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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짜> 중 한 장면
 영화 <타짜>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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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짜>(2006)에 보면 도박판은 호구와 타짜로 구성된다. 타짜는 자기가 타짜인 걸 안다. 그걸 목표로 피나는 훈련과 살벌한 실전을 치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구들은 자기가 호구인지 모른다. 무수히 돈을 갖다 박고도 모른다. 그러니 호구가 타짜한테서 돈을 딸 수가 없다.

"엽전들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일제의 조선화폐 정리과정에서 나왔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이후 은전을 만들었고 조선에도 통용시켰다. 그래서 조선에는 세련된 은전과 칙칙한 엽전이 공존했는데, 은전에 의해 엽전이 내몰린 사연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페미니스트와 마초 사이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기사 '마초라는 말 좀 알고 쓰자'에서 페미니즘의 두 중심어가 만들어진 배경을 조명했다. 페미닌의 기원은 (미국인이 보기에) 우아한 고대 라틴어이고, 마초의 기원은 (미국인, 특히 미국 여성이 보기에) 미개한 중남미의 스페인어다. 시대적, 문화적 배경이 판이한 두 단어가 페미니즘의 주요 개념으로 자리 잡는 순간, 페미니즘의 성격은 결정된 셈이다. '마초를 무찌르는 것'이 페미니즘의 목표이자 방법론이 된 것이다.

성적 대결의 악순환은 계속된다

'어찌됐든 남성이 잘못'이라는 인식은 거기서 생겼다. 왜? 남성은 마초니까. 이같은 인식은 때로 '니 머릿속이 문제'라는 적나라한 모욕이거나 혹은 '농담이 실패했으면 애교라도 부려야지'라는 애정어린 충고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론은 마찬가지다. 마초의 잘못이다. 남성은 혼란스럽다. 내가 진짜 마초인가? 진짜 내 잘못인가? 그래서 냉소적이 되거나 역공을 펴게 된다. 성적 대결의 악순환된다.

페미니스트들도 상대와 상황에 따라 용어를 가려 쓴다. 예컨대 아버지나 남편이나 아들을 마초라고 비난하는 페미니스트는 별로 없다. 또 지도 교수나 직장 상사를 면전에서 마초로 부르는 페미니스트도 거의 없다. 정서적 유대가 중요한 관계, 혹은 불리한 권력관계에서는 마초 공세를 벌이지 않는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화를 자초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안전하다 싶으면 사적이든 공적이든 '마초 공세'를 주저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가 누군가를 마초로 몰아붙인다면 이는 그가 손쉬운 상대로 꼽혔다는 뜻이다.

중요한 사실은 페미니스트도 마초를 참을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상사나 지도교수, 남편이나 아버지가 마초가 아니라서가 아니다. 가정의 평화와 직업의 안정이 중요하기 때문이겠고, 성 평등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도 때로 유연한 전술이 더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그런 전술적 유연함이 적용되는 범위가 별로 넓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가부장이나 마초가 되지 못하는 남자들도 많고 심지어 성 평등에 동조하는 남성도 많다. 그렇지만 페미니스트의 눈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더구나 진짜 마초들에게 유연성을 띠는 바람에 페미니스트의 마초 공격은 어정쩡한 남성들에게는 편파적으로까지 보인다. 마초 공세의 강도가 수구 세력보다 진보 세력에게 더 심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미국 페미니즘의 고민... '페미니스트가 없어지고 있다'

요즘 2세대에서 3세대로 건너가는 미국 페미니즘의 고민은 두 가지다. 백년이 넘은 운동인데도 실질 성 격차가 어느 선 이상 줄지 않는 것과 페미니스트 인구가 줄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갤럽 조사에 보면 페미니스트 미국 여성은 1992년에 33%를 기록한 이후 10년 후인 2001년에는 25%까지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다시 10년이 지난 요즘 조사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약 20% 안팎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한다. 80퍼% 미국 여성들은 왜 페미니스트이기를 거절할까?

좀 더 심각한 것은 페미니스트 그룹 안에서도 젊은 페미니스트의 정체성이 약하고 한때 페미니스트였다가 번복하는 여성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연구자들은 이를 "페미니스트의 탈정체성(deidentification of feminist)"이라고 부르고 원인 규명 중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미국에서는 제도적 성평등은 성공했지만 페미니즘은 실패했다는 평가도 있다.

왜 그럴까? 지나친 마초 공세 때문이 아닐까? 미국을 제외한 다른 서구 페미니즘은 1990년대 이래 남성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캐나다의 저널리스트 데이빗 프럼은 아랍권의 대거 이민으로 악화된 유럽의 성 격차를 지적하면서 "서구 남성이 페미니스트의 적이 아니라는 걸 알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내셔널 포스트>, 2011년 5월 5일 치). 호주 국립대학 여성학과의 마이클 플러드 교수는 "남성이 참여한 남녀 격차 해소 정책의 성과가 빠르고 효율적"이라고 했다.

사회 지표와 고위 지도층의 남녀 격차가 미국보다 유럽에서 현저히 적다는 점을 보면, 남성의 성 평등 운동 참여가 중요하다는 가설은 검증해 볼만하지 않을까? 그러나 간단없이 계속되는 마초 공세를 보면 한국 페미니즘은 다른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길을 고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은전이 엽전 몰아내고 행세했던 것은 겨우 35년이다. 호구 벗겨먹던 타짜들은 행복했던가? 멋진 아파트의 널따란 욕실 한켠에 쪼그리고 앉아서 들릴듯 말듯 내뱉던 꽃뱀 김혜수의 독백이 생각난다. "... 먹고 살기... 힘들다." 안쓰럽기는 하다만, 호구들은 얼마나 더 힘들겠냐.

한국 여성 운동 초기의 문제의식은 '이 세계 절반은 나'라는 노래 속에서 읽을 수 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세계의 절반'을 끌어올리는 일은 도덕과 윤리를 떠나서 생존과 휴머니즘의 문제다. 그러나 '저쪽 절반'을 찍어 눌러서 '이쪽 절반'을 끌어 올리는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가능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 그게 바로 내가 한국 페미니즘의 집요한 마초 공세에 매우 부정적인 까닭이다.


태그:#페미니즘, #나꼼수, #타짜, #옆전, #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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