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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제과 소액주주운동본부가 "미국 국가명 한자 바꾸기 운동"을 발표한 것은 지난 10일입니다. 미국의 한자이름을 '美國'에서 '米國'으로 바꾸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언론으로부터 뉴스 가치를 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같은 날 연합뉴스에 올랐으나 이를 바로 기사로 쓴 신문은 스포츠신문인 굿데이 하나뿐인 듯합니다. 그것도 인터넷 판에서 확인한 것이니 실제로 가판에 실렸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 뒤로도 반응이 없다가 4월 15일 경향신문이 처음으로 이를 기사화했고, 다음날인 4월 16일에는 조선일보의 '이규태 코너'가 "美國과 米國"이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다뤘습니다.

경향신문 기사를 통해서 본 그 운동의 의의와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다루었으므로 오늘은 '이규태 코너'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이규태 코너'는 해태제과 소액주주운동본부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시민단체로만 부르면서 그 주장을 그냥 지나치듯 소개했습니다. 그걸 계기로 美國과 米國의 이름의 "궤적을 더듬어" 보려고만 했답니다. 문헌 고증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세 문단으로 돼 있는 짧은 글인데도 정확하지 않거나 모호한 점이 많이 나옵니다. 고증의 생명인 '정확성'이 모자란다는 말입니다. 우선 첫 문단만 보겠습니다.

"아메리카가 피렌체 출신의 이탈리아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부치의 이름에서 유래됐음은 알려져 있다. 그는 1499년에 지금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는 남미 베네수엘라를 탐험했고, 1501년에는 브라질을 탐험했었다. 독일의 지리학자 뮤러가 1507년에 출판한 '세계지(世界誌)서론'에서 신대륙을 아메리카로 부를 것을 제창, 정착된 것이다. 아메리고의 라틴말 이름 아메리쿠스의 어미를 지명 접미사(接尾辭)인 '아'로 바꿔 지명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美國과 米國" 4/16/2002)

'이규태 코너'는 대륙 이름 아메리카가 "베스푸치의 이름에서 유래됐음은 알려져 있다"고 기정사실로 단정했습니다만, 사실 알려진 어원설이 그것만은 아닙니다. 유력한 다른 설명이 적어도 서너 가지 더 있습니다.

참고로 1999년 4월 18일자 뉴욕타임즈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름을 딴 '컬럼비아'를 제쳐두고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이 "1천년 내 최대 실수(Millenium Mistake)"라고 부른 바 있습니다.

최신판 웹스터 뉴월드 사전만 보더라도 아메리카의 어원이 세 가지로 제시돼 있습니다. 이탈리아 항해자 아메리쿠스 베스푸치우스 (Americus Vespuccius), 스페인어 아메리끄(Amerrique), 카리브말 아메맄(Americ)가 그것입니다. 이 문제는 아직 논쟁 중이란 말이지요.

20세기초에는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영국 브리스톨 지역의 거상이자 고위 공직자였던 리차드 아메리크(Richard Ameryk)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새로운 설이 제기됐었습니다.

알프레드 허드(Alfred E. Hudd)는 1910년 출판한 저서 "Richard Ameryk and the Name America"에 따르면 리처드 아메리크가 1497년 이탈리아 출신 항해자 죠반니 까보또(Giovanni Caboto)의 뉴펀들랜드 지역 발견을 재정 지원했고, 까보또는 후원자의 이름을 신세계의 이름으로 삼아서 보답했다고 합니다.

"리처드 아메리크" 어원설은 최근(2001년)에 출판된 로드니 브룸(Rodney Broome)의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the true story of how AMERICA got its name)"라는 책에서 새 증거와 함께 더 강력히 주장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특히 "왕족은 이름(名, first name)으로, 발견자나 발명자는 성(姓, last name)으로 존경을 표시한다"는 당시의 관례에도 맞는 것이어서 더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 어원설은 그의 성이 아니라 이름을 딴 것이어서 의혹을 사왔던 것이지요.

'이규태 코너'가 베스푸치 어원설만 소개한 것을 받아들여준다고 해도 문제는 더 있습니다. 그 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을 "독일의 지리학자 뮤러"라고 소개했지만 그의 이름 표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1507년에 "코스모그라피애 인트로둑찌오(Cosmographiae introductio)"라는 서문과 함께 지도책을 낸 것은 당시 독일이 지배하던 롤랑(Lorraine-지금은 프랑스땅)지역의 수도원 겸 대학인 쌍띠에(Saint-Die)에서 가르치던 몇 명의 성직자 겸 인문학자들이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마르틴 발트쩨에뮬러(Martin Waldseem ller)였지요. 발행 책임자쯤 되었던 모양입니다.

발트쩨에뮬러는 '이름짓기'에 재미붙인 사람이었답니다. 그는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지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성(姓)까지도 그리스어로 '힐라코밀루스(Hylacomilus)'라고 개명했습니다. 자기 독일식 이름을 이룬 '숲(Wald), 호수(See), 방앗간주인(M ller)'을 각각 그리스어로 번역해 다시 조합한 것이지요.

어쨌든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발트쩨에뮬러 혹은 힐라코밀루스이지 그냥 '뮤러'가 아닙니다. 이는 마치 '이규태'라는 이름을 앞뒤 잘라내 버리고서 '규'라고 부르는 것이나 같습니다. 사실은 이름 정도가 아니라 성을 잘라낸 것이니 '규'보다 더 큰 실수입니다.

발트쩨에뮬러를 지리학자라고 소개한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아마츄어 지리학자이기는 했지만 그의 본업은 신부(神父)이자 대학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발트쩨에뮬러의 이름과 직업이 부정확한 것을 보아 이번 '이규태 코너'의 필자는 본문에 인용된 "코스모그라피애 인트로둑찌오"를 직접 참고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책에 명백하게 나와 있는 출판자의 이름이 쓰인 인지(印紙)을 못 보았을 리가 없을테니까요.

만일 내용을 간접 인용한 것이라면 이차문헌이라도 인용해 놓아야 마땅한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워낙 짧은 글이어서 그랬는지 "근거대기"를 생략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필자가 "원문"을 직접 참고해서 쓴 듯한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책이름 중의 '코스모그라피애'를 '세계지(世界誌)'로 번역한 것도 트집거리입니다. 사전에 보면 "코스모그래피"(Cosmography)는 흔히 '천지학, 우주현상지, 우주구조학'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세계(世界)라는 말은 라틴어 문두스(Mundus)나 영어 월드(World)의 번역어로 주로 쓰이는 말이지요.

베스푸치의 이름 아메리고가 '아메리카'로 변한 설명에도 오류가 섞였습니다. 아메리고의 '라틴말 이름 아메리쿠스'가 아메리카의 기초가 됐다는 설명은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닙니다. 베스푸치의 세례명이 바로 '아메리쿠스(Americus)'였고 당시의 모든 세례명이 그랬듯이 그 이름도 라틴말로 지어진 것이니까요.

하지만 아메리쿠스가 아메리카로 된 까닭이 "지명 접미사 '아'"때문이라는 설명은 정확한 설명이 아닙니다. 아메리쿠스가 아메리카로 바뀐 이유는 '여성 접미사'를 붙였기 때문이지 '지명 접미사'때문이 아닙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이미 알려진 세 대륙의 이름이 모두 라틴말 여성명사로 되어 있었습니다. 참고로 오이로파(Europa)와 아프리카(Africa)와 아시아(Asia)는 모두 라틴말로 여성 이름입니다. 발트쩨에뮬러는 그 관행을 따라서 남성명사 아메리쿠스를 여성형인 아메리카로 바꾸었던 것이지요.

'이규태 칼럼'이 "-아"를 "지명 접미사"라는 한 것은 라틴어 지명이 대체로 "아"로 끝난다는 점에 착안한 오해인 듯합니다. 그러나 라틴어에는 "지명 접미사"라는 용어가 없었습니다. "아(-a)"는 1인칭 단수 여성 접미사로 나올 뿐입니다.

물론 그런 오해를 일으킬 만한 이유는 있습니다. 라틴어에서 땅이름은 대개 여성명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대지(大地)의 신(神)이 여성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명사에 성(性) 표시를 하는 유럽어에서는 땅이름이나 나라이름을 여성명사로 취급합니다. 성(姓)표시가 약한 영어에서도 나라이름을 받는 대명사는 여성이잖습니까?

따라서 라틴어 접미사 "-아"를 가리키려면 '여성 접미사'라는 말로 충분합니다. 아직도 라틴어를 쓰는 유럽인들도 필요를 느끼지 못한 '지명 접미사'라는 용어를, 라틴어와는 별로 상관도 없는 우리가 새로 만들어 쓸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문제의 '이규태 코너' 첫 문단은 불과 네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부분적이거나 부정확하거나 모호한 표현이 여기저기 끼어 있고 게다가 명백한 오류까지 섞여 있습니다. 얼른 세어도 너덧 가지 오류가 눈에 띕니다.

이런 글을 읽을 때에는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그럴 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출처도 모호하고 내용도 부정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식은 나중에 정확히 아는 사람을 만나면 망신만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지식은 흔히 '사이비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사이비(似而非)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아니다"는 뜻이잖습니까? 사이비(似而非)는 비(非)보다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비(非)는 그 "아님"이 분명하니까 아주 내놓아 버리면 그만이지만, 사이비(似而非)는 사람을 현혹시키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
뉴어드벤트 캐톨릭 백과사전 (http://www.newadvent.org/cathen/)
독일 라콘귀스타 (http://www.bigoid.de/conquista/biographien/vespucci.htm)
메국 미네소타대학 제임스 포드 벨 도서관(http://bell.lib.umn.edu/map/)
메국 하바드 클래식 (http://www.bartleby.com/43/3.html)
메국 휴스턴 대학 (http://www.uh.edu/engines/epi43.htm)
스터디월드 (http://www.studyworld.com/Amerigo_Vespucci.htm)
영국 스탠포즈 서점 (http://www.stanfords.co.uk/)
캐나다 몬트리올-퀘벡대학 (http://www.er.uqam.ca/)
본문에 출처가 명시된 참고 문헌은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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