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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자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가 '美國과 米國'이라는 제목으로 고증한 메국 이름 중에서 신대륙 이름 '아메리카' 부분을 검토했습니다. 아메리카의 베스푸치 어원설을 퍼뜨리기 시작한 저자의 이름을 오기한 것을 비롯해 적지 않은 오류가 발견됐습니다.

이번에는 그 글의 둘째 문단을 보겠습니다. 아메리카라는 신대륙 이름이 메국 이름의 일부가 된 후 중국과 한국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살핀 부분입니다.

이 아메리카가 한문어 권에 도입되면서 여러 갈래의 표기가 생겨났다. 중국의 옛 지지(地誌)인 '해국도지(海國圖誌)'에 미국은 아묵리가(亞墨利加), 미리가(美理哥), 아미리가(亞美里加), 미리견(美利堅·彌利堅·米利堅)으로 나온다. 철종6년(1855) 통천에 표류한 서양 오랑캐를 중국에 이송했는데 호송관이 북경에 가서야 화기국(花旗國) 사람임을 알았다 했다. 성조기를 성화기(星花旗)라 했고, 이를 줄여 미국을 화기국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美國과 米國, 4/16/2002)

'이규태 코너'는 우선 중국 이름들을 나열하면서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출전으로 들었습니다. 두산동아 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책은 1842년 청나라의 인문학자 웨이유안(魏源, 1794-1857)이 총 50권으로 펴낸 세계지리서로 각국의 지리, 산업, 인구, 정치, 군사, 종교 등을 종합적으로 서술한 책입니다. 이 책은 1847년 60권, 1852년에는 모두 1백권으로 저자에 의해 증보되어 오늘에 전합니다.

중국사람들이 '하이꿔투쯔'라고 부르는 이 책은 총 18장으로 되어 있는데 2장의 각국연혁도(各國沿革圖), 9장의 외대양미리지안(外大洋彌利堅), 10장의 서양 각국교문표(西洋各國敎門表), 11장의 중국서양기년표(中國西洋紀年表) 등에 메국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규태 코너'의 필자도 아마 이 부분을 검토하면서 아메리카의 음차어를 "아묵리가(亞墨利加), 미리가(美理哥), 아미리가(亞美里加), 미리견(美利堅·彌利堅·米利堅) 등"으로 나열한 것 같습니다. 모두 'America'의 중국식 음차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우선, '어째서 한 사람이 쓴 책에 그렇게 많은 이름이 사용됐을까?' 하는 점입니다. 해국도지 9장의 제목이 '외대양미리견(外大洋彌利堅)'인 것을 보면 웨이유안이 채택한 이름은 미리지안(彌利堅)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밖에도 다른 이름이 나온다면 그것은 아마도 당시에 쓰이던 이름들을 모아서 소개했기 때문이겠습니다.

설사 그랬다고 해도 또 한 가지 의문이 더 남습니다. '어째서 청나라 정부가 정식으로 채택했던 음차어가 웨이유안의 저서에 누락되었을까'하는 점입니다.

청나라와 메나라는 1844년의 왕샤(望廈)조약을 통해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맺습니다.

국민대 국어국문학의 송민 교수가 쓴 "'합중국'과 '공화국'"이라는 글에 보면 왕샤조약 첫 머리에 The United States of America가 아미리가주대합중국(亞美理駕洲大合衆國)으로 표기되어 있답니다. 야메이리지아(亞美理駕)는 물론 어메리카의 중국식 음차어지요.

1942년의 첫판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날 전하는 판본이 대체로 1852년에 1백권으로 증보된 것임을 생각하면 그 이름이 해국도지에 누락된 이유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해국도지에는 수록됐었지만 '이규태 코너'에서만 누락된 것일까요?

해국도지 원문을 살펴보면 해결될 의문이겠습니다만 외국 체류 중인 저로서는 영어본 이외에 원문을 구할 수 없어서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이 한문 원본을 확인해 보아주실 수 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어서 '이규태 코너'는 조선 문헌에 나오는 메국 이름을 고증하고 있습니다. 철종6년(1855) 통천에 표류한 메국인들을 청나라에 호송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화기국' 사람임을 알게 됐다는 서술입니다.

하지만 이 서술은 다른 문헌과 상충됩니다. '디지털 말'에 '한미관계 뿌리찾기'를 연재중인 강종일 박사의 글에 따르면 조선 정부가 화기국이라는 이름에 접한 것은 철종6년(1855)이 아니라 고종3년(1866)입니다.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보면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전까지 메국 국적으로 밝혀졌던 배가 조선 해안에 표류한 사건은 모두 네 번입니다.

첫 번째는 1853년 1월30일(음력 철종3년 12월21일) 경상도 동래부 용당포(龍塘浦, 현재 부산)에 메국 포경선 '싸우스 어메리카(The South America)'호가 정박했습니다. 두 번째는 1855년 7월15일(음력 철종6년 6월2일) 역시 메국 포경선 '투 브라더즈(The Two Brothers)'호가 난파돼 4명의 선원이 강원도 통천(通川)에 표류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1865년(음력 고종2년 8월16일) 강원도 연일현(延日縣)에서 난파한 이국인 3명을 태운 배가 삼척에 표류한 것입니다. 네 번째는 메국 상선 '써프라이즈(The Surprise)'호가 난파한 후 생존 선원들이 구명선을 타고 1866년 6월 24일(음력 고종3년 5월12일) 평안도 철산부 선암리 선사포(宣沙浦) 해변에 상륙한 것입니다.

이중 '이규태 코너'의 서술은 두 번째 표류 사건인 투 브라더즈호 조난자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때에 표류해 온 메국 선원 4명은 통천에서 서울, 의주, 뻬이징을 거쳐 당시 상하이에 설치된 메국 영사관에 인도됐습니다.

그러나 '한미관계 뿌리찾기'에 따르면 조선 호송관들이 이들을 뻬이징까지 데려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거기서 화기국이라는 이름을 들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 이름이 나오는 것은 두 번째가 아닌 네 번째 표류사건에서입니다.

철산 수군방어사(해안경비 사령관) 이남보(李南輔)가 표류해 온 서프라이즈호 선원들을 발견한 직후 평양 감사 박규수(朴珪壽)에게 보낸 최초의 보고문에 따르면 표류한 양이(洋夷)들은 화기국인 6명, 청국인 2명 등 모두 8명입니다. 이 난파선에 동승한 청나라 사람과 한자 필담이 가능했기 때문에 조난자들의 신원이 파악된 것입니다.

감사 박규수의 명령을 받고 표류자들을 다시 조사한 철산 부사 백낙연(白樂淵)의 2차 보고서에서도 난파선 서프라이즈호는 화기국의 상선이며 선장은 화기국인이었고, 선원들은 화기국인, 홍모국(紅毛國: 영국)인, 대추국(大秋國: 네덜란드)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들 표류자들은 선례에 따라 뻬이징으로 이송됐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규태 코너'의 서술은 화기국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4차 표류사건을 2차 표류사건 때로 착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화기국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도 뻬이징에 도착한 후가 아니라 철산에서의 현장 심문 때의 일입니다.

2차 표류 사건시기라 하더라도 화기국이라는 말을 뻬이징에서 들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습니다. 그 이름은 중국 남부의 광뚱 지역에서 유래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북부의 뻬이징에서라면 화기국보다는 외교문서에 쓰인 바 있는 야메이리지아(亞美理駕)이나 웨이유안이 해국도지에 쓴 미리지안(彌利堅)이라는 말을 들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뻬이징에 가서야 화기국(花旗國) 사람임을 알았다"는 '이규태 코너'의 서술은 정확해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조선 기록에 남은 메국 이름과 관련, '이규태 코너'가 빠뜨린 아주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1차 메국 포경선 '싸우스 어메리카'호가 표류했을 때의 일로, 조선인이 최초이자 유일하게 독립적인 America 음차어를 만들었던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한미관계 뿌리찾기'에 따르면 동래부 용당포에 이양선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부산 첨사(절도사 휘하의 정3품 군인) 서상악(徐相岳)은 이 사실을 경상 감사 홍설모(洪說謀)에게 보고했고, 이어서 동래부사 유석환(兪錫煥)과 함께 용당포로 가서 좌수영 소속 수군장 장도상(張度相)의 부하인 훈도(교육을 감독하고 장려하는 관원) 김기경(金耆敬)과 별차(동래와 초량의 시장에 파견된 일본어 통역) 김정구(金鼎九)와 소통사(통역)인 김예돈(金藝敦)을 시켜 이양선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조선 관리들이 작은 배로 이양선에 접근하자 외국인들은 손을 흔들어 환영의 표시를 했다고 했고, 따라서 이들은 저항 없이 이양선에 오른 최초의 조선인으로 기록됐습니다.

승선 직후 이루어진 최초의 문정(問情: 심문)에서는 쌍방의 언어장애로 이들의 신원과 소속국이 파악되지 못했습니다. 필담(글로 의사를 통하는 대화방법)을 시도했지만 양이들은 한문을 모르고 조선 관리들은 영어를 모르니 심문이 제대로 이루어졌을 리가 없었겠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중요한 '받아쓰기'가 한 가지 일어났습니다. 조선 관리들의 기록에 미국인들이 '며리계'라는 말만 여러 번 반복했다는 구절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는 메국 선원들이 발음한 '어메리카'를 조선 관리들이 소리나는 대로 받아쓴 것이 분명합니다.

조선 관리들이 '며리계'라고 한 것은 한국 한자음으로 '메'로 읽히는 글자가 없어서 차선책으로 '며'자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며리계(里界)라는 말이 중국이나 일본 문헌에서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는 조선인이 만든 음차어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며리계'는 조선인들이 처음이자 유일하게 만들어 기록에 남긴 '어메리카'의 음차어임에 분명합니다.

어쨌든 "美國과 米國"이라는 제목으로 쓰인 '이규태 코너'의 두 번째 문단에서도 의문과 오류가 다수 발견됩니다. 그중 다음의 몇 가지는 아주 중요해 보입니다.

첫째, 해국도지와 관련된 의문, 즉 어째서 왕샤조약에 쓰인 메국의 공식이름 야메이리지아(亞美理駕)가 누락되었는지가 확실치 않습니다. 웨이유안의 실수인지 '이규태 코너'의 실수인지 가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화기국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시기를 메국인의 2차 표류 사건으로 본 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그것은 3차 표류 사건에 나오는 이름이며, 그것도 뻬이징에 가서야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철산에서 이루어진 현장 심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1차 표류 사건에서 조선인이 만든 '며리계'라는 음차어를 간과했습니다. 그래서 "美國과 米國"이라는 제목의 '이규태 코너'는 서양인과 중국인과 일본인이 만든 메국 이름들은 주욱 나열하면서도 정작 조선인이 만든 이름은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끝으로 사소한 오타(?) 하나. '이규태 코너'의 해국도지 한자표기가 해국도(海國圖)'誌'로 되어 있으나 그 책이 웨이유안(魏源)이 지은 책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海國圖'志'가 맞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강종일, "한미관계 뿌리찾기"  (http://www.digitalmal.com/)
국사편찬위원회, "고종 시기," (http://www.nhcc.go.kr/khdb/db/kchong.html)
송민, "'합중국'과 '공화국'" (http://www.korean.go.kr/)
오세보, "초기의 한미 관계," (http://exoh.com/utkr/utah/usa/eminsa1.htm)
본문에 출전을 밝힌 참고문헌은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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