나라’라는 뜻으로 ‘米’로 표기하고 있다”며 “내부 논의때 곰팡이 ‘黴’ 등이 거론되었지만 해프닝으로 보일 것 같아 ‘米’로 합의를 봤다”며 “美國을 米國으로 하자는 제안서를 10~11일 청와대·국회·교육인적자원부를 비롯해 여러 시민단체 등에 보냈고 각 온라인 게시판에도 띄웠다”고 밝혔다.

운동본부는 또 이번 운동을 전국민적인 차원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네티즌연합회 등과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오는 27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릴 예정인 ‘Oh! No USA Festival’에 참가해 1차로 2만장의 스티커를 배포하고, 지하철에 100장 정도의 포스터를 붙이기 위해 광고대행사측과 논의중이다.

덧붙이는 글 | 해태제과 소액주주운동본부의 소식을 전해주신 한승호 님께 감사드립니다. 한승호 님은 다음(daum)에 "밑줄긋기"(http://column.daum.net/underline/)라는 독서칼럼을 연재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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